[택켄] 사토라레

2021. 4. 28. 01:33 from text



사토라레
정 택 운 x 이 재 환 







점심을 먹고 나니 입 안이 너무 달았다. 택운은 혀로 입 안을 훑으며 고민했다. 물론 입 안이 너무 단 거야 올라가서 양치를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양치를 하기 전에 다른 걸로 입 안을 깔끔히 헹구고 싶었다. 예를 들면 커피라던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카페라떼라던가.
“어? 택운 씨 또 카페 가게?”
“네.”
“거기 사토라레 직원이 택운 씨 좋아한다며?”
“…네.”




1.




사토라레(さとられ). 천 만 명 중에 한명으로 태어나는 일종의 돌연변이로,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특정 범위 내의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염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버리는 특이체질이다.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력한 뇌파를 지녔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에 비해서 뇌활동이 활발해서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최초의 사토라레는 일본에서 발견되었으며 일본의 민화에 나오는 마음을 읽는 요괴, ‘사토리’에서 따와서 전세계적으로 사토라레라고 불린다. 
‘사토라레건 뭐건 나만 아니면 관계없지.’
재환을 만나기 전까지 택운의 생각이었다. 
사토라레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지만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다. 과학, 수학, 의학, 예술 등 사토라레의 연구와 발견이 인류를 몇 번이나 구했다.
하지만 사토라레는 양날의 검. 국가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사토라레를 보호한다. 사토라레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이웃들이 혹여라도 이상한 말을 하지 않는지 감시한다. 사토라레는 자신의 생각이 남들에게 전달되는 걸 알지 못하는 채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이 가감 없이 모조리 들린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의 미래는 무엇일까. 사토라레라는 용어조차 없을 시절,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신이 사토라레라는 걸 알아버린 사람들은 모조리 자살했다.
‘나 같아도 자살할 거야.’
-핫! 레오다! 어떡해, 너무 좋아…
카페의 유리문 때문에 자신을 보았는지, 벌써부터 들려오는 강력한 염파에 택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알려진다는 걸 알면 자살하지 않더라도 쪽팔려서 죽고 싶지 않을까. 
딸랑- 택운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카페 안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택운을 보았다. 그건 택운이 키도 크고 잘생겼기 때문이지만,
“어서오세요!”
-어떡해! 오늘도 너무 멋있어!
이 근방의 명물인 사토라레 청년이 짝사랑하는 상대가 바로 택운이기 때문이다. 

‘근데 얜 사토라레가 아니었어도 이 상태면 진작 나한테 들켰겠는데.’
택운은 자신을 향해 눈으로 하트를 발사할 기세인 재환을 보며 언제나 자신이 주문하는 메뉴를 말했다.
“카페라떼 뜨거운 거요.”
“카페라떼 한 잔 주문 받았습니다. 도장 찍어드릴까요?”
“네. 여기요.”
재환은 카운터에 몸을 숙이고 택운의 쿠폰에 도장을 콩 찍었다. 
-어라, 도장이 하나 남았네. 벌써 14번이나 왔구나. 설마 도장 다 채워서 커피 한 잔 무료로 마시고 다른 카페로 갈아타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안 돼! 그럼 나 알바 그만 둬 버릴 거야! 
“이제 도장 하나만 더 찍으시면 15번 다 채우시네요.”
속으로는 격렬하게 안 된다고 발이라도 구를 기세로 동동거리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다. 그 괴리감에 택운은 웃음이 터질 뻔 한 것을 겨우 참고 쿠폰을 받아 들었다.
“그러게요. 15번씩 채운 게 벌써 3번은 넘은 것 같아서 공로상이라도 받고 싶네요.”
-헉! 50번도 넘게 왔다는 소리야? 하긴 내가 알바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거지 전에는 사장님이 풀타임으로 하셨댔지. 그럼 계속 오겠구나.
“사장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재환은 살짝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쿠폰을 건넸다. 택운은 쿠폰을 지갑에 넣으며 뒤로 물러나서 재환이 카페라떼를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변태라고 생각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괜찮은 애다. 

택운이 재환을 처음 본 건 3주 전이었다. 스튜디오 앞에 있는 작은 카페는 생긴 이래로 계속 단골이었다. 사장님이 커피에 관심이 많은지 커피 맛이 체인점보다 훨씬 좋았고 일단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 제일 큰 메리트였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이 업종의 특성상 커피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데 회사 코 앞에 맛 좋은 커피 전문점이 생기다니, 단골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잔, 두 잔, 그 후부터는 세지 않고 말없이 쿠폰 도장을 바꿔가며 얼굴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에 갖다 놓은 커피 머신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커피 맛에 중독이 되어갈 때 즈음, 새로운 알바생인 재환이 나타났다.
처음엔 사장님 옆에서 커피 내리는 법이며, 주문을 받고 돈 계산을 하는 법 등, 여러 가지를 배우는 것 같더니 며칠 뒤부터는 오픈부터 2시까지는 혼자 가게를 보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점심시간이라 사람들 엄청 오네! 사장님도 안 계신데 실수하면 어떡하지….
난생 처음 염파를 들었을 때는 무척이나 놀랐다. 목소리의 진동이 고막에 닿는 물리적인 느낌과는 달랐다. 타인의 생각이 두개골을 넘어서 직접 뇌를 강타하자, 약간의 공포심까지 느낄 정도였다. 지금이 원시 시대라면 저 애를 신神으로 모시지 않았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도 했다. 염파의 내용은 딱 20대 초반의 귀여운 긴장감을 말하고 있어서 공포심은 바로 사라졌지만. 
“주, 주문하시겠어요?”
“카페라떼 뜨거운 걸로.”
“네, 카드 받았습니다!”
계산을 하고 뒤로 물러나서 분주하게 커피를 내리고 잔을 준비하는 등을 보고 있었다. 사토라레라고 커피를 다르게 내리는 건 아니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염파가 머릿속을 울렸다.
-대박. 얼굴이랑 몸이 둄마 내 취향. 알바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취향이라니 그거 내 얘긴가? 당황해서 가만히 있는데 음료를 다 만든 재환이 택운을 힐끔 훑어보며 외쳤다.
“뜨거운 카페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헐 고간 봐. 겁나 두둑하잖아- 완전 쩔어!
택운은 두 손으로 자신의 고간을 가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카운터에서 음료를 받은 후 바로 카페를 나왔다. 
“잠시 얘기 좀 하시죠.”
그리고 바로 낯선 남자에게 붙들렸다. 그는 사토라레 담당 공무원으로, 재환의 신변에 관련한 일들을 중재하는 일을 맡고 있다고 한다. 
“놀라셨겠지만 재환 씨는 동성을 좋아하는 성적 취향이 있어서… 정택운 씨께서 양해를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이름도 압니까?”
“카페에 세 번 이상 온 손님들의 이름과 다니는 직장은 조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사토라레가 뭐라고. 그냥 남자 좋아하는 꼬맹이인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과잉보호를 해야 하나. 아무리 자살방지를 위해서도 이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해라니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정택운 씨는 재환 씨가 뭐라고 하든 못 들은 척하시면 됩니다. 가급적이면 들리는 염파를 못 들었다고 여기시고 행동해주십시오. 이런 배려가 귀찮으시다면 아예 카페에 오시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죠.”
차라리 노골적으로 ‘우리 애한테 이상한 영향 끼치지 않게 카페에 오지 마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택운은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했다.
“카페에 오지 말라니 이건 명백한 월권행위 같은데요. 지금껏 그 꼬마의 사생활을 이런 식으로 조작한 겁니까? 그 사토라레, 애인이 있던 적이 있긴 합니까?”
“……”
공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과잉보호 아래에서 애인 한 번 못 만들어본 사토라레 꼬마가 불쌍했다. 하지만 그 꼬마에 대한 연민보다는, 내가 왜 공무원들 편하자고 내 커피를 포기해야 돼? 난 맛있는 커피를 마실 권리가 있다고! 라는 오기가 먼저였다. 
공무원이 자리를 뜨고 나서 미처 터트리지 못한 화를 삭이며 스튜디오로 돌아갔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렸던 어이없는 상황에 입이 말라서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약간 식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재환이 내린 커피는 카페 사장이 내린 커피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 뒤로는 불가항력이었다. 사장님의 커피보다 더 맛있는 커피라니! 야근이 잦은 직업이라 직원들 저녁도 사줘야 하고 재료비도 써야 하고, 이래저래 돈 나갈 구석이 많아서 매일 카페에 가지는 못했지만 여력이 되는 대로 카페에 드나들었다. 나름대로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실장님, 오늘은 카페 안 가세요?” 하고 물어대는 걸 보면 거의 참새가 방앗간 지나치지 못하는 격으로 보였던 것 같다. 

-힙업 쩐다… 다리도 엄청 길어… 완전 핫바디의 정석!
-여자친구 있을까? 있겠지? 내가 여자라면 저런 남자 가만 안 놔둬.
-미친 손가락 개예뻐 섬섬옥수라는 말은 당신을 위해 존재해요!
-보다보니까 되게 사자같이 생겼네. 밀림의 왕자 레오 같다.
사토라레의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것은 커피를 내리는 데서도 발휘되는 걸까. 이제는 재환의 알바 스케쥴까지 꿰고서 사장님이 풀타임을 하는 날엔 카페에 들르지 않기까지 한다. 자주 보던 사장님껜 죄송한 말이지만 재환의 커피가 두 배는 맛있었다. 
그렇지만 이 꼬마 알바생은 올 때마다 얼마나 속마음으로 쫑알쫑알거리는지. 택운은 커피를 주문할 때 외엔 재환과 말도 섞은 적 없으면서 재환과 엄청나게 친한 사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재환은 택운이 올 때마다 속으로 이래서 취향 저격, 저래서 취향 저격이라면서 자신의 취향을 줄줄줄 읊어댔기 때문이다. 
사토라레의 염파가 닿는 범위는 재환을 중심으로 한 3m의 구체. 카페가 작아서 3m 안에도 제법 테이블이 있어서 아마도 카페 사람들은 다 들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낯이 뜨거워지다가도 당사자인 재환은 자신의 생각이 들리는 줄 전혀 모르는데 내가 신경 쓸 일인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택운이 평소처럼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스팀밀크를 치던 재환의 등이 멈추었다. 그러다 평소보다 강한 염파가 들려왔다.
-…나 레오 씨 좋아하나봐.
택운은 숨이 턱 막혔다.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사토라레는 남들보다 강한 뇌파로 남의 뇌에 직접 생각을 전달하는 염파를 보낼 수 있는 돌연변이다. 생각과 감정은 무 자르듯 깔끔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생각을 담은 염파와 함께 감정도 전달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울렁거리는 마음은 자신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재환의 염파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택운은 그렇게 스스로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이건 아냐. 내 감정이 아니라 저 애의 감정이야. 그러니 진정해.’
하지만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재환의 감정이 너무도 강력했다. 
떨림과 설렘, 그리고 깨달음이 범벅된 풋내 나는 첫사랑의 염파는 제법 사람을 만나볼 만큼 만나본 택운의 마음까지도 설레게 만들었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약간씩 붉어진 얼굴로 택운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택운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자신을 이렇게 울렁이게 만들고도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재환의 등만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집에 가서도 재환의 뒷모습이 계속 눈 앞에 어른거렸다. 
‘날 좋아한다고? 나한테 말도 제대로 안 걸어봤으면서?’
프로젝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샘 작업을 할 때가 아니면 11시에 칼 같이 잠드는 택운이다. 그런 그가 잠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할 정도로 재환이란 존재는 택운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대체 뭘 보고 좋아한 거야. 고간이 두둑해서? 힙업이 쩔어서? 어깨가 넓고 등빨이 좋아서? 택운은 재환이 자신을 보며 생각했던 염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재환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리고 며칠을 밤을 새며 수면부족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인정하고야 말았다. 재환의 염파에 동화되었든 동화되지 않았든, 자신은 이미 재환이 너무도 신경이 쓰이는, 연애의 출발선 앞에 서 있다고.
하지만 인정을 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재환은 여전히 고백은커녕 주문을 받는 것 외엔 자신에게 제대로 말도 걸지 못했다. 택운 역시 재환의 마음을 안다는 티를 낼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택운은 말을 숨기고 재환을 지켜보았다. 대체 자신의 정확히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환의 마음은 날로날로 커져만 갔다. 택운 역시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재환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택운은 누군가가 뾰족한 바늘 끝으로 양심을 콕콕 찌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간단한 말로 하자면 미안해 한다는 뜻이다. 재환은 자신의 마음의 소리가 이렇게 3m이내의 사람들에게 모두 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텐데 자신은 이미 알고 있어서. 
재환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택운에게 한 번도 자신의 흑심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 잘 감추고 있는데 성적 취향과 좋아하는 상대까지 모조리 아웃팅해버린 기분이었다. 재환의 노력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맨 처음 택운이 재환의 마음이 어떻든지 자신은 커피만 마시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장 다 찍으면 서비스라고 쿠키라도 좀 드릴까… 거기다 내 번호라도 같이… 아니, 단골 쫓아낼 일 있어? 미쳤어! 미쳤어!
“안녕히 가세요!”
택운은 재환의 인사와 함께 들린 귀여운 속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카페를 나갔다. 

“실장님 또 그 카페 가셨어요?”
“네.”
스튜디오로 돌아가니 여직원 한 명이 테이크아웃 잔에 찍힌 로고를 보고 묻는다. 택운은 맛있는 커피를 홀짝이며 맞노라고 대답했다. 여직원은 순순한 택운의 대답에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으… 싫지 않으세요? 그 사토라레 실장님 좋아하지 않아요? 주변에 소문 다 났을 것 같던데.”
택운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여직원을 지긋이 보았다. 무슨 의도로 말하는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혐오스럽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추문에 휘말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불쾌해해도 되는 건가. 택운이 고민하던 때에 남자 직원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 작고 귀여운 남자애라면 모를까 그 사토라레는 키도 실장님만하던데. 좀 징그럽지 않아요? 비위도 좋으시다.”
이 말로 확실해졌다. 혐오스럽다는 뜻이네. 택운은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그 애가 사토라레가 아니었으면 모르는 사람들한테 이딴 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겠죠.”
그 애는 나한테 피해주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이 드러날까 무서워서 자기 마음을 입 밖에 낸 적조차 없는데 사람들의 혀는 어찌나 이렇게 쉽게 움직이는지. 공무원들이 아무리 과잉보호를 하면 뭐하나. 사람들의 세치 혀는 공권력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걸. 
“실장님 화나셨어요?”
“죄송해요. 실장님 기분 나쁘실 텐데 저희가 너무 놀리듯이 말했죠.”
직원들은 택운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택운이 화가 난 것 같아보이자 눈치를 살폈다. 택운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차라리 카페에 오지 말라던 공무원을 떠올렸다. 그가 왜 그래야 했는지 알 것 같다.
재환은 택운을 잘 모르지만 택운은 재환을 제법 알았다. 물론 그건 반칙이다. 동의 없이 상대의 마음을 알아 버린 것이니까. 하지만 택운은 재환이 무척 착하고, 순진하고(비록 20대 초반답게 혈기왕성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순진하기 짝이 없다), 조심스러운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작 자기 때문에 재환이 여러 사람들에게 안 좋은 말을 듣고 있다니 어이가 없고 기분이 나빴다.
‘더 좋은 사람도 아니고… 고작 내가 뭐라고.’
택운은 자기비하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제법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기 스튜디오를 갖고 있는 29살의 건축가는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협회가 밀어주는 스타 건축가도 아닐 뿐더러 외모가 그리 뛰어난 편도 아니다. 재환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얼굴과 몸을 좋아해주지만. 
‘자기도 몸이 나쁜 편도 아니면서…’
택운은 재환의 취향이 그리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재환이 좀 더 보는 눈이 있었다면 자신보다 더 좋은 남자를 골랐어야 했다. 그런 풋풋한 고백을 듣고 그저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니라 재환에게 단박에 반할 수 있는. 오기와 반발심이 아니라 재환에 관한 연민과 애정으로 카페에 다닐 만한 그런 남자. 그런, 좋은 남자. 하지만 재환은 하필이면 택운에게 반해버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택운은 망설임 없이 스튜디오를 나섰다. 택운의 발은 성큼성큼 재환이 일하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자 “어서 오세요!” 재환의 목소리와 함께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재환의 염파가 머리를 울린다. 
-어라? 방금 사갔는데 왜… 혹시 커피를 잘못 드렸나?
택운은 카운터에 섰다. 그리고 평소 주문과는 다른 음료를 주문했다.
“초코 라떼 아이스 한 잔 주세요.”
그건 바로 재환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였다. 
“그리고 그쪽 번호도.”
택운은 도장 한 칸이 남은 쿠폰과 함께 펜을 내밀었다. 
“……네?”
-……팔든?
재환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되물었다. 택운은 약간 긴장한 것을 티 내지 않고 펜을 재환의 앞까지 내밀었다. 
“번호 달라구요. 핸드폰 번호.”
“아, 네에…”
-……어? 이거… 실제 상황이야?
사토라레의 염파는 3m 이내의 구체. 하지만 감정의 강도에 따라 그 범위는 더 넓어진다. 택운은 주문한 아이스 초코 라떼를 재환의 손에 쥐여 주며 “그쪽 마셔요. 아니, 그쪽이 아니지. 재환 씨 마셔요.” 라고 말한 후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카페문이 닫히는 순간 재환이 속으로 외친 염파는 50m 밖까지 날아갔다.
-레오 씨가 나 좋아하나봐!!!!! 
당연히 그 염파는 택운에게까지 닿았다. 택운은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 재환의 염파를 느끼며 기쁘게 웃었다. 
맞아. 나도 몰랐는데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그리고 몇 번의 만남 뒤, 택운과 재환은 사귀게 되었다.





2.




“택운 씨!”
택운은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재환에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재환은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주변에 마구 뿌려대고 있었다. 엄청나게 시끄러운 염파와 함께.
-어떡해, 택운 씨 오늘도 너무 멋있어…! 한 번 더 반할 것 같아!
‘그 말만 백번도 넘게 들은 것 같아요.’
-택운 씨는 진짜 딱 봐도 건축가 같아. 지적이고 섹시하고 옷도 특이하고…. 건축 잡지에 얼굴 사진 실려서 막 팬클럽 같은 거 생기면 어떡하지? 쫓아다니는 여자들 생겨서 우리 사이 들키는 거 아냐?
‘이미 사진은 실린지 오래에요. 잡지 좀 실린다고 팬클럽은 안 생겨요. 그런 건 아이돌한테나 있는 거지. 아무리 내가 애인이어도 그렇지 재환 씨는 콩깍지가 너무 심해요.’ 
택운은 습관적으로 재환의 염파에 속으로 대답을 해주며 자신의 앞으로 뛰어온 재환을 가볍게 안았다. 재환이 속으로 외쳤다.
-흡! 나 땀 냄새 날 텐데!
“안 나.”
핫.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네?”
재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묻자 택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재환을 안은 팔에 힘을 약간 줬다가 풀며 대답했다.
“땀 냄새 안 나니까 그렇게 흠칫 놀라지 마요.”
“아아- 티 났어요? 저기서부터 뛰어오는 바람에 땀 났을까봐 신경 쓰여서요.”
재환은 헤헤 웃으면서 손부채질을 했다. 택운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서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는 게, 아마도 공무원들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원래 한 명이던 담당 공무원은 택운과 재환이 사귀던 날부터 3명, 때로는 5명까지로 늘어났다. 도청 따위를 하지 않아도 재환의 속마음을 통해 데이트 날짜는 물론 코스까지 꿰고 있을 테니 스케쥴 내용에 따라 인원수를 조절하는 모양이다. 
“자 그럼 갈까?”
“네!”
오늘은 캠퍼스 데이트. 영화를 볼까 연극을 볼까 뮤지컬을 볼까 데이트 코스를 고민하던 중, 재환이 자신의 작업실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 오게 되었다.
사실 사토라레와의 데이트에는 제법 제약이 많다. 영화는 상관없지만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사람이 직접 나와서 공연을 하는 종류는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좋다. 공연을 보며 재환이 떠올리는 생각들이 배우들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3m 밖에서 보면 되는 것이지만 클라이막스라던가, 감정이 격한 씬에서 3m를 뛰어넘는 염파가 방출된다면 배우들이나 관객들이 동요할 것이 분명하다. 
영화관 역시 그다지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3m 내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평상시에는 명동이나 강남 같은 번화가에 가지만 않으면 그렇게 사람과 가까이 있을 일이 없는데 영화관은 사람의 밀집도가 높아서 유의가 필요하다. 
택운은 난생 처음 듣는 ‘사토라레와 데이트할 때 필요한 주의사항’을 공무원들에게 전해 들으며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공무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재환과의 연애가 순탄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약간 체념했다. 재환이 이상한 시선에 노출되느니, 차라리 감시를 받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말이다.
 
재환과 사귄지 어느새 2달째. 그 동안 공무원들의 도움을 받아 사람이 적은 영화관을 골라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배우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 뒤에 연극을 보기도 하면서 즐거운 데이트를 즐겼다. 하지만 지금, 택운은 약간의 불만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스킨십!
물론 아주 스킨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손도 잡고 포옹도 했다. 뺨에 뽀뽀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몇 살인가. 내년이면 계란 한 판이다. 어린애 장난 같은 스킨십에 아쉬움만 커져 갔다. 
재환은 속으로는 고간이 두둑하다느니, 힙이 빵빵하다느니 잘도 평해놓고 정작 사귀게 되니 굉장히 수줍음을 많이 탔다. 물론 그런 모습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재환이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본 것은 택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별 불만은 없다. 오히려 귀엽지. 첫 데이트 때 손을 잡았다가 
-헐... 섰어...
손만 잡았는데도 발기를 했다는 말에 택운은 난생처음 조카가 아닌 누군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미친 귀여움이었다. 
그래서 큰 불만은 없다. 그저 어디를 가나 사방에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는 만큼 욕구가 쌓이는 것뿐이다.
‘꼭 자고 싶은 것도 아닌데.’
택운은 재환을 버스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서서 재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미용실 갈 때가 되어 가는지 곱슬거리는 머리 뿌리가 올라오고 있어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걸 용케 들었는지 재환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왜, 왜 웃지? 나 머리에 비듬 있나? 아닌데? 나 엄청 깨끗하게 씻었는데??
‘비듬 같은 거 없어. 있어도 그걸로 웃지 않을 거고.’
택운은 재환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으며 버스 창문 밖을 구경했다. 학교 안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천천히 교내 도로를 따라 학교 주변에 심긴 가로수들을 구경시켜주었다. 나무의 가지마다 새싹들이 움 틀 준비를 하고 있는 듯 까만 몽우리가 올라와 있었다. 이제 봄이구나. 택운은 자신의 손길에 잔뜩 얼어버린 재환과 함께 이 봄을 맞는 것이 퍽 기뻤다. 
‘이런 애랑 뭘 하겠어.’
그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싶을 뿐이지만 재환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택운은 쑥스러운지 발갛게 열이 오른 재환의 목덜미를 지긋이 내려 보았다. 그런 택운을 바라보는 공무원들은 소리 없이 외쳤다.
‘미친놈아 그만 좀 봐! 애 울겠다!’
재환은 천성도 그렇지만 여러모로 국가의 관리를 받은 터라 또래에 비해 순진한 면이 있었다. 성적 호기심은 왕성하지만 그 호기심은 질척하고 더러운 욕망보다는 연애에 대한 환상에 가깝다. 그래서 공무원 모두는 재환의 이상형을 알고 있었다. 
야한 남자.
이게 재환의 이상형이다. 

정택운이란 남자는 재환의 이상형을 현실로 구현시킨 듯이 너무나도 야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무심한 동작 하나하나가 야했다. 날렵한 눈매와 두꺼운 목, 넓은 어깨, 두터운 허리와 중심부, 그리고 길고 늘씬하게 뻗은 다리까지. 긴 팔로 휘적휘적 움직이는 모습은 이상하게 위협적이다. 게다가 목소리는 또 어찌나 반전 있는 미성인지. 덩치도 커다란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라떼 한 잔이요.” 라고 매일 같이 카페에 와서 주문을 해대니, 재환이 택운에게 빠지는 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의외인 점은 택운도 재환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조사한 결과 귀찮은 걸 꺼리는 성격이라고 해서 국가의 관리를 받는 재환을 꺼릴 줄로만 알았는데 택운이 재환을 받아준 것은 재환을 관리하는 부서에서도 꽤 놀랄 만한 일이었다. 택운에게 의외로 반골기질이 있다는 것을 안 후로 ‘아…’약간 깨달음에 탄식하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택운은 제법 재환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았는데, 문제는 그 진심이 너무나도 진심인 것에 있었다. 
‘눈빛이 너무 야해!’
처음에는 택운이 재환을 이용하려는 것인가 싶어 경계하던 그들도 택운의 행동이나 눈빛으로 그가 진심인 것을 알게 되었다. 택운은 ‘내 어디를 보고 좋게 느낀 거지. 나한테 실망하면 어떡하지?’ 불안해하는 재환의 손을 잡아 말없이 다독여주었고, 사토라레의 특성상 연애를 숨기지 못하는 재환 때문에 회사 사람들은 물론 카페에 다니는 손님들에게도 재환과의 연애가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택운은 서툴지만 자신을 많이 좋아하는 재환을 진심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재환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야했다! 어린 애한테 그런 눈빛은 반칙이야! 라고 말할 만큼 야했다! 
택운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고 재환은 말도 많았지만 속마음도 시끄러운 편이다. 택운이 재잘거리는 재환을 말없이 바라보면 재환은 돋보기에 태워지는 개미처럼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머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날 것처럼 열이 올랐다. 마음의 소리도 
-…! ….!!
무슨 모스부호마냥 끙끙거리기만 할 뿐, 어쩔 줄을 몰랐다.
공무원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귀게 된 후로 택운이 매일 밤마다 재환의 꿈에 나와서 그를 희롱하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지금껏 택운이 뭐라도 하려고 하면, 보고 있다는 티를 내서 진도를 못 빼게 한 것인데 이제 슬슬 한계가 온 것일까. 택운의 재환을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진득해지고 재환의 꿈 속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느끼던 공무원들은 오늘 데이트가 그들의 연애의 분기점이 될 것을 예감했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 밀실에서 단둘이! 
뭘 하겠는가? 물론 끝까지 가진 않겠지만… 뻔하지. 재환을 가장 오래 지켜본 공무원은 재환이 데이트 계획을 짜서 택운에게 말하려고 연습까지 하는 것을 보며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순진했던 내 새끼가 어느새 이렇게 다 커버렸어…! 
삐익- 재환은 버스 벨을 누르고 손으로 뒷목을 긁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빨간 얼굴은 이제 택운과의 데이트를 따라다니는 필수템과도 같다. 
“이, 이제 내리면 돼요.”
“그래요.”
-연상의 존댓말… 택운 씨는 너무 모에한 것 같아…
‘모에? 모에가 뭐지?’
택운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재환을 따라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갔다. 방학이지만 예대라서 그런지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이 간간이 보였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복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짐들에 택운이 피식 웃었다. 
“나 학교 다닐 때도 이랬는데. 요새도 이러나 봐요.”
“네. 조교님이 방학 전에 짐 다 갖고 나가라고 해도 듣는 애들이 거의 없어요. 아, 저는 교수님 밑에서 일하는 애들이랑 같이 쓰는 작업실이라서 안 나가도 돼요!”
재환은 택운이 혹시 자기를 뻔뻔한 애로 알까봐 열심히 자기변호를 하며 작업실로 택운을 데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확 기름 냄새가 풍겼다.
“미대 작업실은 이런 느낌이구나.”
넓은 데스크 두 대를 붙여놓고 모니터 두 대를 기본으로 장착한 컴퓨터들이 즐비했던 건축과 스튜디오에 비해 회화과의 작업실은 상대적으로 넓고 어지러웠다. 물론 재환의 작업실은 교수님 아래에 있는 학생들의 작업실이니 일반 작업실보다는 인원이 적은 편인 걸 감안해야 하지만 말이다. 
벽마다 붙어있는 사진이나 엽서들, 쌓여있는 책과 잡지들을 보며 택운은 이런 면은 비슷하군,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은 눈에 보이는 큼직한 짐들을 구석으로 치우고 의자를 가져왔다.
“여기 앉으세요.”
“네. 재환 씨가 그린 것들은 어떤 거에요?”
“큰 것들은 다 여기저기 대전이나 전시 같은데 출품돼서 없구… 지금은 작은 습작이랑 스케치만 있어요. 잠깐만요.”
재환이 가져온 목탄화와 아크릴 스케치를 보면서 택운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건축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안다. 건축은 현실과 예술을 이어주는 그릇이라는 걸. 현실과 예술이 한 선으로 나뉘어 있다면 건축은 그 선 위에 찍힌 점과도 같다는 걸. 하지만 그 말은 건축에는 제약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금전의 벽, 기술의 벽, 건축법과 환경법, 다양한 법의 벽이 존재했다. 실용과 철학을 오가며 끊임없이 정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재환의 그림에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건 언제를 그린 거에요?”
택운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재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재환은 택운의 앞에 쪼그려 앉아서 설명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랑 같이 치악산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계곡에서 놀았는데 물이 초록색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죠. 냉장고에 넣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차가울 수 있다는 것두요. 형들이랑 계곡에서 실컷 놀다가 무심코 계곡 한쪽 구석을 봤는데… 그때 부모님은 제가 잘못 본거라고 했지만 뭔가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걸 그리려고 한 거에요.”
택운은 열심히 설명하는 재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화 물감과 커피 냄새가 나는 사토라레 남자애. 혹여라도 자살하지 못하도록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고, 그 주변인들조차도 국가의 통제를 받는, 자신이 얼마나 세상에 알려져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이 아이를 다 알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재환이 쓰는 색깔은 다채로웠다. 치악산이라고 했지만 한국적인 느낌과 함께 이국적인 느낌이 풍겼다. 하나하나 같은 초록색이 없었다. 스케치답게 거친 터치와 의도적으로 뭉개버린 부분들이 보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인 그림이었다. 오싹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어린 날의 그림. 재환의 그림은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봐요? 이상해요?”
재환은 설명을 하다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택운을 보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이쯤되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재환은 택운의 눈길에 영 익숙해지질 못했다. 택운은 의자에서 내려와서 재환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아뇨. 예뻐요. 색이 예쁘네요.”
“아… 고마워요.”
-뭐야, 난 또… 내가 예쁘다는 줄 알았잖아. 등치도 큰 게 양심도 없지. 이쁘다는 말은 듣고 싶어가지고…
재환은 지레 설레발을 친 것이 부끄러운지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 말에 택운은 웃음을 참으며 재환의 옆모습을 보았다. 남자답게 잘생긴 이목구비인데 이상할 정도로 곱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웃을 때. 수줍어하며 눈을 접을 때. 마른 얼굴에 살이 올라오며 광대가 동그래지면 사랑스러움이 함께 차오르는 것 같다. 택운은 충동적으로 재환의 턱을 잡아 자신에게 돌려서 도톰한 입술에 꾹-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어…”
-어…?
속마음과 진짜 말이 동시에 튀어나온다는 건, 당황했다는 것. 택운은 이번엔 재환의 뒷목을 감싸 안고 더 길게 입 맞췄다. 이렇게 입술이 두꺼운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푹신하게 눌리는 입술이 기분이 좋다. 계속해서 키스를 하고 싶을 만큼. 택운은 재환의 입술을 살짝 핥으며 입술 사이로 파고 들었다. 
“흡…!”
-대박! 대박..!
호들갑을 떠는 염파조차 사랑스럽다고 느낀다면 이미 게임은 끝이 난 것이 아닐까. 택운은 깊은 키스에 어디를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적거리는 재환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목에 둘러주고 재환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으음…”
-대박… 엄청 기분 좋아… 혀가 막… 너무 야해…
택운은 재환의 반응에 더욱 부응하기 위해 고개를 꺾어서 더 깊이 키스했다. 혀를 얽어서 비비고 입천장을 훑자 재환의 몸이 빳빳하게 굳으며 쭈그려 앉아서 키스하던 두 사람의 균형이 깨졌다. 
“앗!”
-넘어진다!
재환이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가려고 하자 택운은 반사적으로 재환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 하지만 재환도 180cm가 넘는 건장한 청년인지라 그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택운도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무거웠죠?”
재환을 깔아 뭉개버렸던 택운은 얼른 팔로 몸을 지탱해 일어나려고 했다. 재환이 택운의 목만 끌어안지 않았다면 말이다. 
“…안 무거웠어요.”
-이제 익숙해질 무게인 걸요…
택운은 발칙한 재환의 속마음에 얼굴을 붉히며, 7살의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자제력을 잃고 재환에게 달겨들었다. 
-읍! 으응..! 택운 씨, 너무 좋아…!
-앗, 근데 나 섰어 어떡하지?
-아 몰라… 처음은 좋은 데서 하고 싶었는데 작업실도 나쁘지 않지. 학교에서 첫 섹스! 너무 로맨틱해!
오래도록 키스를 하며 재환이 쉴 새 없이 야한 생각으로 가득한 염파를 쏟아내는 바람에 결국 핸드폰으로 카톡이 쉴 새 없이 날아오는 ‘공무원 stop’이 들어와 버렸지만, 제법 괜찮은 첫키스라고 택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바닥에 누워서 반쯤 풀린 눈으로 황홀하게 자신을 올려다  보는 재환 때문에 하체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남자와의 섹스를 딱딱하고 차가운 작업실 바닥에서 할 생각은 없으니까. 
“카톡은 뭐였어요? 급한 거에요?”
재환은 몸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택운에게 물었다. 택운은 고개를 저었다. 공무원에게서 온 카톡은 ‘우발적인 동성 간의 관계는 받는 쪽의 물리적인 피해가 무척이나 크기 때문에 사전준비를 마치고 해라’, ‘반경 20m 내로 듣는 사람이 없도록 호텔이나 펜션을 마련해줄 테니 부탁이니 첫경험하기 전에 예고를 해달라’는 내용을 길게 길게 풀어 쓴 것이었다. 
‘하긴. 나도 내 애인이 섹스할 때 느낀 걸 남한테 들려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처음에는 섹스 전에 미리 말해놔야 한다니 이 무슨 비인도적인 처사인가 싶었지만 지금 보니 꽤 합리적인 절차인 것 같다. 
“물감 묻었어요.”
“네? 어디에요? 얼굴에?”
택운은 얼굴을 마구 비비는 재환의 손을 잡아서 엄지로 손등을 문질렀다. 바닥에 굳어있던 물감이 묻은 것인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재환의 손을 잡아 올려서 혀로 핥은 뒤 문지르자 색이 흐리게 번지며 지워졌다.
“됐다. 이제 나가요. 배고프죠?”
“아… 네…”
-택운 씨… 너무 야해… 얼른 자고 싶다…
“콜록 콜록!”
택운은 깜짝 놀라 기침을 했다. 뭘 했다고 야하대? 물론 나도 자고 싶지만 너무 음란마귀가 낀 거 아냐? 택운은 재환의 손을 꽉 잡으며 키스로 퉁퉁 부은 재환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갑자기 입술을 맞은 재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요?”
“…얄미워서요.”
“네? 뭐가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택운은 손을 풀고 작업실을 나갔다. 재환은 쪼르르 택운의 뒤를 따라 나오며 쨍알쨍알 물었다.
“아 왜요~ 뭐가 얄미운데요~ 고칠게요 말해줘요. 네? 빨리요!”
“싫어요. 말 안 해.”
택운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복도를 걸으며 고개를 숙이고 픽 웃었다. 
어떻게 고칠 건데?
귀여워서 얄밉고, 발칙해서 얄밉고, 속마음까지 사랑스러워서 얄미운 건데 그걸 어떻게 고치게?
택운은 졸졸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재환 때문에 웃음이 멈추질 않아서 식당까지 가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택운은 책상 앞에 앉아 재환의 마음을 알던 날을 떠올렸다. 지금껏 자신에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다고는 자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재환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싫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도 않고. 그저 남의 마음의 파동을 그대로 받아낸 것이 처음이라 낯설고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웃는 얼굴을 보면 귀엽고 깨물어주고 싶고. 울상을 짓는 표정까지 좋아서 가끔 힘이 들어가지 않은 딱밤을 먹이기도 하는 평범한 연인의 마인드. 택운은 결국 자신에게 숨겨진 양성애적 성향이 재환을 통해 드러났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
‘휴일에 게이 야동이나 보면서 연구를 하고 있으니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사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재환은 저 멀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택운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러분! 저 남자가 바로 제 남자입니다! 제 애인이라구요! 
라고 쩌렁쩌렁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광대를 하늘 끝까지 밀어버릴 듯이 찢어지는 입을 억지로 눌러 내렸다. 그리고 살금살금 뒤쪽으로 걸어가서 택운을 놀래키려 하는 순간,
“왔어요?”
“아, 깜짝이야!”
택운이 먼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놀래키는 것은 실패! 택운은 이렇게 자신이 장난을 치려는 것을 귀신 같이 알아차리기 때문에 언제나 역공을 당하고 만다. 
재환은 투덜대면서 택운의 옆에 서서 걸었다. 그거 좀 모른 척 걸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하는 생각에 입이 튀어 나온다. 평소에 옆에서 재잘거리는 재환이 입을 다물고 뚱하게 굴자 택운이 반 걸음정도 재환에게로 가까이 붙었다. 
“…왜요?”
“향수 냄새가 좋아서.”
“아 뭐야…”
그 말에 사르르 마음이 녹는 건 내가 바보이기 때문일까? 사랑의 바보… 재환은 자신의 유치한 생각에 피식 웃으며 차도에 주차해둔 택운의 차에 올라탔다. 사실 택운은 자차를 몰기 때문에 데이트의 시작은 이것보다 훨씬 더 간단할 수 있었다. 택운이 재환의 집으로 데리러 온다던가, 재환의 가까운 정류장 주변에 차를 대고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재환이 차에 탄다던가. 그러나 재환은 부모님께 택운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도 두려웠고(물론 택운이 동성이기에 학교 선배라던가 아는 형이라고 둘러대도 되는 일이지만 재환은 언제나 부모님을 상대로 하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택운을 만나러 가는 시간 동안 설레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서 언제나 데이트의 목적지나 중간지점까지 직접 가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의외로 택운도 굉장히 로맨티스트라서. 차에서 재환을 기다리는 것보다 차에서 내려 재환이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기를 즐겼다. 재환은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것처럼 택운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왜 나와 있어요? 차에서 기다리면 되지.”
“발걸음이 귀여워서요.”
많은 말이 생략되었지만 몇 달간 택운의 화법에 익숙해진 재환은 알 수 있었다. 택운의 말은 (재환 씨가 나한테로 걸어오는) 발걸음이 귀여워서요. 라는 뜻이라는 걸. 
-껍데기는 야한데 알맹이는 로맨틱하기까지… 너무 완벽해… 
재환은 안전벨트를 매주는 택운의 가까운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술을 내밀어서 쪽! 뽀뽀했다.
“!”
“헤헤… 그냥요!”
택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재환은 이 순간이 무척 행복했다. 많은 말을 하지 않는 택운이 표정으로 자신에 대한 애정을 보여줄 때. 백 마디의 말보다 사랑스럽다고 웃어주는 입꼬리가 더욱 무거울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 넘치는 것이 모자란 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집안에서 말과 사랑을 가득가득 받으며 자란 재환으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형태의 애정이다. 
재환은 택운이 매준 안전벨트를 손에 꽉 쥐고 물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요? 연극? 뮤지컬?”
택운은 보통 재환의 의사를 물어가며 데이트 코스를 짜는 편이라 재환도 데이트날 대강 뭐 할지를 알고 나가는 편이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택운은 아무 것도 묻거나 말해주지 않았고(예를 들면 같이 등산을 갔던 날은 내일은 운동화를 신으라고 말해주었다) 그저 잘 자고 내일 보자는 말만 했다. 그래서 재환은 궁금하면서도 이 궁금함도 색다르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TPO를 염두에 두지 않은 데이트 코디를 고민하는 것도 재밌었고! 지난번엔 뮤지컬을 보러 가느라 나름 차려입었으니까 이번엔 약간 캐주얼하게 가야지. 두 번째로 좋아하는 빨간 조던에 검은 스키니를 입고 빨간 맨투맨 안에 흰 셔츠를 받쳐 입고 블랙 블루종이라는, 빨검빨검의 코디!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어린 애인의 캐주얼함을 어필하기 위해 나름대로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택운이 오늘도 무릎보다 조금 높은 정도의 엄청나게 긴 가디건을 입고 있는 것을 보자, 아무리 그래도 커플인데 택운의 스타일로 코디를 조금 맞출 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다. 
“오늘은… 바다 보러 가요.”
“네? 바다요?”
“응. 조개구이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먹으러 가요. 바다도 보고.”
재환은 택운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뭐야- 조개구이가 메인이에요? 바다가 아니라?”
역시 먹보야. 택운은 보기보다 식탐이라고 해아 할까- 먹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자신도 먹는 것을 좋아하지마는 택운이 잘생긴 얼굴을 무너트리며 와앙- 입을 크게 벌려서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왔다. 커피도 좋아하고. 커피랑 같이 쿠키 먹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데 어떻게 살이 이렇게 안 찌지? 툭하면 프로젝트 때문에 밤새면서 일해서 그런가. 재환은 운전하는 택운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신기해했다. 자신도 밤을 새거나 야작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살이 너무 잘 붙는다. 특히 엉덩이와 볼살! 물론 한창 몰입할 때는 온몸에 물감이 묻어있고 그걸 닦기조차 귀찮아서 군것질조차 하지 않고 며칠을 밤을 새가며 작업을 해대느라 그림 하나를 끝내고 나면 살이 쪽 빠져있고는 했지만 그때도 볼과 엉덩이에 붙은 총량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살이 빠지면 튼실한 종아리도 제법 가느다래지는데 왜 엉덩이만…! 
-그래도 엉덩이에 살이 있으면 뒷치기 할 때 푹신하고 좋댔어! 
“콜록콜록!”
“어? 사래 들렸어요? 물 없나 물?”
재환은 갑자기 기침을 해대는 택운에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물을 찾았지만 택운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재환을 진정시켰다. 
“뒷좌석에 담요 있으니까 좀 자요.”
“어디까지 갈 건데요? 막 부산 같은 데 갈 건 아니죠?”
-설마 우리 외박하나? 오늘 막 첫날밤이고 그런 거 아니야? 헐! 그런 거면 미리 말해주지! 준비할 거 많은데..!
재환은 자신도 모르게 잔뜩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으로 택운을 바라보았다. 택운은 그런 재환을 약간 외면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먼 데는 못가요. 그냥 강릉. 2시간 반 정도 걸리니까 조금 눈 붙이면 휴게실에서 깨워줄게요.”
“에이 그래도 애인이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요. 내가 말동무해줄게요.”
하지만 재환은 큰소리치기가 무섭게 금세 곯아떨어졌다. 택운은 신호를 기다릴 때 뒷좌석에서 담요를 가져와서 재환의 위로 덮어주었다.
“재환 씨. 일어나요. 휴게소에요.”
“씁- 네? 휴게소여? 아… 내가 언제 잤지…”
재환은 잠에서 깨어서 어눌한 발음으로 자책하며 택운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바보 멍충이! 모지리! 띨띨이! 기껏 택운 씨가 바쁜 시간 쪼개서 바다에 데려가 주는 건데 옆에서 퍼질러 자기나 하고…! 다음에 안 데려가주면 어떡하려고 그래? 택운이 보지 않게 머리를 퍽퍽 때리고는 붓기를 빼기 위해 열심히 뺨과 코, 입술 옆의 혈을 꾹꾹 눌렀다. 자고 일어나면 코와 입술이 땡땡하게 붓는 것이 콤플렉스라서 인터넷에서 혈자리 지도를 공부해가며 익혀둔 스킬이었다.
“뭐 먹을래요? 아침 안 먹었죠?”
보통 데이트로 점심, 저녁을 같이 먹기에 재환은 아침을 거르고 나왔다. 재환은 휴게소 메뉴판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휴게소 오는 게 되게 오랜만이에요.”
“그래요?”
“가족끼리는 기차를 자주 타고 가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고속도로 휴게실은 학교 수학여행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아요.”
“자주 데려와야겠네. 난 차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거든요. 답사 때문에도 자주 가고.”
“……”
재환은 쑥스러워서 바닥을 보고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첫 연애가 이럴까?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는데,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한 짝사랑만 해서 이렇게 첫 애인으로 택운처럼 큰 선물이 찾아와준 걸까? 
택운은 여러모로 재환이 상상한 남자와는 달랐다. 재환은 처음에 택운을 봤을 때 굉장히 나쁜 남자를 기대했다. 야한 얼굴과 몸으로 자신을 마구 휘두르고, 어쩔 수 없는 매력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착취한 뒤 매정하게 버려버리는! 그런 소설 속에서나 볼 법한 나쁜 남자 말이다. 하지만 택운은 재환의 기대와는 달리 굉장히 사려 깊고, 배려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젠틀하고, 쓸데없는 터치를 하지 않으면서도 이상한 타이밍에 귀엽다면서 목을 꼬집고 아프기는커녕 간지러운 딱밤을 날려대서 밤잠을 설치게 하는 남자. “아야야-” 아프지도 않은데 괜히 어리광을 부리면 웃긴다고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려서 웃으면서 뺨을 툭 건드렸다. 그 섬섬옥수가 몸에 닿을 때마다 배꼽 아래가 간지러웠다. 벅벅 긁고 싶어진다. 긴장으로 팽팽해지는 그 느낌. 아니, 긴장이 아니라 열기인가.
“우동 먹을래요? 여기 우동 맛있는데.”
“네. 그거 먹을게요.”
“그럼 앉아있어요.”
재환은 자리에 앉아서 주문을 하고 계산을 하고 물을 떠오는 택운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침대에서도 저렇게 다정할까…
움찔! 왠지 캐셔가 화들짝 놀라는 것 같았지만 재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한이라도 왔나 보지. 재환은 자신이 정전기가 유독 안 나는 편이라서 그렇지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수시로 정전기가 나곤 한다고 부모님께 들어서 타인의 흠칫거리는 행동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택운 씨도 정전기가 잘 안 나는 편인가보네. 우리는 이런 것도 천생연분인가 봐!
재환은 택운이 떠다 준 물을 꼴깍꼴깍 마시며 고작 첫 연애에 천생연분 소리까지 하는 자신을 향해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택운 씨라면… 남자 백 명과 자겠다는 내 일생일대의 꿈을 포기해도 아쉽지는 않을 것 같아. 
재환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한 뒤 세웠던 원대한 목표를 포기할 정도로 자신이 택운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놀라워했다. 어느새 이렇게까지 좋아졌지? 분명 시작은 단순히 ‘나 저 남자를 좋아하는구나’라는 작은 깨달음에서부터였는데 그 마음은 눈덩이가 불어나듯 커져서 어느새 인생의 목표까지 바꿀 정도가 되었다. 
-자각을 못해서 그렇지 택운 씨야말로 마성의 게이가 틀림없어! 애인이랑 게이바 가보는 로망은 그냥 접어야겠다. 온 게이가 다 꼬이겠네.
재환은 노말이던 택운에게 고백도 하지 않고 눈빛만으로 꼬셨다는 이유로 자신이 혹시 만화책에서만 보던 마성의 게이인 것은 아닐까 장난삼아 하던 고민을 택운을 보며 깔끔하게 접어서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재환은 혼자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느라 택운이 자신의 얼굴을 텔레비전 보듯 구경하며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다 다 왔어요. 일어나요.”
“핫! 벌써요?”
이번엔 진짜 안 자려고 했는데! 뜨끈한 우동으로 빈속을 채우고 이번엔 택운의 말상대가 되어주려고 아이스커피까지 마셨건만 오히려 가득 차버린 배가 독이 되었는지 아까보다도 꿀잠을 잤다. 재환은 울상으로 차에서 내렸다가 눈앞에 펼쳐진 새파란 바다에 으꺅! 하이톤의 비명을 내질렀다. 
“바다다!”
“네 바다에요.”
“택운 씨! 바다에요! 엄청 파래!”
재환은 택운의 소매를 붙잡고 얼른 해변으로 뛰어갔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말부터 급격하게 날씨가 추워진 탓에 해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재환은 지금 잠에서 막 깨서 몸에 뜨끈뜨끈 열이 올라 추위를 못 느끼는 것 같지만 이제 곧 춥다면서 근처 아무 가게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뭐… 귀여우니까.’
택운은 재환의 손에 이끌려 바다로 걸어가며 잠에 퉁퉁 부은 얼굴로 신이 나서 웃어대는 재환에게 함께 웃어주었다. 눈이 쌓인 마당을 처음 본 새끼 강아지 같다고나 할까. 별 거 아닌 데이트에도 이렇게 기뻐하며 웃어주니 뿌듯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은데 해외를 가자니 시간의 제약도 있지만 재환의 특성상 외교 문제도 있어서 바로 나가기 어렵다. 나름 최대한 개인 시간을 쪼개서 데이트를 하고 틈틈이 얼굴을 본다지만 그 나이대의 로망인 CC라던가, 같은 대학생 커플에 비하면 데이트도 자주 못할 텐데 재환은 아무런 불만 없이 따라와 주고 있다. 불만이 없다는 건 속마음이 다 들리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라서 반칙이지만 일부러 하는 반칙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아우 추워! 왜 갑자기 추워졌죠?”
아니나 다를까 재환은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코를 훌쩍이며 점퍼를 꼭꼭 여미기 시작했다. 택운은 벌써 차갑게 얼어버린 재환의 뺨을 자신의 목도리로 둥둥 감고 빨갛게 물든 손을 잡아다가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쑥 넣었다. 춥다고 재잘대던 재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마음이 시끄러워졌다. 날씨도 추운 해변가에는 아무도 없는데, 이렇게 훤한 대낮에 손을 잡았다고 아주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다. 자기도 좋으면서. 
택운은 꼼지락거리는 재환의 손가락을 꾹 누르며 말했다. 
“조개구이 말고 고기 구워먹을래요?”
“아 그럴까요? 근데 방금 전에 먹었는데 바로 먹기는 좀…”
“응. 바로 먹지 말고 마트에서 사가요.”
“네?”
“펜션 잡아놨어요.”
“헐.”
짧은 외마디의 말과 함께 재환의 염파가 폭발적으로 커졌다. 
-뭐? 펜션? 펜셔어언?? 외박! 외박하나봐! 대박! 나 외박한다! 엄마 나 오늘 외박해요! 아빠 나 오늘 외박해!! 형아들! 나 오늘 남친이랑 외박한다! 헐. 근데 나 오늘 아침에 화장실 못 갔는데… 약국 있나? 관장약 사야 돼!
택운은 별로 듣고 싶지 않지만 사실은 듣는 게 앞으로의 계획에도 좋은 재환의 염파를 들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재환을 차로 데려갔다. 조수석에 재환을 태우고 아까처럼 안전벨트를 매주는데도 재환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긴장했다.
-으아아 어떡해! 나 오늘 못 잘 거 같아!
‘나도 잘 거라고 생각 안 하거든 꼬마야.’
택운은 그저 재환에게 자신이 익숙해지기를 바랐다. 물론 처음과 같은 설렘도 중요하지만 어느새 만난 지 3달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재환이 자신을 좀 더 편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면 둘의 관계는 좀 더 장기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7살 연상 애인의 흑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마는…’
재환처럼 귀엽고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남자아이가 어디 흔한가. 뭐 택운은 원래 바이가 아니었으니 굳이 남자아이일 필요는 없지만 여자 중에서도 재환과 같은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택운은 자신이 사토라레면 재환처럼 깨끗한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재환이 더욱 대단해보였다. 이렇게 키워준 부모님도 대단하지만 재환이기에 이렇게 착하고 사랑스럽게 자란 것일 테다. 온실 속의 화초와는 다른 의미로, 양지에서 따스한 햇볕만을 쬐며 자란 해바라기처럼 밝은 에너지가 넘쳐난다. 택운은 재환을 만날수록 욕심이 났다. 재환이 사토라레라는 점은 재환에게 전혀 마이너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택운이 자신이 많이 부족한 사람인 것을 알게 해주는 거울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나도 재환에게 더 보여주고 백퍼센트의 진심으로 다가가야 할 텐데.’
지금껏 자존심 때문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해서 어긋나고, 봤던 것조차 모른 척 지나갔던 연애들과는 달리 재환에게는 전심전력으로 노력하게 된다. 그건 재환이 가식 없이 솔직하게 자신에게 애정을 부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택운은 미리 찾아두었던 마트에 들려서 재환과 고기와 라면, 과일, 술, 안주거리 등을 잔뜩 샀다. 재환이 핸드폰을 두고온 척 콘돔을 사러 들어간 것도 모른 척했다. 어차피 못 쓸 텐데. 라는 생각을 했지만 사실 택운도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준비해두기는 했기 때문이다. 
택운과 재환은 예약해둔 펜션에 가서 고기를 구워먹고 술을 마시고 티비를 보다가 술 냄새와 고기 냄새가 잔뜩 나는 입술로 키스했다. 매번 가글이나 양치를 한 후에 했던 청량한 키스에 비해서는 비위생적이지만, 어차피 키스란 그런 것이다. 침샘에서 분비되는 소화액, 즉 침을 나누는 행위. 아무리 깔끔을 떨어도 결국은 섞여버리고 만다. 서로의 일부가. 서로의 세포가. 
택운은 재환의 혀를 휘감으며 하나가 되고 싶다고 애원하듯이 재환의 몸을 더듬었다. 재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부르륵! 부르르륵! 매너모드의 택운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 택운은 재환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와서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잠금 화면을 풀었다.
-두 분의 100일을 기념하여 펜션 로비에 케익과 와인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재환 군의 부모님께도 외박 사실을 미리 말해두었으니 내일 오전에 천천히 출발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아닙니다.
택운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고 반쯤 풀린 눈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재환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100일인 거 알아요?”
“어? 그래요?”
그러니까 다음에 하래. 
택운은 아무 것도 모르는 재환의 앞에서 차마 짜증은 내지 못하고 그저 재환의 사랑스러움을 원망하며 로비에서 케익과 와인을 가져왔다. 재환은 기쁨의 비명을 지를까봐 손으로 입을 막는 대신 염파로 대박이라며, 택운 같은 남자는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쩌렁쩌렁 외쳤다.
택운은 재환과 함께 바람을 불어 숫자 초에 붙인 불을 끄며 재환에게 속삭였다. 
“…손만 잡고 잘게요.”
“…네.”
-꼭 안 그래도 되는데…
‘나도 그렇긴 하지만, 첫 경험이니까 좀 더 준비해서 하는 편이 좋을 거 같기는 해.
다양한 시청각자료와 후기를 찾아본 결과 첫 경험은 지옥과도 같다는 걸 알고 있는 택운은 공무원 stop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따를 만한 가치는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나중에 재환과 첫날밤을 보낸 택운은 이 날의 결정을 후회한다. 재환은 전립선을 찔러주지 않아도 내벽에 비벼지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느끼는 천생 바텀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택운과의 속궁합도 최상급! 
‘그냥 그때 무시하고 할 걸!’
아무리 후회해보아도 이미 늦은 일. 애석하게도 택운과 재환이 같이 첫날밤을 보내게 된 것은 이날로부터 제법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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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지로 냈던 글입니다~
쟈니 생일 때 올리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바빠서 이제야 올리네요!

Posted by 바비켄 :







힘을 내요,
미스터 김

김 원 식 x 이 재 환







※ 본 원고는 <한양에서 김서방 찾기>라는 소설의 속편입니다.









미친, 이건 아니야!
재환은 이불 속에서 절규했다. 낯선 천장. 낯선 이불. 낯선 풍경. 그중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뿐이다. 김원식. 자신의 첫사랑이자 첫 남자. 얼마 전, 학연을 통해 우연히 10년 만에 재회한 원식은 재회 후로 재환에게 끈질긴 구애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김원식이 나랑 이러고 있냐고!’

원식은 알몸 상태의 재환을 끌어안고 자고 있는 상태다. 물론, 그냥 알몸으로 자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진짜로 잤다. 섹스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콘돔도 안 하고 안에다 질펀하게 싸대서 지금 오랜만에 사용한 아래가 얼얼하고 질척거려서 죽을 맛이다.
재환은 자신을 꼭 안고 있는 원식의 팔에서 조심히 벗어났다. 재환의 하얀 맨몸을 끌어안은 보기 좋게 그을린 원식의 까만 팔. 재환은 다시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라앉히며 침대를 빠져나와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속옷만 들고 샤워실로 직행했다. 다리 사이에서 꾸덕거리며 흘러나오는 정액을 조용히 처리한 후 재환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최대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로.

‘부디 김원식이 꽐라가 돼서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기를!’

재환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달렸다. 원식이 기억하지 못하기를 비는데 아이러니하게 어젯밤의 일이 생생하게 리플레이되었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원나잇의 여파. 재환은 어린애처럼 손톱을 마구 깨물어대었다. 딱딱했던 엄지손톱은 재환의 앞니가 퍼붓는 속사포 공격에 항복의 깃발을 들지도 못한 채 장렬히 찢어지면서 그가 지키고 싶어 했던 붉은 핏방울을 내보이고 말았다.
“아얏!”
피가 나자 재환은 약간 제정신을 차렸다. 어이구 청년. 왜 그렇게 손톱을 깨물어. 무슨 불안한 일 있어? 택시 기사분이 내미는 휴지를 받아서 너무 손톱을 깊게 뜯어서 피가 배어 나오는 살을 꾹 눌렀다. 아프다. 어제 원식이 안으로 파고들 때도 그랬다. 재환은 눈을 감았지만, 어제의 기억은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


분명 어제는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김원식이 다양한 번호로 연락을 해오고 재환은 혹시나 주차가 잘못되었나, 주변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누가 번호를 바꿨나 하며 전화를 받아서 원식과 통화를 하게 되는. 평소와 어제가 달랐던 것은 딱 하나. 지금은 유부남이 된 예전 애인의 와이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뿐이다.

‘결혼을 했으면 당연히 임신도 하는 거지. 그게 뭐? 뭐가 어때서?’

애써 괜찮은 척하려 했지만 재환은 전 애인의 프로필 사진이 태아 초음파 사진으로 바뀌고, 상태 메시지가 ‘우리에게 찾아온 선물’이라고 바뀐 것을 보자 자신의 머릿속이 오즈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풍을 만났다는 뜻이다.

‘1년도 전에 헤어진 남잔데 말이야.’

재환은 신경질적으로 보던 핸드폰을 뒤집었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부르르륵- 부르르륵-
요란하게 진동하는 폰을 노려보던 재환은 진동이 끝날 때까지 폰을 만지지 않았다. 잠깐 끊겼다가, 다시 부르륵- 부르르륵-. 이건 누군지 뻔하다. 재환은 핸드폰을 집어 들며 잔에 있는 술을 다 비웠다. 화면을 희게 물들이며 뜨는 번호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 모르는 번호지만 화면에 뜨는 11개의 숫자 너머에 원식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또 남의 폰으로 거는 거겠지. 평소라면 고민하다 받지 않거나, 받아서 원식에게 욕을 퍼부은 뒤 바로 끊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기에 재환은 제3의 선택지를 골랐다.

-어 재환아? 오늘은 뭐해? 만나자.

매번 욕을 하고 끊어도 원식은 언제나 이런 식. 한 번도 거절당한 적 없는 사람처럼 재환에게 전화해서 재환을 잡고 뒤흔든다. 자신이 갑이라는 것처럼.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재환이 둘 사이의 관계에서 을이라는 것처럼. 재환은 갑자기 숨이 막혀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래. 만나자.”
-어?
“만나자고. 싫어?”
-아니 싫기는. 어디야? 내가 갈게.

원식은 평소와 다른 재환의 반응에 다급하게 답하며 재환이 있는 곳을 물었다. 재환은 장소를 말했다. 이태원의 게이펍으로 유명한 곳이다. 잠시 원식이 멈칫한 것도 같았지만 재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10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테니.

원식은 정말 금방 나타났다. 재환이 온더락으로 한잔을 더 비웠을 때쯤(그러니까 15분 만에) 나타나서 재환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를 밀어내고 의자를 차지했다.

“빨리 왔네.”

재환의 뺨이 붉다. 눈의 초점도 흐리고, 근처로 가니 술 냄새도 제법 난다. 돈이 있으면 모텔부터 가느라고 좋은 술을 살 돈이 없어서 깡소주만 먹던 시절에도 재환은 무척 술이 강했기에 원식은 재환이 대체 얼마나 먹은 것인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술에 취했기 때문에 내 전화를 끊지 않고 자신을 불렀나 하는 아주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다. 그런 복잡한 원식의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어려 보이는 바텐더가 재환을 대신해 그가 마신 잔 수를 알려주었다.

“많이는 안 드셨어요. 6잔쯤?”

스트레이트가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온더락으로 6잔이라니. 그것도 혼자서? 아무리 토요일이라고 해도 과하다. 원식은 “한잔 더!”를 외치는 재환을 말렸다.

“무슨 일이야 재환아. 응?”

재환은 원식을 노려보며 원식이 좋아해 마지않던 남자다운 손으로 잔을 들어,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얼음이 녹아 거의 맹물이 된 것이 불만스러웠는지 재환은 바텐더를 재촉했다.

“아아 한상혁! 빨리 한잔 더 줘!”

바텐더에게 땡깡을 피우며 술을 더 달라고 했지만, 한상혁이라고 불린 바텐더는 고개를 저었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는 걱정과 함께 제법 남자다운 단호함이 있어서 원식은 자기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일행분에게 허락 맡으세요.”
“야! 너 내가 양주 팔아주면 한 병당 인센티브 받는 거 모를 줄 알아? 얼른 내놔!”

‘저 바텐더랑 잤을까?’

하는 바보 같은 의문.

‘미쳤지. 잤더라도 내가 간섭할 권리는 없잖아.’

원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재환을 달랬다.

“양주는 집에도 많이 있으니까 일단 집에 가자.”
“뭐? 많다고?”

재환은 원식의 말에 솔깃했는지 제법 고민하는 듯했다. 눈알을 위로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귀엽다. 원식이 살짝 미소 짓는데 재환은 고개를 저었다.

“시이러! 너네 집에 안 가.”

원식은 당황했다. 재환을 집으로 데려가서 뭘 해보려는 수작은 아니었지만 약간 긍정적인 쪽으로 고민하는 줄 알았건만 술기운에도 저렇게 단호하게 싫다고 말할 줄이야.

“왜, 왜 싫은데?”

원식이 다급하게 묻자 재환은 도톰한, 아니 두툼하다는 말에 더 가까운 입술을 오리처럼 쭉 내밀며 꿍얼거렸다.

“…리야.”
“뭐?”

앞말이 들리지 않아서 귀를 더 가까이 가져가며 묻자 재환이 빽 소리 질렀다.

“나 지금 섹스하고 싶단 말이야!”

순간 약간 시끄러웠던 게이바의 안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말소리로 왁자해졌다. 원식은 재환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 섹스하고 싶다고? 그리고 대화의 앞뒤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내 집에 가기 싫은 이유가 섹스하고 싶어서라고? 그건 나랑 섹스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원식이 재환의 맥락 없는 말뜻을 해석하는 동안 재환은 자신의 핸드폰을 쥐고 이리저리 만졌다. 상혁은 원식에게 말했다.

“저기요 썸남? 구남친? 씨. 지금 이 사람 전남친들한테 연락하려는 것 같은데요.”

이 사람이라니. 원식은 바텐더가 재환을 부르는 호칭에 당황하면서도 우선 재환의 폰을 뺏었다. 재환은 원식에게서 자신의 폰을 되찾기 위해 힘없는 팔을 허부적거렸다.

“아 내놔아-!”

재환의 몸이 확 원식에게 기울었다. 원식은 높은 바체어에 앉은 재환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싶어 재빨리 재환을 몸을 받쳐 안았다. 재환의 이마가 원식의 어깨와 쇄골 가에 닿았다. 재환은 높은 코가 쇄골 뼈에 닿는 것이 불편했는지 고개를 돌리고 원식에게 칭얼거렸다. 원식은 이제 목까지 붉어졌다. 재환의 행동은 마치 원식의 품에 뺨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놔아. 나 잘 거야. 아무나 불러서 막 자 버릴 거야!”
“…못된 말만 하긴.”
“아야!”

원식은 재환의 뚱뚱한 입술을 손끝으로 튕겨서 약간 아프게 때린 후에 재환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팔로 얇은 허리를 단단하게 잡은 후에 바텐더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해줘요.”
“네. 카드 받았습니다~”

바텐더는 키도 크고 몸도 좋은데도 이상하게 팔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바텐더는 계산대로 뛰어가서 계산을 하고 원식에게 카드를 넘겨주었다. 뛰어갈 때 호이호이! 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그럼 안녕히 가세요! 손님 믿고서 보내드리는 거니까 성추행 고소 참고인으로 제가 경찰서에 불려가서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아니, 무슨 그런 심한 말을… 그런 일 없을 거에요.”

원식은 바텐더의 말에 한껏 당황하며 재환을 부축한 채로 꾸벅 인사했다. 참 이상한 바텐더라고 생각하면서도 재환의 생떼를 제법 잘 받아준 것이 괜히 신경이 쓰여서 약간 과시하듯이 재환의 허리를 안고서 바를 나갔다.
차 뒷좌석에 재환을 눕히고 원식은 자신의 멘션으로 차를 운전했다. SUV를 끌고 나오길 잘했지. 재환이 편하게 누울 수 있으니 말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재환을 부축해 집으로 올라오면서까지도 원식은 재환을 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재환이 술에 취했을 때 자신을 불러준 것이 고마웠고, 섹스하고 싶어서 아무에게나 연락하려던 타이밍에 자신이 연락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재환은 달랐다. 오늘 재환의 기분을 바닥까지 잠수시킨 전 애인이란 남자는 재환이 제법 좋아했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남자였다. 재환의 연애 중에서는 기록적일 정도로 오래 사귀었다. 1년이 좀 안 됐으니 재환은 남자와 연애하면서 ‘나도 다시 사랑이란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꾸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재환이 자신을 사랑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 결혼하려고.”

재환은 남자에게서 그 말을 듣고 순간 게이 결혼식을 떠올렸다. 유럽이나 가까운 외국에 가서, 혹은 게이들에게 축사를 해주는 신부님을 찾아가서…. 머릿속으로 여러 루트를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남자의 뉘앙스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결혼하자.’가 아닌, ‘나 결혼하려고.’라니. 그러고 보면 남자는 재환의 앞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게이 결혼에 관하여 긍정적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 나이의 애인이 있는 게이라면 애인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라도 한두 번쯤은 말을 꺼내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불로 알몸을 덮으며 재환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결혼이라고 했어?”
“어. 엄마가 선 보래. 그래서 보려고. 그리고 이번에 나오는 여자가 별로면 계속 선 볼 거야.”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소리야?”

준비 없이 빽 소리 지르는 바람에 약간 삑사리가 났다. 그게 아니더라도 방금까지 높은 신음을 내질러댔으니 목이 쉴 만도 하다. 남자는 침대 옆 협탁에서 전자 담배를 집어서 입에 물었다. 재환이 집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해서 타협한 결과물이었다. 후우- 진짜 담배와는 다른 수증기 같은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남자는 나른한 눈으로 재환에게 말했다.

“너만 괜찮으면 계속 만나자.”

하!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재환은 약간 욱신거리는 다리 사이를 참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속옷을 입었다.

“내가 왜? 와이프 앞에서 친한 친구인 척해가면서 만날 정도로 너, 매력 없어.”

일부러 못되게 말을 했다. 그러나 남자는 재환을 잡지 않았다. 재환은 눈물을 꾹 참으며 옷을 다 입고 방문을 나섰다.

“간다.”
“…어차피 너나, 나나.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그냥 적당히 타협하면서 만나도 괜찮잖아?”

남자의 말에 재환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지 않은 채로 물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후우- 다시 연기를 뱉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담배를 내려놓고 터벅터벅 재환에게 걸어왔다. 저 발소리와 다른 사람의 발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만났는데. 재환은 열린 방문 틈으로 보이는 현관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재환의 등을 안았다. 맨피부의 체온이 옷 위로 느껴진다. 하아…. 숨결이 귓가에 닿고, 남자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럼 알지. 네 첫 남자. 아직 못 잊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재환은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아직 첫사랑을 잊지 못한 걸 알아챈 남자의 기민한 촉 때문이 아니라,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꺼낸 적도 없는데 남이 알아차릴 정도로 질질 흘리고 다닌 자신 때문에. 이렇게 오래 만난 건 원식 이후로 처음이라 기대했었는데. 결국, 자신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단지 남자가 참아주었을 뿐이다. 재환은 남자보다도, 남자를 통해 보이는 자기 자신이 더욱 싫었다.

“놔!”

재환은 남자를 거칠게 뿌리치고 도망치듯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구두를 구겨 신고 급하게 집을 나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남자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참는 얼굴이, 보였던 것도 같았다.

그렇게 헤어진 사이였다. 남자는 그 뒤로 어떤 커뮤니티와 오프라인 활동도 하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제법 아는 사람이 많은 재환조차도 남자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맞선을 보는 걸 봤다는 말이 들려왔던 것도 같지만 정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만난 건 1년 뒤. 남자는 청첩장을 주러 재환을 불렀다.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잘 지냈어?”
“어. 엄청.”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하자 남자는 피식 웃고 품에서 예쁜 레이스 장식이 달린 흰 봉투를 꺼냈다. 재환은 남자가 이미 전화로 청첩장을 주겠으니 만나자고 했기 때문에 흰 봉투를 보고 놀라지는 않았다. 어떻게 평생 남자와의 섹스를 참을 것도 아니면서 결혼을 하는 것인지 재환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지만, 게이 중에서는 결혼을 하는 사람이 꽤나 많아서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물론 애인이 나 결혼할 테니까 불륜하자고 제안을 한 적은 처음이었지만.

“다음 달이야.”
“…설마설마하면서 나오긴 했는데 진심이야? 나보고 와달라고?”
“축의금은 없어도 되고.”
“차라리 축의금만 보내는 게 낫지!”

남자는 재환의 대답에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청첩장을 열어서 이리저리 쫑알대는 재환을 구경하다가 ‘나 잠시만.’이라는 말과 함께 흡연실을 다녀왔다. 남자에게선 전자 담배 특유의 인공적인 과일 향이나 향수 냄새가 아닌 진짜 담배 냄새가 났다. 재환은 인상을 찡그렸다.

“당신 다시 담배 펴?”
“어. 와이프 될 사람은 간섭 안 하거든.”

와이프. 재환은 자신이 평생 가질 리 없는 가족의 이름을 입안에서 되뇌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 되면 가고. 안 되면 못 가고.”
“그것보다.”

남자는 헤어지던 그 날과 똑같은 눈으로 재환에게 물었다.

“내가 했던 제안은 여전히 아니야? 지금이라도 난 좋은데.”

재환은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와는 만나는 동안 무척 좋았다. 좋은 남자였고, 좋은 만남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이 신경 쓰였다. 좀 더 좋게 끝날 수 있었는데. 재환은 약간 아름다운 끝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것. 추억에서조차도 남에게 좋게 기억되길 바라는 강박이. 그런 미련으로 만나자는 말에 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구질구질한 상황이라니. 유부남이 될 사람에게 섹파 제의를 받는다는, 정말 기분 더러운 상황.
재환은 말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대답했다.

“전혀.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많이 궁한가 봐? 우리가 만났던 게 언젠데 아직도 나한테 그래? 그런 애 찾으려면 클럽이라도 들리던가. 유부남만 만나는 미친년들도 많으니까.”

남자는 재환의 말에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남자도 재환과 함께 나가려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환은 먼저 박차고 나갈 타이밍을 잃고 약간 허둥댔다. 남자는 재환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재환은 남자의 시선에 약간 얼어붙었다. 자신이 헤어지자고 한 거면서. 자신이 결혼하겠다고 한 거면서, 자기가 피해자인 척하는 물기 어린 눈망울. 남자의 입술이 열리고 재환이 좋아했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시처럼 흘러나왔다.

“넌 아직도 소년 같아. 그런 너를 좋아했지만… 그래서 같이할 수 없다는 게 아쉽지.”

남자는 멍하니 선 재환을 남겨두고 카페를 나가며 마지막 말을 건넸다. 

“첫 남자와는 꼭 다시 만나게 되길 바래. 그게 너에게 좋을 거야.”

경고와 같은 말. 그 말은 아주 얇은 바늘처럼 재환의 심장을 뚫고 지나갔다. 작게, 구멍을 냈다.

그렇게 청첩장을 받고 나서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다. 아니,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재환은 운전해서 결혼식장을 가면서도, 결혼식장 주차장에 도착한 후에도 결혼식에 참석할까 말까 끝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굳게 마음을 먹고 축의금을 내고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시작한 후라서 재환은 어디 앉아야 할지 두리번거렸다. 어떤 테이블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재환은 그쪽으로 갔다. 꼬마였다. 꼬마는 이런 데서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었다.

“여기서 보네요.”
“…그러게.”

꼬마가 반갑게 인사하자 재환은 떨떠름해졌다. 꼬마는 오늘의 신랑인 남자를 짝사랑하는 티를 팍팍 내고 다니던 게이바의 죽순이였다. 그와 동시에 재환에게 엄청나게 경쟁심을 불태우곤 했었다. 실제로도 재환보다 제법 어리지만, 하는 행동이 너무 어려서 재환과 남자는 이 애를 꼬마라고 불렀다.
꼬마는 재환에게 소근거렸다.

“이쪽 사람은 우리 둘밖에 안 부른 것 같죠?”

재환은 주변을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원래 이쪽 사람들과 친분을 깊게 다지지는 않았다고 해도 부를 사람이 이것밖에 없는 건가. 전 애인과 자길 짝사랑하던 애라니, 깽판 치기 딱 좋은 타이틀을 붙이고 있는 두 사람이건만. 정말 그의 생각은 알 수가 없다.
속으로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이다 보니 모두 테이블에 착석해서 코스 요리를 먹으며 결혼식을 지켜보는 식이었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와 버섯구이를 먹고 있는데 앞에서 뭐라뭐라 진행이 되더니 “신랑 입장.”이라는 말과 함께 생음악이 흘러나왔다.
검은 턱시도를 입고 머리를 깔끔히 뒤로 넘긴 남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했다. 남자는 긴 다리를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움직여 복도를 걸어 주례 앞에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신부를 기다렸다. 재환은 그의 시선이 잠시 자신에게 닿은 것인가, 헷갈렸다.

“신부, 입장!”

결혼식의 꽃은 신부. 신부 입장은 정말 화려했다. 일단 신부 자체가 화려해서 더욱 화려해 보였다. 신부의 얼굴은 무슨 주먹만 해서 그 안에 눈코입이 들어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작았고, 그 얼굴을 채우는 이목구비는 또렷또렷해서 100미터 밖에서도 보일 것 같았다. 키는 큰 것 같았지만 워낙 날씬해서 키보다 작아 보이는 느낌이다. 가늘고 날씬한, 요정 같은 여자. 저런 여자와 결혼하면서 나랑 바람을 피자고 했단 말이지. 진짜 게이라서 슬픈 인생이다. 재환은 혀를 차며 박수 쳤다. 아까울 정도로 예쁜 여자다. 사실 남자와 딱 어울리는 여자지만, 남자는 게이니까 여자가 아깝지. 그때 옆에서 작게 코 먹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우냐?”

재환은 기겁하며 얼른 손수건을 건넸다.

“너 미쳤어? 결혼식 날 이따위로 티 낼 거야?”
“그쪽만 호들갑 안 떨면 아무도 모르거든요?”

꼬마는 적반하장으로 재환에게 큰소리치며 손수건을 채가서 코를 팽 풀었다. 재환은 질린 얼굴로 꼬마를 보다가 결혼식에 집중했다. 흔하디흔한 주례사와 반지 교환, 맹세의 키스. 재환의 생에는 영원히 결핍된 형식적으로 로맨틱한 절차들. 상상은 죄가 되지 않으니 상상이라도 해보자.

재환은 눈을 감고 자신의 결혼식을 꿈꿔보았다. 하와이? 아니면 세부? 로맨틱한 남쪽의 섬 바닷가 작은 교회에서 열리는 둘만의 결혼식. 나는 흰 턱시도, 그리고 상대는 검은 턱시도를 입어야지. 다른 건 필요 없어. 그냥 난 작지만 풍성한 부케를 들고, 상대는 내 손에 딱 맞는 반지를 들고 동시에 입장해서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맹세하는 거야. 영원히 이 사람의 남편이 되겠다는 맹세를. 그리고 마지막은 언제나 키스.

재환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헤어진 연인의 결혼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 막 부부가 된 한 쌍이 복도를 걸어나가고, 사람들은 기립하여 축복의 박수를 세차게 쳐주었다. 재환도 함께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자신의 신부가 된 여자를 에스코트하며 걷는 남자를 보며 재환은 그가 왜 결혼이란 선택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화자찬도 가지가지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의 옆에 있으며 외로웠던 게 아닐까.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결혼식을 보며 이딴 생각을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라면 정말 부끄러워질 만한 생각이다.




피로연은 보지 않고 식장을 나왔다. 꼬마는 남들 몰래 재환의 손수건에 눈물을 찍으며 훌쩍거리다가 재환을 쫓아 나와서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얘도 차 있나? 어린애가 제법이네. 생각하는데 꼬마는 주차장까지 함께 와서 재환의 차 조수석에 냉큼 몸을 실었다.

“미쳤어? 니가 내 차에 왜 타?”
“태워달라는 거 아니거든요? 그냥 할 말이 있어서 탄 거에요.”

꼬마는 눈물과 콧물이 묻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재환은 기겁했다.

“이걸 그냥 줘?”
“어쩌라고요. 어차피 우리 또 볼 사이 아니잖아요.”

재환은 그 말에 픽 웃었다.

“그럼 너 이제 바 안 다닐 거야? 왜. 너도 결혼하게?”

타격이 없는 척 굴었지만 전 애인의 결혼에 마음이 어려웠는지 약간 비꼬듯이 말해버렸다. 어린애한테 화풀이나 하고. 재환은 자신의 한심함에 질릴 지경이었다. 꼬마는 화내지 않고 그저 표독스럽게 재환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기요. 제가 그쪽 싫어한 건 그쪽도 잘 알 거에요. 결혼식도 오기 싫었어요. 울 게 뻔한데 왜 와요. 그런데 형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거거든요. 혹시 그쪽이 결혼식에 오면 혼자 뻘쭘하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같이 앉아달라고 해서.”
“…….”

재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안 올지도 모르는데 굳이 자기 짝사랑했던 애한테 결혼식에 와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재환이 아는 남자는, 쿨하고 어딘가에 집착하거나 미련을 잘 보이지 않는 성격이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충격을 받은 재환을 보고 꼬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형 애인이었다니 정말 싫어요.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으면서…!”

꼬마는 얼른 차에서 내려서 쾅! 큰 소리가 나도록 차 문을 닫고 빠르게 사라졌다. 재환은 멍하니 꼬마가 두고 간 손수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재환은 그 뒤로 원식을 찾아다녔다. 예전에도 애인과 헤어지고 나면 원식을 찾고는 했지만 이번엔 정말로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절실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더 이상 이렇게는.

남에게 상처 입히고, 상처 입은 상대를 보며 자신 또한 상처 입는 기형적인 관계의 연속. 재환이 만들어내는 관계는, 연애는 다 그런 식이었다. 제대로 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정착에 관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 피 끓는 20대가 지나고 성숙해지는 30대를 보낸 지도 몇 년. 이제는 40대, 50대를 함께 해줄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해야 한다. 재환은 흔히 문제를 방치해 온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재환은 근본적인 트라우마 치료가 필요했다. 문제의 원인이 된 트라우마를 마주 보고, 극복해야 한다. 상대를 진지하게 만날 수 없게 된 트라우마를 만든 장본인. 김원식. 그를 만나서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과거를 끄집어내서 어긋난 곳을 찾아야 했다. 아니, 어긋났다기보다는 뻥 뚫린 곳이려나?

그리고 여태껏 원식을 찾지 못했던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원식은 재환이 마음을 먹자마자 재환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


“헉…, 허억…! 제법… 무겁네…!”

원식은 재환을 들어서 소파에 눕히고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키도 체격도 자신과 비슷한 데다 술까지 마셔서 오랜만에 제대로 힘을 쓴 기분이다.
재환은 처음 원식을 봤을 때만 해도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멀쩡하더니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점점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차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당장 원나잇을 하러 가겠다며 뛰쳐나가려고 하는 등, 원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집으로 옮길 때는 잠으로 인해 혼수상태가 되었지만. 온몸에 힘이 없어서 옮길 때는 무거웠지만 그래도 옮기는 내내 시끄럽게 구는 것보다야 나았다.
재환의 신발을 벗겨서 현관에 두고 오자 이제 좀 난감해졌다.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같이 술이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바에서 눈이 풀린 재환을 본 순간 그냥 얌전히 집에 데려가서 재우기만 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다. 이대로 재우기는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벨트라도… 풀어줘야 하는 게 맞는 거겠지?"

꿀꺽.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킨 원식은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침을 삼키다니 절대 흑심이 아니라 잘 때 편하게 해주려고 그럼 거야. 원식은 자기세뇌를 하듯 중얼거리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재환의 벨트를 풀었다. 철컥, 버클을 풀고 벨트를 쑤우욱 뽑아내었다. 배를 조이던 벨트가 사라지니 재환은 한결 편한 표정을 지었다. 벨트를 풀었으니… 이재환의 성향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면 안에 흰 티 한 장은 입고 있겠지. 원식은 재환의 린넨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씩 풀었다. 역시나 재환은 셔츠 안에 티를 입고 있었다.

 “…….”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감정을 흘려버리고 나서 원식은 재환의 불편해 보이는 스키니를 벗겨내었다. 바지가 통통한 허벅지를 쫀쫀하게 감싸고 있어서 바지의 윗부분을 잡고 포장지를 벗겨내듯이 거꾸로 바지를 뒤집는 편이 빨랐다. 바지를 벗기자 잿빛 드로즈를 입은 흰 하체가 드러났다. 재환은 종아리에는 털이 좀 있지만 허벅지는 맨들맨들한 체질이다. 원식은 얼른 재환의 하체에서 눈을 떼고 재환을 다시 일으켜서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아까와는 달리 몸에 맨살이 닿는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털썩! 재환을 침대에 눕히자 “우웅-”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얄미워.”

원식은 긴 손가락으로 재환의 이마를 톡 쳤다. 계속 전화 무시하면서 애를 태우더니 갑자기 변덕스럽게 불러내서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뭐? 섹스하고 싶으니까 나는 싫다고? 원식은 손가락으로 재환의 피노키오처럼 높고 큰 코를 잡아서 좌우로 살살 흔들며 물었다.

“나는 왜 싫은데?”

물론 원식도 지금 당장 재환과 하고 싶은 것은 섹스가 아니긴 하다. 원식이 재환과 하고 싶은 것은 섹스를 포함한 어떤 것이니까. 그랬지만 재환의 말에 입이 쓴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뭐. 진짜로 거절할 때까지는 포기 안 할 거니까.”

자기가 뭘 했다고 땀을 흘리는 것인지. 원식은 재환을 위해 에어컨을 틀고 재환의 젖은 앞머리를 살살 흐트러트리다가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나왔다.
고집과 끈기. 원식이 남들에 비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성공할 수 있던 것은 이 두 가지 덕분이었다. 물론 재능도 있다. 그러나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재능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원식이 살아가는 세계다. 끊임없이 새로운 천재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세계. 자신보다 훨씬 어린 천재들이 혜성처럼 등장해서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 그런 세계. 영 앤 리치. 젊다는 것 하나가 수많은 돈에 버금가는 가치를 가진 세계에서 원식은 이미 자리를 잡아 성숙해가는 중이었다. 성공하는 법 같은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럼 작업을 마저 해볼까-”

샤워를 하고 편한 옷을 입은 원식은 작업실로 들어갔다. 영 풀리지 않던 의뢰가 있었는데 재환을 만나니 실마리가 보였다. 재환은 원식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식장까지 잡았던 여자의 통화 목록에서 그녀의 전남친과 1시간 넘게 통화한 이력을 봤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짜증과 미묘함,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하찮아지는 기분을 재환은 아주 손쉽게 느끼게 해준다. 그런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창작을 통해 해소할 수 있게 된 것은 원식이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였지만 그렇다고 재환과의 관계 개선이 된 것은 아니기에 원식은 작업을 끝내고도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재환이 필요하면 시간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만, 그 사이에 누군가가 재환을 채갈까 봐 두렵다.
작업실 한켠에 놓아둔 라꾸라꾸에 누워서 원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나라는 확신만 있다면 몇 년이고 기다릴 수 있는데.”

모두들 그 확신이 없기 때문에 싸우고 열을 내는 거겠지. 이 사람이 정말 내 운명인지 알지 못해서. 원식은 수면 유도제를 먹으려다 참고 억지로 눈을 붙였다. 그래도 문 너머에 재환이 자고 있다는 건 무척이나 감격스러워서, 평소보다는 잠이 빨리 찾아와 주었다.



“읏… 음….”

뜨겁고 간지럽다. 원식은 끙끙대며 손으로 간지러운 곳을 긁으려 했다. 
턱- 손이 자신의 몸이 아닌 다른 것에 가로막혔다. 뭐지? 손으로 헤집으니 털이다. 그것도 머리카락. 상황판단을 하지 못 하는 사이에 간지러움은 더 심해졌다. 귀두를 간질이고 성기에 와 닿던 축축한 숨결이 그 모양을 달리했다. 뜨겁고 습한 곳이 성기를 삼킨 것이다.

“흣…!?”

원식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상체를 들어 올려 자신의 하체를 확인했다. 희미한 새벽녘은 물체를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주었고, 원식은 자신의 성기를 물고 빠는 사람이 재환이라는 것에 경악했다.

“재환아?!”

원식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경악하자 재환은 살짝 고개를 들어 원식을 노려보았다. 니가 감히 내게 반말을 하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원식은 재환의 눈의 초점이 아직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것을 포착했다. 그러니까, 아직도 술에 취한 상태라는 뜻이다.

“잠까- 읏!”

자신을 말리려던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재환은 원식의 성기를 더욱 깊게 물었다. 좁은 입안이 아찔하게 조여왔다. 게다가 깊이 물면서 혀로 쓸어내리는 스킬이라니. 혀끝으로 기둥을 긁어주며 내려오자 원식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혀의 뿌리 쪽까지 써서 귀두를 자극하는 데다가 손으로 기둥 밑둥을 쥐고 살살 문지르면서 손바닥으로 고환을 굴리는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원식은 잠결과 흥분상태로 인해 제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뱉었다.

“잠깐, 너-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를… 읏!”

머리를 더 숙여서 목구멍 깊은 곳으로 성기를 받아들이면서 피스톤질을 시작하자 원식은 허리를 움찔거리며 헐떡였다. 웅- 우웅! 웁…! 재환은 고개를 움직이면서 안으로 먹는 신음을 냈다. 높은 코가 새카만 음모 사이로 묻힌다. 원식은 한 손으로 재환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뒷목을 끈적하게 주물렀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지만, 절대 밀어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흐으… 재환아, 음, 그래. 잘, 하네….”

츕- 츄읍- 재환은 일부러인지 젖은 소리를 잔뜩 내면서 원식의 것을 빨아댔다. 나중엔 입에서 빼내서 쿠퍼액과 침으로 번들거리는 성기를 두 손으로 쥐고 흔들면서 통통한 입술을 쭉 내밀어서 요도를 입술에 마구 비벼댔다. 원식은 사춘기 어린애처럼 헐떡이며 재환의 얼굴에 그대로 사정했다.

“으읏…!”
“아….”

진한 정액을 얼굴로 받으면서 재환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재환은 임무를 완수한 요원처럼 원식의 배에 엎드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기껏 데려왔으면서 먹지도 않고… 뭐야. 나 간 봐?”
“그게 아니라-”

고작 섹스를 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던 원식은 자신의 배에 얼굴을 대고서 정액이 잔뜩 튄 얼굴로 웃는 재환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재환과의 섹스를 고작 섹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차례 열기가 빠져나갔던 아래에 다시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원식은 몸을 일으켜 재환을 안아 들고 작업실을 나와서 방으로 갔다. 제정신이었다면 한창때에서 늘어난 몸무게를 생각해서 기겁을 하며 내려놓으라고 소리쳤을 재환은 술에서 아직 깨지 않은 덕분에 미소년 애첩이라도 된 기분을 즐기며 원식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원식은 편안한 숙면을 위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가로세로3m의 침대에 재환을 내려놓고 시간차 없이 재환의 위로 올라탔다. 입고 있던 티를 벗고 재환의 것도 벗겼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재환의 피부에 닿아 뭉그러져서 피부가 손톱달처럼 희게 빛난다. 원식은 아래가 저릴 정도로 흥분했다.

“뭐라고 하든 이제 못 놔줘.”

원래도 낮은 목소리가 정말 짐승의 것처럼 낮게 울렸지만 재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술에 취하니 평소에도 그다지 세게 잠그고 다니지 않았던 이성의 나사가 모조리 다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럴 힘은 있으시고?”

20대 때보다 더 정교하게 가꾼 몸을 자랑하는 원식을 도발하는 말이다. 물론 몸과 마음, 그 모두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침대 위에서 말하는 힘은 대개 정력을 뜻하니 원식은 자신의 검붉은 성기를 자랑하듯 재환의 허벅지에 비볐다. 재환이 움찔하며 아까까지 자신이 입에 물고 있던 성기를 내려보았다. 입에 담은 게 용한 크기다.

“내일 못 일어나겠다고 울지나 마.”

재환은 기대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


“아아악-! 내가 미쳤지! 이재환, 너 왜 사냐!”

집으로 돌아온 재환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했다. 김원식이 아니라 자신이 덮친 거였다. 취객에게 자신의 침실을 내어주고 작업실 라꾸라꾸에서 잠을 자는 사람을 덮친 파렴치한은 바로 재환, 본인이다. 그것도 다짜고짜 오랄로 물을 빼줘서 빼도 박도 못하게 했지.

“미쳤어! 미쳤다고! 섹스가 그렇게 고팠냐? 어?”

스스로에게 열불이 난 재환은 얼음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앞에 섰다가 파도처럼 다시 밀려오는 죄책감에 냉장고에 이마를 쾅쾅 찧었다. 제법 세게 박았는지 머리통이 찡하게 울렸다. 아니, 이건 숙취 때문인지도 몰랐다.

“…윽!”

골이 울리던 것이 척추를 타고 내려와 골반까지 울렸다. 이건, 섹스 때문이 맞다.


***


“사장님!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이렇게 늦게 나오시기에요?”

재환은 쫑알거리며 잔소리를 하는 매니저에게 대강 사과하며 멍하니 앞치마를 입었다. 이럴 때는 몸이라도 움직여줘야지. 산처럼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를 차근차근 닦으며 생각 없이 손을 놀렸다. 설거지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바닥에 라떼 잔여물이 굳은 머그컵들을 리필해준 매니저가 아차, 하며 말했다.

“맞다. 저기에 사장님 친구분 오셨어요. 한 번도 못 뵌 분이던데. 뭐하시는 분이세요? 같은 카페 사장님? 카페보다는 뭔가 바 사장님일 것 같은 느낌이지만.”

매니저의 말에 재환은 번개처럼 빠르게 고개를 들어 매니저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역시나! 그 친구분이라는 사람은 원식이었다. 나이 서른에 저렇게 모든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톤다운 은발을 마치 제가 타고난 것처럼 소화하는 남자는 김원식 밖에 없지 않을까. 심플하게 검은 티에 진청 진을 입은 모습이었지만 팔에 찬 팔찌들과 목걸이들은, 아니 그런 악세사리들을 제외하고도 옷걸이 자체가 보통 남자들과는 다르다.
예전에도 같이 있으면 시선을 사로잡는 놈이었는데, 지금은 더욱 심해졌다. 재환은 자신도 나이치고는 굉장히 동안이고 옷도 잘 입고 다닌다고 생각했지만 타고난 옷걸이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키도 비슷하고 얼굴 크기도, 심지어 어깨너비도 대강 비슷한데도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지만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일단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재환은 그대로 등을 돌려 직원 사무실로 도망가려고 하다가 원식이 일어서서 카운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형. 원래 이렇게 늦게 출근해? 끝나는 건 언제야?”
“어어, 그게….”
“사장님은 어차피 마감 안 하시거든요. 일요일엔 보통 8시쯤 가세요.”
“야! 넌 누구 편이야!”

냉큼 원식에게 자신의 퇴근 시간을 말해주는 매니저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재환은 매니저가 “네? 사장님 친구분이랑 싸우셨어요?” 하며 8살 먹은 어린애 보듯 하는 시선에 얼굴을 붉혀야 했다. 원식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으며 말했다.

“8시 퇴근이라는 사람이 3시에 출근하고 양심 없네. 이왕 양심 없는 김에 오늘은 좀만 더 양심 없자. 미안해요 매니저님. 형은 오늘 내가 납치할게요.”
“네?”
“미안해요.”

매니저에게 윙크를 날린 원식은 카운터의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들어와서 재환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재환은 자신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매니저와 다른 알바생들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원식의 긴 다리 길이 앞에선 모두 헛수고였다.
원식은 카페 옆 샛길에 대놓은 차에 재환을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채웠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말했잖아. 납치라고.”
“너 진짜…!”

아무리 내가 사장이라지만 거긴 내 직장이야! 이런 식으로 마무리도 안 하고 나오면 안 되는 거야! 라고 외치려던 재환은 원식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덮치길 했어, 뭘 했어? 그냥 잠깐 조용한 데 가서 얘기나 하자는 거야.”
“…….”

어젯밤 원식을 덮쳤던 재환으로서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재환은 원식이 운전하는 동안 안전벨트 아래로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서 원식의 아우디 컨버터블 조수석에 가만히 앉아서 손을 꼼질거렸다.
저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원식은 벌 받는 어린애처럼 시무룩해진 재환을 보며 웃음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


***


도착한 곳은 교외의 조용한 레스토랑이었다. 차들이 다니는 도로에 덩그러니 지어진 레스토랑은 건물 외부나 실내 인테리어나 잡지에 나올 만큼 예뻤지만 위치 때문인지 사람이 붐비는 곳은 아니었다. 원식은 칸막이가 아무도 없는 2층으로 올라가서 메뉴를 시켰다.

“형한텐 이게 맞을 거야.”

재환의 메뉴도 알아서 시켰다. 재환은 착하게 끄덕이고서 원식의 눈치를 보았다.

‘김원식은 아무렇지 않은 건가?’

난 이렇게 어색하고 이상한데. …약간의 죄책감도 있는데.
재환의 두꺼운 아랫입술이 점점 더 앞으로 전진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젯밤의 정사는 절대 강간이 아니다. 상호 합의가 맞다. 게다가 미성년자와 잔 게 아니니 어떠한 불법을 저지른 일이 없다. 그렇지만 재환은 마음이 불편했다. 신호위반이나 자잘한 범법행위를 저질렀을 때보다 더. 
지금껏 냉정하게 거절하고 있던 전 애인에게 취객 뒤치다꺼리를 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는 중에 덮쳐서 자 버렸기 때문에.

이제, 몸만 남는 관계가 될까 봐.

차라리 다시 만나지 말 걸, 후회하게 될까 봐.

한 사람과 오래 사귀지 못했다뿐이지 재환은 제법 여러 사람과 만나보았다. 그리고 재환의 주변 사람들도 연애를 많이 하곤 했다. 이미 한 번 헤어진 뒤 재결합한 연인 사이의 결말은 처음과 똑같았다. 똑같은 문제로 헤어졌다. 다만 첫 번째 헤어짐이 격렬한 태풍이었다면 두 번째 헤어짐은 그저 개인과 개인의 완벽한 분리分離. 서로에게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등 돌림일 뿐이었다. 두 번째로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재환은 차라리 다시 만나지 말 걸 그랬다는 그들의 말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두 번 헤어지지 않으려면 두 번 만나지 않으면 된다. 생각해보면 남자와도 헤어진 후에 만났기 때문에 괜히 기분만 더 이상해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침대 위에서 일어났을 때, 맨몸으로 자신을 꽉 안고 있는 원식을 봤을 때. 기분이 묘하고 싫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리운 느낌까지 받았지만, 두려움과 후회가 앞섰다.
재환은 원식과 10년 만에 재회했을 때 자신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야. 난 그냥… 한 번쯤 만나고 싶었던 거야. 이렇게, 고작 10년 전 일로 울려고 온 게 아니라고!-

맞다. 재환은 원식으로 인해 다시 울고 싶지 않았다. 그저, 원식을 똑바로 마주 보고, 그때 남았던 앙금과 회포를 풀어서 트라우마를 없애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재환은 원식을 똑바로 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두려워서. 다시 반하게 되는 게, 두려워서.


애피타이저가 나오고 재환은 기계적으로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입에 가져가서 오물오물 씹었다. 원식은 픽 웃었다.

“그렇게 계속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굴 거야? 안 잡아먹으니까 편하게 먹어.”
“알겠어….”

대답은 했지만 생각은 다른 나라에 가 있었다. 원식은 예상했다는 듯 재환이 시무룩하거나 말거나 마이웨이로 코스로 나오는 음식들을 깨끗이 비웠다. 재환은 대강 포크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난도질하며 괴롭히고는 다 먹었다고 말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살 빠지겠네.’

딴생각은 잘만 하면서 문제를 직시하기는 어렵다. 재환은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를 사약처럼 받아들었다. 이제 이야기의 시간이다.



달칵. 원식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형 너 지금 내가 한 말들 하나도 안 들었지?”
“어? 어어?”

재환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원식을 보았다. 원식은 손가락으로 재환의 코끝을 튕기며 개구지게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내 할 말은 별거 아냐.”

손바닥을 쫙 펴서 재환에게 뻗는다. 뭐 어쩌라고. 잡아달라고? 재환이 이상한 표정을 짓자 원식은 냉큼 대답했다.

“딱 다섯 번.”
“뭐가 다섯 번인데?”
“어제 우리가 잔 거.”
“풉-!”

재환은 마시던 커피를 그대로 뿜어버렸다.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원식이 건네는 휴지로 입을 막고 나머지 기침을 쏟아냈다. 원식은 실실 웃으면서 재환의 옆으로 와서 재환의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가, 갑자기… 콜록!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원식은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재환의 의자 옆에 무릎을 접어 앉았다. 원식은 10대 소년이 여자친구의 운동화 끈을 매주는 다정함과 같은 다정함으로, 치기 어린 시절의 사랑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재환의 손에 묻은 커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딱 다섯 번만 나랑 데이트해.”
“…….”

재환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 원식의 손에 잡혀 있지 않은 손이 입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원식에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딱 다섯 번? 왜? 다섯 번 잤으니까?
반사적으로 물었다.

“데이트하고 난 다음엔?”

원식은 재환의 물음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가 부드럽게 휘며 대답했다.

“그 다음엔 다른 구실을 또 만들어야지.”

커피 냄새가 나는 손가락에 입 맞춘다.

“다섯 번 만에 넘어와 주면 좋겠지만, 10년 공백 기간을 데이트 다섯 번으로 퉁치라니. 그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도둑놈 심보니까.”

원식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재환의 시선을 만끽하다가 이러다간 이번엔 자신이 먼저 재환을 덮쳐버릴지도 몰라서 무릎을 펴고 일어나서 자신의 의자로 돌아갔다.

“장소도 시간도 다 내가 정할 거야. 그래도 되지?”
“어? 어어.”

재환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려 애쓰며 끄덕였다. 원식은 그윽한 눈으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약간 상기된 뺨이 사랑스럽다. 마치, 스무 살 무렵의 그때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높고 높은 산을 오르던, 그 시절처럼.




저 멀리 그림자조차 아득하게만 보이던 재환이 이제는 시야에 들어왔다. 재환까지 난 길이 직선인지, 곡선인지, 중간에 장애물이 등장할지는 몰랐으나, 원식은 그저 웃음이 났다.

형을 목표물로 생각하는 게 아니야. 형의 손을 잡은 뒤에 함께 갈 그 길이, 나는 기대가 돼.

원식은 황홀했던 어젯밤을 억지로 저 멀리까지 밀어내며 재환의 마음에 닿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물론, 마음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섹스라면 얼마든지 이용할 거지만.

기대해 이재환. 나 진짜 너랑 꼭 다시 만날 거니까.




그러나 원식은 몰랐다. 앞으로 재환에게 다다를 길에 등장하는 장애물들이, 인간 장애물일 거라는 것을. 재환이 원식을 잃고 방황하던 시간 동안 그를 위로해주었던 애인들이 원식과 재환의 생각보다 재환을 많이 좋아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힘을 내요, 미스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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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내요,
미스터 김
김 원 식 x 이 재 환
노력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Posted by 바비켄 :

[Vch 홍켄] 이야기 두개

2021. 4. 28. 01:30 from text


【Vch 홍켄】초등학교 3학년 우리 아들은 아마 전생이 이탈리아 사람같은 정열의 나라 쪽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애정 표현이 직접적.

406: 엄마쨩 2015/11/09(月)12:30:41 ID:E1p
초등학교 3학년 우리 아들은 아마 전생이 스페인 사람이나
이탈리아 사람같은 정열의 나라 쪽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애정 표현이 직접적.



이하 아들 어록↓
・옆에서 자고 있는 3세의 여동생의 잠자는 얼굴을 보면서
 「정말로 천사구나. 여기는 천국일까?」
・악세사리를 착용하는 나에게
 「엄마는 꾸밀수록 예쁘지만,(아니아니, 사실 나보다 남편의 외모가 더 뛰어나다...)
  역시 제일 멋진 것은 우리를 안기 위해 반지를 모두 뺀 것이 좋아요.」
・학교에서 돌아와서
 「엄마를 만날 수 없어서 외로웠어요—.
  나 엄마를 너무 좋아해서 ,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마음이 아파요—.」
 (틈틈이 볼에 쪽쪽 한다.)
・일에서 돌아온 아빠에게
 「아빠는, 아침에 일어 났을 때부터 돌아왔을 때까지 계속 멋있어요.
  아빠 사랑해요.」(여기서 또 쪽. )

등 등, 도대체 어디서 그런 대사 배웠어…!?
하는걸 부끄러움 없이 거침없이 말한다.
최근 알았지만 학교 친구에게도 상기한 것처럼 달콤한 대사를 말하는 것 같아서,
「부모님이 러브러브구나 우후후」하고 친구 아줌마들에게 듣고 스레타이틀(지금까지 있었던 수라장을 말해라).
말하지 않았어.
나도 남편도 저런거 말한 거 없다고.
가정에서 저런 대사를 배운거 아니라고!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근데 남편이 가끔 잠자리에서 나를 끌어안고 
「몇 년 간 구애해서 결혼하길 정말 잘했어. 매일이 천국같아.」
라고 말하는 걸 보면 남편쪽 유전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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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h 홍켄】음악 써클에서 청순한 후배가 스토커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해서, 맨션 앞까지 바래다줬는데 부엌칼을 든 남자가 습격해왔다.


406: 선배쨩 2015/11/23(月)06:05:38 ID:O2r

오래 년전의 이야기지만, 주 1-2회 활동하는 대학교 음악 써클에 들어갔다.

연습 뒤, 회식에 갔을 때, 써클 후배 한효주(청순의 대명사인 여배우)를 닮은 남자 아이(이후, 후배라고 해둔다)로부터 상담을 받았다.
후배는
「최근, 스토커 피해를 당하고 있어요」
라고 말했다.

후배가 살고 있는 맨션과 나의 아파트는, 역의 1쪽 출구・6쪽 출구같은 관계.
돌아가게 되지만 바래다주는 정도라면 문제 없고, 후배는 예쁘고 청순하니까 헤롱거리는 나.
덧붙여서 나는 외모 뿐이라면 코도 크고 남자답지만, 속은 노래 부르기가 취미인 겁쟁이ㅋ

회식 마치고,23:45분 정도였나.
후배를 바래다주고, 맨션 현관 앞에서 가볍게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떠밀렸다!?
후배 「꺅ー!」
나 「호에에?」
하고 황급히 일어서려고 하니까, 가죽 가방이 크게 베어져서 구멍.
보니까 양복 차림의 남자가, 부엌칼을 한 손에 쥐고 후배의 팔을 잡고 있다.

나는 후배를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함치면서 양복 남자의 허리에 태클!
양복 남자는 3미터 정도 날아가서,
쿠ー당!
하며 굉장한 소리로 넘어졌다.

가 나의 시나리오였지만....
나는 약했고 청순하고 귀여운 후배는 강했다.



406: 선배쨩 2015/11/23(月)06:06:23 ID:O2r

후배 「선배! 손바닥!」
나 「어라라? 바닥에 긁혔나?」

후배의 말에 손바닥을 보자 바닥에 긁혔는지 피가 난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생채기가.
하지만 후배에게는 그 생채기가 도화선이 되었는지 희번뜩! 소리가 들릴 정도로 눈빛이 변했다.

후배 「감히 선배를 다치게 하다니! 건방진 자식!」

후배는 양복 남자에게 잡힌 팔을 그대로 휘돌려 잡아서 매치기!!!
양복 남자는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공중에 부우우웅 떠버린 후에 바닥에 추락...
후배는 정말 화가 났는지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발로 쓰러진 양복남자를 뻥뻥 찼다.

후배 「감히 선배를! 스토킹하는 것도 봐줬건만! 쓰레기 자식!」

음..? 이봐 지금 스토킹하는 것도 봐줬다고 했어?
일단 가서 후배를 말렸다. 

나 「이봐... 진정하라고... 이 정도면 과잉방어야...」

후배를 진정시키고 양복 남자쪽을 확인했다. 

나 「이봐요... 괜찮습니까?」

그리고, 남자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1-2분 정도 지켜보고 나서, 조심조심 맥을 잡아보니까, 심장은 움직이고 있지만, 의식 없음.
(죽으면 위험해)
해서, 후배는 112번, 나는 119번 했다.
한국 경찰은 우수, 통보하고 6분에 경찰차 1대, 10분에 1대 추가+구급차 도착.

자, 거기서부터가 수라장이었어.
양복 남자는 의식불명으로 구급차로 옮겨져, 후배와 나는 다른 경찰차로 경찰서에 데가서 따로따로 사정청취.
(나는 부엌칼을 가지고 있던 놈으로부터 도왔을 뿐이니까 바로 끝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경관이 몇번이나 몇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해서 묻는다.
특히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의 스포츠 경험을 몇번이나 묻는다.

「좋은 체격이네요, 무슨 스포츠 했지요? 격투기?」
「아니, 중학교는 합창부, 고등학교는 밴드부, 대학에서는 밴드부입니다」
「뭔가, 조금 한 적 있지 않나요? 유도라든지 레슬링이라든지」
「아니, 저, 킥복싱을 조금...」
「조금이라니 얼마나? 도장에 문의해도 괜찮지요?」
「예에, 네, 그러세요」

아니, 내가 체격이 좋지만 그건 후배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나는 양복 남자를 공격한 적도 없는걸!
억울했지만 내가 봐도 후배의 얼굴을 보면 너무 청순해서 양복남자를 때려눕힌 당사자로는 생각되지가 않는다...



406: 선배쨩 2015/11/23(月)06:08:06 ID:O2r

결말은 간단했다.
사건에서 36시간 뒤에 양복남의 의식이 회복.
다만, 나를 베려고 한 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과통원력이 있었다든가 해서, 나는 대리인 변호사에게 설명을 받은 다음 가방값과 휴업 보상 그 외로 500만원.
하는 김에
「감형탄원을……」
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보류, 하지만 보류하고 있는 동안에 불기소처분.

여기서 나 자신의 수라장은 끝났지만, 후배가 문제였다.
일이 끝나고 난 뒤 후배가 갑자기 나를 불러냈다.

후배 「선배와 잘 되고 싶어서 혼자 해결할 수 있는데 도움을 청해버렸다. 죄송합니다.」
나 「에에? 후배도 나도 남자잖아?」
후배 「남자지만 선배가 좋다. 전부터 귀엽다고 생각했다.」

뜻밖의 고백에(그러고보니 양복 남자한테 한 말이 심상치 않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당황하고 있었는데 후배가 내 손을 잡더니 바닥에 긁힌 생채기를 확인했다. 

후배 「큰 상처가 아니라 정말 잘됐다.」
나 「......★」

진심으로 안도하는 얼굴이 너무너무 청순해서 그만.... 

그 뒤로 후배는 「그 자식을 더 차줬어야 하는데 선배가 너무 착해서 얼마 못찼다」, 「다시 한번 보면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반병신을 만들어 줄거다.」 는 말을 해서 나를 떨게 했지만
사귀는 내내 상냥하고 청순하다. 

역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천운이 따른다고나 할까. 
후배의 일을 도와주길 잘 했다는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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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업뎃이 너무 없어서 니챤 번역글 두개를 홍켄으로....
첫번째 이야기는
홍켄 부부+홍켄의 아들 홍재의 이야기 같은 느낌입니다ㅋㅋㅋ

Posted by 바비켄 :



주거래 화랑에서 소장전이 열렸다. 그림 값이 제법 뛴 덕분에 화랑은 일부러 묵혀두었던 그림들을 꺼내기로 한 것이다. 호당 40만원을 호가하는 재환은 이제 스타 화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급이 되었기에 초기작들은 더욱 높은 값에 팔리겠지. 화랑은 처음부터 재환이 비싸질 줄 알고 있었다. 그 정도 안목은 있어야 이 불경기에도 땅값 비싼 종로에서 건물 하나를 온전히 굴리는 화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화랑주의 요청으로 재환은 전시 첫날 외에도 갤러리에 와서 화랑의 vip 고객들과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다고 너무 수다스럽게 굴면 아웃이다. 그림을 사가는 사람들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감은 지켜주어야 한다. 

사실 재환이 천재라던가 독보적인 감각을 타고 났다던가 하는 화가는 아니다. 이쪽에서 오래 굴러먹은 여느 화가가 그렇듯 재환은 성실했고 탐구적이었고 뚝심이 있었다. 고민하되 갈팡질팡하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끈기 있게 그릴 줄 알아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야만 사람들도 그의 그림이 단순한 주절거림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인정해주었다. 

약간의 감각과 성실함. 그리고 차세대 스타 작가를 원하는 고객들의 수요와 기업들의 후원, 자국 화가들을 육성하려는 정부의 지원. 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결과 재환은 지금의 위치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화랑은 재환을 아주 예쁘게 다뤘다. 재환이 삐딱선만 타지 않는다면 10년 내로 호당 100만원이 넘는 대가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어떤 변수가 발생하고 또 어떤 스타 작가가 탄생할지는 모르는 이야기지만, 재환은 괴팍한 사람이 많기로 소문난 이 업계에서 천사로 통할 정도로 모난 데가 없으니 그다지 큰 몰락은 없을 것이다. 결국 그림 업계도 사람 사이의 관계. 같은 급의 화가라면 자기한테 잘 해준 사람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은 당연하니까.


“작가님, 잠깐 와주시겠어요?”
“네. 실례할게요.”


큐레이터가 컬렉터에게 설명을 하던 재환을 불러냈다. 재환은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재환이 너무 설명을 오래 할 때쯤이면 적당히 끊어주는 타이밍을 맞춰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화가는 세일즈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가 이렇게 이렇게 생각을 열심히 하고 저렇게 저렇게 열심히 구상해서 쨘! 이런 멋진 그림을 만들었답니다. 사실 거죠?’


“고마워요. 마침 말이 너무 길어져서 위험하다 싶은 때였는데.”
“아, 그런 게 아니고 사무실로 오시라는데요?”
“그래요? 무슨 일이지.”


재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나이 지긋한 화랑주는 2세대 화랑주로, 재환을 손자 다루듯 해서 재환은 그가 편하면서도 불편했다. 거절 할 수 없는 부탁을 하기에. 


“여기, 이 그림 제가 가져갈게요.”


그리고 재환이 뒷모습을 남기고 사라지자 컬렉터는 재환의 그림을 구매했다. 


“네, 표시해두겠습니다.”


그림의 제목 옆에 빨간 동그라미가 붙었다. 



***



“개인적으로 그림을 의뢰하시겠다는 분이 있어요. 내가 이미 하겠다고 해버렸는데. 괜찮지?”
“아, 아저씨... 이럴 거면 차라리 화랑 간판 떼고 에이전시 회사를 세워요.”
“하하!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하아. 재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이미 하겠다고 말한 이상 번복하는 건 재환도 싫다. 그런 재환의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무작정 의뢰를 오케이하고 본 것이겠지만 작가로 시작할 때부터 신세를 많이 져서 차마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재환은 소파에 몸을 깊게 묻으며 물었다. 


“뭘 그려달라는데요?”
“자기를 그려 달래.”
“...내 그림 아는 사람이에요? 얼굴 제대로 안 나올 텐데?”
“이미 그림도 한 점 있다고 하고, 그냥 니가 자기를 그려줬으면 좋겠다더라고.”
“뭐야. 돈 많은 팬인가?”
“그러면 다음부턴 그림값을 좀 더 올려볼까~”
“아, 지금도 너무 높아요.”
“그런 말마라. 이것도 싸다고 사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내가 허투루 값을 매기겠니? 섭섭하다.”


재환은 찔끔해서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십 년을 업계에서 몸 담아온 남자가 매긴 가격이다. 그의 주판을 의심해서 스스로를 깎아먹으면 안 된다. 비록 순수하게 그림만 놓고 본다면 가격에 거품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시대의 맥락이 없는 작품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비록 화가인 자신은 그 것을 백프로 이해할 수 없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누군데요?”
“자. 명함.”


재환은 명함을 받아들었다. 명함 속의 이름 옆에 적혀있는 직업명은 굉장히 친숙한 글자였다. 이웃 업계, 최근 들어서는 예술의 명확한 기준이 무너지면서 몇몇 사람들은 동종업계 종사자로도 분류할 수 있는 직업. 사진사. 


“사진사면 자기 그림을 갖고 싶을 수도 있겠네.”
“한 300호정도 되었으면 좋겠다던데. 가격은 2천만 원.”
“2천? 내 그림이 표면가가 호당 40인데 2천? 너무 바가지 씌운 거 아니에요?”
“내가 말한 거 아니야. 그쪽에서 먼저 이 정도는 주고 싶다고 했어.”
“그래도 너무 비싸서 부담되는데...”
“부담주려고 비싸게 부른 건지도 모르지요.”
“그런가...”


재환은 명함을 자켓 주머니 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환 씨 연락처 줬는데, 첫 자리는 우리가 만들게요. 그래야 수수료 받아 챙길 때 양심에 안 찔리지.”
“알겠어요. 나 그럼 이제 집에 가도 되죠?”
“작가님이 가시겠다면 가시는 거지.”


화랑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재환을 건물 출입구까지 배웅했다. 그러다 기억이 났다는 듯 자신의 주먹을 탁 쳤다. 아!


“의뢰인, 작가님이랑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던데?”
“네?”


주머니에 넣었던 명함을 꺼내서 이름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홍빈?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어느덧 15년도 더 되었으니 희미할 만도 했다. 재환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뒤를 돌아 길을 걸었다. 오후의 새하얀 햇볕이 재환의 그림자를 진하고 선명하게, 그렇지만 몹시도 짧게 만들었다. 



***



수수료를 얼마나 떼어 가려는 것인지 화랑에서 예약해준 레스토랑은 무척이나 고급스럽고 사람이 적었다. 물론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안쪽의 룸으로 들어가기에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은 별 상관이 없었지만 붐비지 않는 고급스러운 공간은 그것만으로도 요리 하나의 가격을 짐작케 하는 법이다. 


“앨범이라도 한 번 펴보고 올 걸 그랬나.”


얼마 전 500호짜리 그림을 막 마친 터라 재환은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그래서 화랑주도 재환에게 너무 집에만 있지 말라고 쉬엄쉬엄 소장전에 나와 잡담이라도 하라고 시킨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충전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숨 쉬기에만 열중하는 재환을 아는 탓이다. 


“그렇다고 본가까지 가서 앨범을 보긴 귀찮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2천만 원. 부담이 되면서도 기대가 되는 가격.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고 할까. 동창이라면 자신처럼 젊을 텐데 영정사진 대신 쓸 그림을 원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물론 영정사진용 그림이라면 훨씬 작고 가격도 훨씬 사겠지만. 재환은 괜히 목이 타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이쪽입니다.”


밖에서 직원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들어왔다. 재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직접 보는 순간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맑았던 물 속으로 첨벙첨벙 뛰어 들어가 흙탕물을 만드는 것처럼.

이홍빈. 내가 왜 이홍빈을 잊고 있었지?



***



“어떻게 된 게 공연 때는 호응 없이 핸드폰만 들이밀더니 공연 끝나고서 미니 홈피에 사진 한 장 올려주는 사람이 없냐?”
“그래도 파도 타서 가보고 검색하고 그러면 가끔 나와. 스티커랑 이상한 효과를 너무 넣어서 얼굴이 흐릿한 게 흠이지만.”


일 년 중에 가장 큰 행사나 다름없는 학교 가을 축제가 끝나자 진이 다 빠져버렸는지 멤버들은 기껏 연습실에 모여 놓고도 축 늘어져 있기만 했다. 재환은 막대 사탕을 입에서 굴리면서 소묘를 연습한 스케치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보면 뭐가 달라져?”


기타 겸 서브 보컬을 맡고 있는 학연이 재환에게 와서 물었다.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릴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올리면서 실수한 점을 찾는 거에요. 다음번엔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고 머릿속으로 계속 되새기는 거지. 그럼 확실히 달라져요.”
“너도 참 대단하다. 우리 반 예체능 애는 야자도 다 빼가면서 학원만 죽어라 다니던데.”
“저는 상 받아 놓은 게 좀 있어서 여유가 있는 편이니까.”
“그래그래. 니가 노래를 잘 해주니까 우리 밴드부가 얼굴 믿고 깝치는 애들이라고 욕을 안 먹지.”
“...뭐야. 그 말은 나는 얼굴이 별로라는 뜻?”
“들켰네?”
“아, 선배!”


재환이 콧김을 뿜을 기세로 바락 소리를 질렀다. 학연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재환의 곱슬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 안에서 둥글게 말리는 이 머리카락이 천연 곱슬이라니.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는 재환은 그야말로 딱 괴짜 천재 같은 아이다. 삐쩍 말라서 크기만 한 키. 살짝 구부정한 어깨. 브로컬리처럼 북슬거리는 머리. 알이 커다란 뿔테 안경. 그런데다가 분기 별로 한 번씩은 외부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 오는데 학교에서는 미술부 활동은 안 하고 밴드부나 한다. 심지어 노래를 잘 하기까지 해. 그 모든 것들이 재환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다. 너무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차마 질투조차 할 수 없는. 

똑똑- 부원들의 눈이 문 쪽으로 쏠렸다. 연습실은 방음을 위해서 두꺼운 철문이라 처음 오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노크를 하지 않는다. 누구지? 대외적으로 회장을 맡고 있는 학연이 일어났다.


“누구세요?”


벌컥- 문을 열자 모르는 남자애다. 재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옆에 선배들이 한 마디씩 수근거린다. 이홍빈? 이홍빈 아니야? 이홍빈이 웬 일이지? 학연을 보자 학연조차 이홍빈이라는 남자애를 아는지 들어오라고 팔을 잡아끈다. 


“니가 여기 어쩐 일이야? 평소에 형 연습하는 거 보러 놀러오라고 할 땐 거들떠도 안 보더니.”


학연과는 이미 아는 사이인 듯 건네는 말의 내용이 친근하다. 암묵적으로 다른 학년끼리는 선배, 후배로 호칭을 통일하는 학교 내에서 형이라고 말하는 걸 보아하니 그 전부터 친분이 있는 듯했다. 중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라거나. 홍빈은 부시럭거리면서 뭔가를 꺼냈다. 


“그... 내가 사진부잖아. 그래서 이번 축제 때 사진을 찍었는데...”


학연과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 재환을 힐끔거리던 홍빈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학연의 품에 비닐봉지로 둘둘 감아놓은 꾸러미를 냅다 안겨주고 재환의 앞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액자를 내밀었다. 


“노래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잡을 새도 없이 줄행랑.


“...쟤 뭐에요?”


재환은 큰 눈을 깜빡이며 학연을 보았다. 학연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면서 문을 닫고 소파에 앉았다. 


“어렸을 때부터 친한 동생인데 니 노래가 감명 깊었나보다. 이건 사진인 것 같은데?”


홍빈이 주고 간 꾸러미를 열자 그 안에는 이번 축제 때 공연한 밴드부의 사진이 가득했다. 단체로 나온 사진은 부원들끼리 나눠가지라는 뜻인지 여러 장 인화되어 있었다. 우와! 이게 미니 홈피보다 백번 낫네! 신난다! 이거 스캔해서 내 미니홈피에 올려야지. 부원들은 학연의 쪽으로 모여서 신이 나서 떠들었지만 재환은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나만 액자?”


홍빈이 재환에게만 특별히 주고 간 액자에는 전신을 아래에서 위로 찍은, 재환이 눈을 감고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간절하게 붙잡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생생하게 박제되어 있었다. 그 시간을 떼어다 붙잡아 놓았다. 재환은 그 사진을 보며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자신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때 이랬구나. 이렇게 불렀구나. 사진 너머로 전해져오는 절박함에, 아니 사진 그 자체에서 오는 그 열기에 재환은 약간 압도되었다. 

여러 그림대회를 나가면서 그림을 보는 감이라는 게 생겼다. 조형적이고 형태적이고 구성이 어쩌구 발상이 어쩌구 그런 모든 것들을 떠나서, 상을 받는 그림들에는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도가 있었다. 그 온도는 가끔 눈을 시리게 할 만큼 차갑기도 했고 가끔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고압을 갖기도 했다. 홍빈의 사진에서는 그런 온도가 느껴졌다. 뜨겁고도 고요한. 그래서 다음 장면이 기대되면서도 무서워지는 그런 온도가. 



***



“와- 넌 어떻게 된 게 더 잘생겨졌네.”
“에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그런 말 해줘봤자야.”
“맞다 너 나랑 1살 차이밖에 안 나지? 잘 생기면 동안인가봐.”


동창이라는 관계보다는 의뢰인과 의뢰주로 만난 관계이지만 대화는 꽤 화기애애하고 편하게 이루어졌다.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도 재환과 홍빈의 학년이 달라서인지 서로 약간씩 다른 관점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둘의 대화를 조금 더 활력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거 국어가 먼저 때린 거 아니었어?”
“아, 맞기는 한데 걔가 학기 끝날 때쯤에 특수반 애 한 명 찍어서 괴롭히고 있던 쓰레기인 게 밝혀졌거든. 그래서 그때 국어랑 치고받고 싸운 것도 오죽하면 국어가 그랬겠나 하는 애들이 많았지.”
“와... 그런 일도 있었구나. 난 까맣게 몰랐어.”
“선배는 그때 대회 나가느라 학교에 없었을 거야.”


재환이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접시의 고기를 하나도 자르지 않고 있자 홍빈은 자신의 접시와 재환의 접시를 바꿔주었다. 


“어? 안 그래도 되는데.”
“그냥 드세요. 그러다 다 식어.”


챙김을 받는 것이야 익숙한데 오랜만에 만난 후배, 그것도 일관계로 다시 만나게 된 의뢰주가 챙겨주자 민망하다. 재환은 괜히 포크로 스테이크를 뒤적거리다가 물었다.


“근데...”
“응?”
“눈 말이야. 혹시 다쳤어? 실내인데도 계속 쓰고 있으니까.”


실내조명에 까맣게 빛나는 선글라스 알은 홍빈의 눈을 완벽하게 가려주었다. 물론 얼굴 근육과 입 모양이 홍빈의 표정과 기분을 알려주고는 있지만 면대 면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선글라스라니? 패션이라면 민망하겠지만 재환은 궁금했다. 분명히 홍빈의 눈은 꽤나 예뻤던 걸로 기억하고 있기에. 


“아... 어. 좀 안 좋아.”


차라리 패션이면 좋았을 텐데. 눈이 다친 게 맞다는 말에 재환은 안됐다는 듯 안타까움의 한숨을 흘렸다. 홍빈의 입가가 올라간다. 약간 부자연스럽다. 지금까지는 정말 즐겁다는 듯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는데 지금은 약간 경련하듯 억지로 힘에 밀리는 움직임이다. 재환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홍빈은 약간 떨리는 손을 선글라스 쪽으로 가져갔다.


“사실 그래서 이번에 그림을 의뢰한 거야.”
“아, 괜찮아. 굳이 안 벗어도...!”


재환은 말문을 잃었다. 분명 기억 속의 홍빈의 눈은 짙고 어두운 흑색이었다. 먹으로 그려낸 것처럼 아름다운 그의 존재의 마지막으로 마무리 점을 찍은 것처럼 완벽한 까만 원. 하지만 지금 그의 두 눈동자는 회백색으로 혼탁해져 있었다.


“나 이제 곧 시력을 잃게 돼.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배가 그린 나를 보고 싶었어.”


왜?
홍빈의 말에 반사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왜? 굳이 왜? 왜 내 그림이야? 너와 내가 뭔가가 있었어? 재환은 남의 치부를 드러내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 막중한 책임감, 왜 하필 자신인지 모르겠는 혼란스러움이 뒤섞인 채로 당혹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내비쳤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왜지? 그러기가 왜 싫지? 이유는 간단했다. 고등학교 시절은 재환이 의식적으로 잊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다. 가장 부끄럽고, 가장 서툴렀던 시간들. 

그리고, 가장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했던 시간이었다.



***



“그만! 잠깐 쉬었다 하자.”


학연의 외침에 모두 악기를 내려놓았다. 재환은 숨을 몰아쉬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자신이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재환이 너 요새 계속 집중을 못 한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요...”


옆에 학연이 와서 앉자 재환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어디가!”
“잠깐 나갔다 올게요!”


등 뒤로 닿아 오는 학연의 목소리에 도망가듯 복도를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가 결국은 물에 잠겨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식도와 폐 안으로 물이 서서히 차올라 익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내 고통을 이해해주겠지. 비난하지 않겠지. 


“...아, 죽고 싶다.”


재환은 운동장 스탠드에 벌렁 누웠다. 등나무가 스탠드 위를 덮는 철봉들을 타고 올라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계절이 지났는데도 연보라색 등나무 꽃들은 아직도 탐스러운 포도송이처럼 줄기에 매달려서 바람에 흔들렸다. 너네는 이미 꽃을 피울 시기가 지났어. 이제 열매를 맺을 때야. 머리로는 알지만 꽃을 보니 기분은 한결 누그러졌다. 꽃을 그릴까. 이번엔 꽃을 그려볼까. 재환은 닿지 않는 걸 알면서도 꽃으로 손을 뻗었다. 찰칵-, 귓가에 들리는 기계음에 재환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죽고 싶다는 사람 치고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에요? 왜 죽고 싶은 데요?”
“...빈이 너구나.”
“나 말고 선배 찍을 사람도 있나?”


홍빈이 카메라를 내리며 씨익 웃었다. 재환은 자기도 모르게 함께 웃었다. 홍빈의 웃음은 전염성이 있었다. 

축제가 끝나고 홍빈에게 받았던 액자는 재환의 책상에 자리 잡았다. 재환은 점심시간에 밥을 얼른 먹고 아이스크림을 들고 학연에게 물어 홍빈의 반으로 찾아갔었다. 홍빈 자체로도 학교의 유명인인데 다른 쪽으로 유명한 윗 학년 선배가 찾아와서 교실 문 앞에서 기다리자 반 아이들은 무척이나 위축되었다. 재환은 그럴 생각이 없는데 후배들을 괴롭히는 기분이라 약간 미안해졌다. 


“저기 홍빈이 왔어요!”


밥을 다 먹고 친구들과 느긋하게 걸어오는 홍빈을 보며 한 아이가 말해주었다.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앞을 본 홍빈은 재환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재환은 양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둘 중에 뭐 먹을래?”
“아... 전 이거요.”


키위 아작을 잡은 홍빈 덕분에 재환은 좋아하는 뽕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홍빈을 기다리는 동안 약간 녹아서 딱딱할 때 쉽게 따지던 꼭지가 잘 따지지 않아서 낑낑대자 홍빈이 재환의 뽕따를 가져가서 따주었다. 


“고마워!”


재환은 홍빈에게 웃으며 꼭지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야금야금 먹었다. 다음 날 홍빈은 재환의 반 앞으로 뽕따를 사왔고 둘은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으며 친해졌다. 의외의 조합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왜 죽고 싶냐니까? 그냥 한 말이에요?”


홍빈은 스탠드에 앉아서 재환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홍빈의 허벅지는 딱딱하지만 그래도 콘크리트 바닥보다는 훨씬 낫다. 체온 덕분에 차가워진 뒷목도 적당히 따뜻하고. 하지만 아래서 올려다 보이는 홍빈의 얼굴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재환은 얼른 눈을 감았다. 홍빈은 재환의 안경을 벗기고 앞머리를 쓸어 이마를 드러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드러난 이마를 훑었다. 기분 좋다. 하지만 죽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굳이 살고 싶지 않다는 쪽에 가깝지만.


“죽고 싶다는 말이 지금 당장 죽겠다는 말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괜한 걱정 안 해도 돼.”
“걱정을 어떻게 안 해요. 학연이 형이 선배 걱정하던데.”
“그래?”
“네. 요새 이상하다고.”
“그런가. 그림은 더 많이 그리는데.”
“가슴에 쌓인 게 있나보다.”


홍빈은 그것 이상으로 묻지 않았다. 그냥 교실로 돌아가면서 “그림 좀 보여줘요. 맨날 상 받았다는 얘기는 듣는데 그림은 본 적이 없어.” 라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재환은 결국 홍빈에게 그림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학교를 졸업했다. 



***



“여기가 작업실이야.”
“기름 냄새...”
“유화니까.”
“선글라스 벗어도 되요?”
“너 편할 대로 해.”


그 말에 홍빈이 약간 멈칫한다. 난잡하게 널려있던 도구들을 정리하던 재환은 그런 홍빈에게 고개를 갸웃했다. 홍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야 벗는 게 편하죠. 계속 봐도 징그럽지 않겠냐고 물은 건데.”
“징그러울 게 뭐 있어. 오히려...”


예쁘지. 
재환은 뒷말은 삼켰다. 시력을 잡아먹는 병의 증상을 예쁘다고 하는 것은 실례겠지. 하지만 홍빈의 눈은 아름다웠다. 우주의 화이트홀이 마치 저렇게 생겼을까 싶었다. 까만 눈을 점점 잠식해가는 혼탁한 백색. 홍빈의 눈은 마치 파멸로 치닫는 우주처럼 보였다. 눈 속의 작은 우주. 그 우주는 결국 홍빈의 삶을 잡아먹어 송두리째 바꿔놓겠지. 


“나는 선배 그림 중에 이 그림을 제일 좋아해요.”
“나도 좋아해. 그거.”


팜플렛을 보던 홍빈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입모양으로 묻자 홍빈은 고개를 저었다. 


“선배가 그리는 꽃이 좋아요. 나는 이상하게 예전에 선배가 죽고 싶다고 했던 게 잊혀지지가 않는데, 선배가 그린 꽃을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되요. 그래도 아직 살만한 세상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상한 애네. 난 기억도 안 나는데.”


홍빈이 제일 좋아한다는 그림은 꽃밭에 소년의 발만 비죽 삐져나온 그림이다. 100호 크기의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얼룩얼룩한 꽃들. 그리고 그 사이로 나온 살구빛 발. 그 발은 시체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던 그림이다. 물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체라고 생각하며 그린 그림들은 꽤 많았다. 재환의 그림 속 사람들은 잿빛 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시체와 보통 사람은 잘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그림의 발은 시체가 아니었다. 재환은 꽃밭에 누워서 꽃과 함께 흔들리는 하늘을 보는 사람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렸다. 이대로 꽃이 되고 싶다. 이대로 죽어서 거름이 되어 꽃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선배가 나를 꽃과 함께 그려줬으면 해요. 마지막으로 보는 세상이 좀 살만했으면 싶거든요.”
“...너 이혼했어?”
“어떻게 알았어요? 눈썰미 좋네. 아, 반지자국이 있구나.”


홍빈은 왼손 약지를 슥슥 만지며 웃었다. 웃지 마. 재환은 말하고 싶었다. 웃지 않아도 돼. 홍빈은 내내 웃었다. 하지만 웃고 싶을 리가 없었다. 


“좋을 때 헤어지고 싶다고... 합의 이혼이었는데 위자료까지 주더라구요? 그래서 선배한테 그림 의뢰했지. 그러고도 꽤 많이 남았어요. 와이프도 그렇고 장모님이 나 많이 좋아했거든. 많이 좋아했던 만큼 미안하니까 돈으로 보상해주고 싶은가 봐요. 부자들 메커니즘은 이해할 수가 없어.”


꽃. 재환은 꽃을 그리는 화가다. 요새는 그런 걸 촌스럽다고들 많이 하지만 그래도 스타 작가들은 왠만하면 그리는 소재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다. 산. 하늘. 꽃. 바위 등. 그 중에서 재환은 꽃을 그렸다. 흔하고도 흔한 소재지만 재환은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꽃과 시체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재환 스스로는 그건 시체 아니거든. 하고 입을 삐죽였지만 시체를 그리는 것은 맞았기에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꽃. 재환은 꽃을 그리는 화가다. 그래서 재환은 홍빈을 그릴 만한 엄두가 났다. 홍빈은 마치 꽃 같았다. 재환의 그림 속 사람들은 시체이거나 시체처럼 잿빛이다. 하지만 홍빈은 시체라기 보단 꽃이었다. 어차피 홍빈의 개인 의뢰를 받은 그림이니 작품 세계의 통일성 그딴 거 개나 줘버리고 탐미적으로 그려야지. 재환은 머릿속으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홍빈의 이혼얘기 같은 거엔 관심도 없었다. 



***



고등학교 때의 꿈을 꾸었다. 자기 전에 엄마가 보내준 앨범과 사진꾸러미를 뒤적인 것 때문이었을까. 꿈속에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 외에도 중학교, 대학교 때 만난 친구들도 간간히 섞여 있었다. 꿈을 꾸고 나서야 ‘섞였네’ 싶지 꿈속에서는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15살, 18살, 23살의 나로 시간을 넘나들고 공간을 넘나든다. 꿈속 학교는 고등학교의 복도이기도 했다가 중학교의 운동장이기도 했다가 대학교의 강의실이기도 했다. 

꿈에서 재환은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첫사랑. 풋사랑.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멀리서 좋아하기만 하면서도 그 사람을 보면 죽고 싶었다. 죽어서 공기가 되어 그 사람의 숨결에 섞여 들어가고 싶었다. 죽어서 바람이 되어 그 사람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싶었다. 죽어서 빗방울이 되어 그 사람의 뺨에 닿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살아 있어도 그 사람의 시선에 닿지 못하는데 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시선이 닿는다면 그것대로 죽고 싶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재환은 압도적인 세계의 크기에 놀라 죽고 싶었지 개인 때문에 죽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걸 가능케 했다. 재환은 꿈에서 깨서도 계속 고등학교 때를 생각했다. 15년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부비트랩처럼 산발적으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툭툭 터져나와 재환을 덮쳤다.


“재환아. 너 누구 좋아하니?”


그림을 지도해주는 교수가 물었었다. 재환은 그냥 창밖만 보았다. 그림을 그릴 때면 노래가 하고 싶고 노래를 할 때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요새 재환은 자신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사진 찍은 거 보여줘.”
“...민망한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홍빈은 재환에게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작은 화면으로 사진을 넘기며 재환은 한숨을 쉬었다. 홍빈이 3학년을 찍을 리가 없잖아. 성의 없이 툭툭 다음 화면으로 넘기던 재환은 다시 카메라를 홍빈에게 넘기고 뒤로 벌렁 누웠다. 


“아, 만지고 싶다.”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홍빈은 카메라를 정리하던 움직임을 잠깐 멈췄다가 재환에게 물었다.


“...뭐를?”


홍빈의 목소리는 원래 저음이었지만 이때는 평소보다 더 낮았다. 


“뭐든.”


가볍게 한 대답에 홍빈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재환은 미묘한 기류를 읽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때는 충동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게 틀리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가장 원하는 것은 할 수도, 될 수도 없으니까.


“너도 만지고 싶어?”
“......”


홍빈은 재환을 현상실로 데려갔다. 인생의 첫 섹스였다. 아니, 섹스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몸을 만지고 비비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첫키스였고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남이 옷을 벗겨주었던 경험이었다. 재환은 홍빈의 손길에 신음하면서, 홍빈이 자신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그를 생각했다. 영원히 이룰 수 없을 소원을 생각했다. 재환은 그 이후로 홍빈과 여전히 잘 지냈다. 하지만 그날과 같았던 날은 없었다. 홍빈과는 3학년이 되면서 서서히 멀어졌다. 나 참 나빴다.


“가해자는 잘 잊는구나.”


내가 가해자일까? 그렇다면 홍빈은 피해자가 되는데. 남을 멋대로 피해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지금의 홍빈은 동정의 시선 따위야 질리도록 받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냥 재환은 그림을 그렸다.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스케치를 손으로 꺼냈다. 한 평생 한 일이고 나머지 평생 동안도 할 일이다. 나는 눈을 잃더라도 그림을 계속 그리겠지. 실제로도 맹인 화가들은 꽤 있다. 천연 물감은 색깔마다 미묘하게 온도가 달라서 촉감으로 색을 구분할 수 있기에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가늠이 될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꽃잎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그릴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난 그리겠지. 호당 얼마가 되는 화가가 되든지 나는 평생 그림을 그릴 것이다. 하지만 홍빈은?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산만하게 흐트러진 앨범과 사진 꾸러미 사이에서 홍빈이 찍어준 자신의 사진을 찾아내었다. 세월이 흘러 그때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진에 처음으로 압도되었던 기분은 기억이 난다. 사진을 찍지 못하는 홍빈은 어떻게 살아갈까. 내일은 캔버스에 스케치를 옮겨야지. 재환의 생각은 정리가 되지 않은 팔레트처럼 여러 색깔이 뒤섞여 어지러웠다. 여러 고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사라졌다. 재환은 그것에 불편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결론은 그림으로 귀결되었으니까. 



***



찰칵- 찰칵- 재환의 작업실을 가득 매운 것은 셔터 소리였다. 홍빈은 기록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진을 찍어댔다. 재환이 그리는 그림을 말이다. 


“차라리 동영상을 찍지 그래?”
“아, 그게 좋겠다. 다음에 가져올게.”
“...이거 웃기는 놈이네.”


재환은 피식 웃으며 파스텔로 스케치를 해나갔다. 


“그런데 날 그리는 건데 나로는 연습 안 해?”
“왜. 너 모델로 세워놓고 그려줘?”
“...그럴 줄 알았는데.”


재환은 사람의 묘사를 섬세하게 하는 화가가 아니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의뢰주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는 게 나으려나? 보고 싶은 이미지가 있기는 하다. 재환은 고민하다 홍빈을 데리고 욕실로 갔다. 


“여기 누워봐.”
“욕조에?”
“어. 더러워지는 거 싫으면 옷 벗고.”


홍빈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재환은 테라스에서 화분들을 잔뜩 가져왔다. 홍빈은 욕조 안에 누워서 멀뚱멀뚱 자신을 보고 있었다. 욕실 바닥에 화분 십 수개를 가져다 놓고 재환은 꽃과 이파리들을 마구 뜯어내기 시작했다.


“뭐야, 왜 그래! 선배 미쳤어?”
“가만히 있어.”


재환은 깨끗하게 씻어놓은 양동이에 뜯은 꽃과 이파리들을 가득 담았다. 꽃을 그리는 화가인 재환에게는 컬렉터나 기업, 화랑으로부터 계절마다 꽃 화분들이 배달되어 오곤 했다. 사실 꽃을 키우는 취미는 없다. 주니까 받는 것 뿐. 매번 받은 꽃들을 방치하다가 죽여 버리는 바람에 꽃 화분의 개수는 늘어도 늘어도 언제나 그대로였다. 어느새 양동이가 가득 찼다. 재환은 양동이를 들어 그대로 홍빈의 머리 위로 쏟아 부었다. 


“아...!”


그렇게 낭만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이파리와 꽃잎들에 묻은 흙들과 물방울들이 뒤섞여 홍빈의 흰 뺨에는 흙탕물이 튀었고 그의 흰 셔츠는 얼룩덜룩하게 젖었다. 하지만 재환은 마음에 들었다. 꽃만이 아니라 푸른 이파리들과 뒤섞여 있는 홍빈은 그야말로 식물 같았다. 다른 생물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처럼 보였다. 재환은 홍빈의 뺨에 묻은 흙탕물을 훔쳐 주며 말했다.


“빈아. 나랑 잘래?”
“...싫어요. 자고나면 이번에는 또 얼마나 나를 잊으려고.”
“그럼 잊지 않게 계속 같이 있을까?”


그 말에 홍빈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듯 입술을 깨물었다. 더욱 더 혼탁해지는 까만 눈동자 속 하얀 어둠. 재환은 몸을 숙여 욕조를 짚고 홍빈에게 입 맞추었다. 홍빈은 재환을 밀어내며 더듬더듬 말했다.


“난... 선배에게 귀찮은 존재가 될 거에요. 손도 많이 갈 거고...”
“참아볼게.”
“왜요? 선배가 왜 날 참아요? 날 좋아하기라도 해?”


비명을 지르듯 욕실을 울리는 말에 재환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홍빈의 곁에서는 언제나 편했다. 숨을 편히 쉴 수가 있었다. 그 감정이 좋아한다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약간은 다르다. 재환은 홍빈에게 깊게 입 맞추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니 옆인 게 좋을 것 같아.”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지.”


홍빈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재환을 끌어당겨 욕조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욕조 안에서 둘은 내내 입을 맞추며 숨을 섞었다. 재환은 홍빈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재환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을 할 때에도 자신에게 취해서 그 사람을 제대로 알려고 들지도 않았었다. 재환은 그래서 홍빈이 갖고 싶었다. 홍빈 곁에선 숲 속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홍빈은 주는 사람이다. 재환과 첫 만남도 그랬다. 재환에게 자신의 사진을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재환의 세계가 닫힌 세계라면 홍빈의 세계는 열려서 흘러넘치는 세계다. 누구나 홍빈의 세계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홍빈은 재환에게 그 세계의 열쇠를 재환에게로 흔쾌히 넘겨주었다. 그것도 이미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잘 할게.”


재환은 젖은 입술로 말했다. 홍빈의 아름다운 우주가 완전히 회백색에 먹히더라도, 홍빈이 슬픔과 절망에 무너지더라도, 이기적인 이재환은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함께 부서지지 않고 이홍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재환은 그걸 알았다. 꽃과 나뭇잎 속에서 재환은 홍빈을 품었다. 

정 반대의 우리. 그렇기에 조화를 찾을 수 있다. 재환은 눈물을 흘리는 홍빈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머리칼을 정리해 홍빈의 깨끗한 이마에 키스했다. 홍빈과 재환의 세계가 팽팽하게 맞부딪치다가 부드럽게 한 덩어리로 뭉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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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빈아 생일 축하해...!

파프님께 켄이 뮤지컬 체스하는 기념으로 리퀘 받았던 홍켄인데 이걸 이제야 쓰네요ㅠ0ㅠ... 건축학개론같은 첫사랑물을 리퀘하셨는데 뭔 소시오패스같은 이재환을 썼...ㅠㅠㅠㅠㅠㅠ

이홍빈! 이재환!! 사랑한댔다..!

Posted by 바비켄 :


215 :친구 그만둠1/3:2015/09/26(토) 22:13:20 ID:Rravii0215

이미 끝난 이야기이므로 투척.
몇년 전의 친구사이를 그만둔 이야기.

친구였던 J는 애니나 만화의 연출을 현실에 실행하는 놈(정확히는 형)이었다.



아래에 예시를 몇개 들어 보겠다↓

・달릴 때 「우다다다-!」 「쉬이이익-!」하고 실제로 말한다.
・달리고 와서 멈출 때에 「끼긱-!」이라고 말하면서, 일부러 앞으로 푹 고꾸라지면서 정지.
・먹을 때는 「냠냠냠」 「하압하압」을 말로 한다.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몇 번이나 윙크를 하면서 「핫튜핫튜」라고 말한다.
・약속이 끝나고 헤어질 때는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며 「음쮸쮸-」뽀뽀하는 시늉을 한다.

당시 A는 이미 20대 중반이었으므로, 상당히 오글토글했다.

그러나 그래도 남자다운 외모인데도 이상하게 귀여워서, 나와 동갑 친구도 네네그러시던지하며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 J의 오버 리액션은 상식의 궤도를 벗어나게 되었다.




누군가 얼빠진 농담을 하면,

「하하—, ○○형도 참 웃기다니까— 재밌었으니까 상을 줘야지!」

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일어나서 뺨에 chu.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지는 ○○.

동갑 친구는 혹시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멋대로 그러면 성희롱이라고 혼내면 「혼나버렸어…훌쩍훌쩍훌쩍」하며 우는 척할 뿐으로 반성은 없음. 자기를 웃겨 주거나 기분 좋게 해주기만 하면 뽀뽀를 퍼부었다.





216 :친구 그만둠2/3:2015/09/26(토) 22:17:01 ID:Rravii0215


이렇게 되면 모두 FO(※페이드아웃)까지는 하지 않아도 거리를 두기 시작하겠지만,
과연 모두 J가 귀엽다고 여기고 있었는지 갑자기 J와 단둘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급증.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토마스 홉스)처럼 되어버려서 종래에는 모두 다 함께 놀게 되는 상황으로 돌아왔다. 각자 J에게 어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J는 여전히 한 명에게 정착하지 않고 자길 웃겨주는 사람에게 공평하게 chu- 날렸다.




그것은 전환점이 된 어느 날의 사건.

내가 운전을 하고 교차점에서 신호 대기를 하고 있으니, J가 갑자기 
강렬하게 내 입술과 충돌.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내 얼굴을 잡고 키스해왔다.

정신차리니 뒤의 차들이 모두 빵빵거리고 있고 우리는 격렬하게 딥키스를 하며 나와 J의 바지 모두 단단한 텐트 상태.
아무 곳에나 차를 버려두고 모텔로 직행했다. 


낮에 가까운 오후시간에 들어갔는데 나온 것은 다음 날이었다.
물론 차는 견인행(웃음).



J는,

「운전에 집중한 (나)쨩☆이 너무 섹시한 게 잘못!」

「나는 아직 연인같은 거 만들 생각 없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섹스 프렌드—☆ミ』」

라고 상정하고 있던 듯 해서… 나로서는 무척이나 충격.





천연계 소악마 빗치 J를 내 집으로 데려가서 다시 아침까지 몸으로 혼내주었다(웃음).





217 :친구 그만둠3/3:2015/09/26(토) 22:20:34 ID:Rravii0215



J는 아픈 엉덩이를 부여잡고 사죄했지만,

「이렇게 절륜하다니 못 버틴다!」

「 ○○형이나 다른 친구들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

「이제 다시 키스하지 않을테니 봐줘!」

「할 수 있으면 앞으로도 친구로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이라고.


이쪽은 당신이 다른 남자한테 chu하는 거 보면 홧병으로 죽어버릴 지도 모릅니다만.
당연히 깔끔하게 거절.

이것을 계기로 연인이 되자고 밀어붙여 결국 승락 받아낸 후, 동갑 친구나 ○○형, J와 교제가 있던 사람들에게 일제히 J를 연애상대로서 CO(※컷 아웃) 해달라고 메일을 돌렸다.

연애를 시작했다는 의미의 친구를 그만 둔 이야기다(웃음).




J 그 자신에게 키스정도야 별 거 아닌 일일지 몰라도 좋아하는 마음을 꾹 누르고 있는 내게는 거의 기폭장치를 누르는 수준의 행동이었다. 

연애 선언 메일을 돌린 후 ○○형이라던가 동갑 친구라던가 기타 여러 남자들에게 일방적인 화를 받아내야했지만 귀여운 사람을 연인으로 둔 값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J는 애인이 된 후로 내 요구에 따라 아무에게나 chu-나 허그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정말 예상 외로 연인에게 충실한 타입이라 놀라고 있는 편.

A의 일기장을 훔쳐보니 처음 chu를 하게 된 것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chu-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한명에게만 하면 이상하니 모두에게 해버리자☆ミ』 라는 마음으로 시작해버린 것 같은데 아무리 일기장을 읽으면 읽을 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나인 것만 같다. 

나중에 물어봐야지(웃음).




929 :930:2015/09/27(일) 10:07:17 ID:RedBeans

결국은 연애충 이야기인가.
연인을 쟁취한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만, 다른 경쟁자들을 조심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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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ch 재밌는 글을 보고서 패러디... 원래 글은 완전 언해피?엔딩입니다 애초에 커플글이 아님ㅋㅋㅋㅋㅋ

즐거운 한가위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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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비켄 :

[랍켄홍] Error: code 01,02,03

2021. 4. 28. 01:29 from text

돔을 가득 채우던 마지막 노래가 끝이 났다. 반투명한 천장을 가득 채우던 홀로그램이 싱긋 웃으며 182cm의 그에게로 흡수된다. 허공을 날아다니던 작은 스테이지들이 가장 높은 곳에 서있는 그를 향해 날아온다. 개별 스테이지가 일사분란하게 모여 천천히 그를 정다면체의 공간에 가두기 시작하자 돔 내부를 비추던 빛들도 하나씩 하나씩 사라졌다. 관의 뚜껑을 덮듯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이 가려지자 돔도 빛 하나 없는 암흑이 되었다. 관객들의 팔찌에 둘러지고 손에 잡고 있던 봉에서도 모든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둥근 천장은 외부의 우주를 돔 안으로 비췄다. 먹빛 우주를 달려 노랗고 붉게 다가오는 다른 은하의 빛들. 그 우주 속에 떠있는 까만 정다면체에서 음악이 작게 새어나온다. 수 십대의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로맨틱한 복고풍의 음악. 이백 년 전에 유행하던 재즈의 선율이 우주로 가득한 돔을 휘감자 그 음악은 마치 수많은 별들과 은하가 흐르며 만드는 듯했다. 그때 정다면체의 한 모서리가 열렸다. 그리고 뾰족뾰족 마치 빛나는 수정의 결정 같은 별들과 함께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just the other night, I was sitting alone 
staring at the starry sky 
dreaming someone would take away my worries and sadness 
hold me by the hand 

high up from the sky, with a brilliant light 
a spaceship came descending 
someone came out to me and i am sure he was asking 
YOU CAN FLY WITH ME!

은하 여행자.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빠른 드럼의 비트에 맞춰 속삭이듯, 혹은 당신에게 말을 거는 듯이 부르며 손바닥으로 정다면체 안에 가득한 별들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그에게서 밀려난 별들이 관객석을 향해 날아가며 수많은 그로 변한다. 진짜 그는 핸드 마이크를 잡은 채로 돔 안의 거대한 은하 사이를 헤엄치며 노래했다. 관객들은 같은 이름만을 애타게 외쳤다. 가까이 있어도 너무나 멀고 항상 반짝여도 계속 빛나길 바라는 그 이름- 켄.


“오늘도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다음번 여행까지 모두 잘 지내!”


선명한 홀로그램들이 관객들에게 키스를 건네며 다시 그에게로 모이고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우주 제일의 윙크를 선보이며 인사했다.


“지금까지 켄이었습니다! 모두 안녕히!”


재환은 망토 끝을 잡아 몸 전체를 가릴 수 있게 크게 휘날렸다. 주인공은 사라지고 펄럭이는 망토는 주인을 잃고 관객석으로 떨어지며 주변에 꽃을 뿌렸다. 관객들은 켄에게 아쉬움과 감탄, 그리고 애정이 가득한 갈채를 보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성공적인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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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휴가 맞지?”
“그래, 진짜 휴가야. 진짜지이인짜! 몇 번 말해줘야 믿을래?”
“맨날 약속만 하고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내준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재환은 입을 삐죽였다. 자신의 의지와 결정으로 노래하는 인생을 선택했지만 이렇게 쉴 새 없이 우주를 종횡무진하며 휴가를 반납한 삶까지 원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물론 자신처럼 전 지구와 위성들의 사랑을 받는 우주 아이돌로서의 삶이라면 이 바쁜 스케쥴마저 감수하겠다는 사람이 쎄고 쎘다는 걸 안다. 소위 말하는 배부른 투정이라는 거지. 하지만 인간은 끝없이 바라는 생물인걸. 감사히 받아들여야지 생각하면서도 진심은 쉬고싶다! 집에 가고 싶다!인 걸 어떡하라고. 재환은 두툼한 입술이 배로 튀어나와 보이도록 입을 쭉 내밀고 구시렁거리며 능숙하게 트랜스포터를 운전하는 엔을 흘겨보았다. 오토모드로 놔도 되는 걸 굳이 수동으로 운전하는 이유가 뭘까. 수동이라고는 해도 공중도로의 선을 벗어나면 경고등이 표시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는데. 트랜스포터가 도심을 벗어나자 네비게이터에 속도제한 표시등이 사라진다. 엔은 휘파람을 불며 속도를 높였다. 재환은 빠르게 지나가던 창밖의 세계가 이제는 그저 하얀 빛으로 번지는 것을 심심하단 표정으로 구경했다. 이렇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니. 시간 여행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야- 이게 대체 얼마만에 오는 거야?”
“오버 하지마. 5일 전에도 왔었잖아.”
“짐만 가지러 온 건 안 치거든요? 완전 어이없어. 어! 형, 이거 봐! 꽃이 벌써 폈어!”


트랜스포터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며 엔에게 핀잔을 주던 재환은 녹색으로 가득한 정원에서 보라빛 등나무 꽃을 발견하고 급하게 달렸다. 사시사철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습기로 유지되는 재환의 정원은 오히려 쉽사리 꽃을 피워내지 못했다. 봐줄 사람이 없어서일까. 그래서인지 재환은 오랜만에 집에 온 자신을 환영하기라도 하듯 포치에 흐드러지게 핀 등나무 꽃에 필요이상으로 감격하며 활짝 웃었다. 엔은 그런 재환이 귀여워서 같이 웃다가 정신을 차리고 트랜스포터에서 마저 짐을 꺼냈다. 엔은 짐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 혹시 오래 집을 비우는 동안 별 다른 일이 없었는지 체크한 후 다른 식물들은 꽃을 피우지 않았나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정원을 탐험하는 재환에게 말했다. “소리 개방.” 정원까지 들리도록 명령하는 건 필수다. 


“대강 집에 먹을 건 채워두긴 했는데 더 장 봐야 될 것 같아. 내일 다시 올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응, 알았어.”


저저, 대강 대답하는 거 봐라. 엔은 한숨을 쉬며 명령했다. “소리 차단.” 단 두 단어만으로 산들바람에 살랑거리는 잎사귀 소리와 희미하게 들리는 재환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정원의 소음이 차단되어 집은 다시 고요한 침묵 속으로 빠진다. 엔은 트랜스포터를 타고 집을 떠나면서도 끝까지 잔소리를 했다.


“괜히 혼자 장 보러 가서 사고 치지 말고 내일 나 올 때까지 기다려! 말 안 들으면 진짜 혼 나!”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내가 무슨 열 살 먹은 꼬마앤가.”


재환은 볼을 부풀리며 투정을 부렸다. 그리고 몸이 너무 피곤해서 지금 자면 내일 모레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걱정 마시죠! 마음 속으로만 한 생각이다. 재환은 엔을 배웅한 후 집으로 들어가 후다닥 샤워를 하고 바로 침대로 뻗었다. 아, 이 폭신한 이불 좀 봐! 이불도 베개도 침대도 다 최고급으로 사놓고 제대로 쓰지도 못했어! 


“이제 좀 살 것 같다. 이렇게 편하게 혼자 있는 게 대체 얼마만이야.”


휴식 시간이 주어져도 30분, 1시간, 2시간. 언제나 끝이 있는 잠깐일 뿐이라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었다. 하아암- 하품을 하며 재환은 침대 서랍에서 안대를 꺼냈다. 물론 침실은 외부와 빛과 소리가 완벽하게 차단이 되는 밀실이지만 안대를 쓰는 것은 버릇이다. 우주선과 항공기, 트랜스포터를 오가며 쪽잠을 자며 생긴. 아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불쌍하다. 재환은 훌쩍이는 척하며 인공지능에 명령했다.


“코코넛 버터향 디퓨저 농도 0.5%로 부탁해-”


공기 중으로 은은하게 달콤한 향기가 퍼지고 재환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포근한 이불 속으로 풍덩 점프했다. 등을 받쳐주는 이 탄력 있으면서도 푹신한 안정감! 이 매트리스 광고모델 누구지 나 시켜주면 진짜 잘 할 수 있는데... 실없는 생각을 하던 재환은 침대에 누운 지 5분도 되지 않아 잠에 들었다. 행복한 꿈조차 꾸지 않는 달콤한 잠이었다.


***


불행히도 누군가가 깨우지 않는다면 20시간도 거뜬했을 재환의 꿀잠은 10시간 만에 인공지능의 알람소리에 의해 깨졌다. 으음- 뭐야? 인공지능은 짜증을 낸다거나 화내는 일 없이 재환에게 반복해서 현재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미등록 트랜스포터가 개인 도로로 접근 중입니다. 미등록 트랜스포터가 개인 도로로 접근 중입니다.
“뭐?”
-미등록 트랜스포터가 접근 중입니다. 안면 인식 불가. 접근 허가 리스트에 등록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주변은 다 내 땅인데 내가 모르는 사람이 왜 와? 사유지라고 우회 권고했어?”
-3번의 우회 권고에 모두 미응답. 다시 한 번 권고하겠습니다.
“알겠으니까 화면 띄워!”


침대 정면의 벽이 그대로 스크린이 되어 바깥을 비추고 급하게 이마 위로 걷어 올린 안대 아래로 보이는 것은 내부를 볼 수 없게 블락한 모르는 트랜스포터다. 게다가 난생 처음 보는 모델. 어떤 오래된 모델도, 어떤 최신의 모델도 저렇게 생길 수는 없다. 마치 구시대 전쟁 사진 속의 장갑차처럼 철갑을 두른 트랜스포터라니! 요즘의 전쟁은 물리 전쟁이 아니기에 저런 트랜스포터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물론 박물관에서 보기엔 디자인이 위화감이 들 정도로 세련되었다. 두꺼운 철갑을 둘렀음에도 날렵하게 잘 빠진 트랜스포터는 재환이 놀라는 사이 공용 도로를 지나 개인도로로 진입했다. 개인도로는 재환의 집으로 들어오는 직선 통로다.


-보안업체에 자료가 송신되었습니다. 5분 내로 업체가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니, 5분이고 나발이고 저건 지금 1분도 안 돼서 도착할 텐데? 뭐야? 무서워!”


일단 집 주변 실드 가동해! 다급하게 외친 재환은 침대에서 내려와 일단 거울부터 봤다. 괴한에게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외모는 중요했다.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나노단위로 캡쳐해서 온 지구와 행성에 뿌려질 텐데 당연하지! 재환은 아이돌이라는 직업병이 순수했던 나를 이렇게 망가트렸구나 한탄하며 붕붕 뜬 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미스트를 뿌리며 애를 썼다. 


-침입자 도착. 침입자 도착. 침입자의 음성을 수신할까요?
“...응. 대신 무서우니까 출력은 50%로!”
-침입자의 음성을 수신합니다. ‘이재환 씨?’


처음 들어보는 낮은 저음. 재환은 급하게 외쳤다.


“얼굴을 보여줘!”


물론 음성 송신을 명령하지 않았으니 이 말은 집 외부로 나가지 않았다. 재환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스크린은 모르는 남자의 얼굴로 꽉 찼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큼직하게 잘생긴 코. 어떠한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 꾹 다문 입술. 알이 큰 선글라스를 낀 날카로운 얼굴선은 정말 난생 처음 보는 낯선 이의 것이다. 


“줌 아웃. 전신을 비춰.”


블랙 워커, 블랙 진에 검은 가죽 자켓까지 온통 무채색인 남자. 그의 전신에서 색이 있는 부위는 머리카락뿐이다. 군인처럼 옆을 치고 짧게 깎은 머리는 불타는 것처럼 새빨갛다.


-‘이재환 씨, 안에 안 계십니까?’


재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집 안으로 수신되는 저음은 감정 없이 그저 딱딱하기만 해서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머리 스타일은 군인 같지만 군인이라면 소속을 댈 테니 군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쪽... 아니아니, 그쪽 사람이 올 일도 없거니와 와도 이렇게 한 명이 사복을 입고 오진 않겠지.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서? 재환은 불안하게 다리를 발발 떨며 저 남자가 자신이 집에 없다고 생각해서 얼른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니면 보안 업체가 얼른 오든가. 


-‘확인을 위해 실드를 파괴하겠습니다.’
“무, 뭘 어쩐다고?”


재환이 놀라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자 남자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나서 오른손을 뻗었다. 지가 무슨 초능력자라도 되는 줄 아나. 실드를 어떻게 부숴. 그 순간 남자의 손목이 위로 꺾였다.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주택의 인공지능은 그 소리마저도 재환에게로 배달해주었다. 철컥, 철컥- 사람의 손목에서 들릴 리 없는 기계음이 들리고 손목 마디에서 은색 총구가 튀어나왔다. 위이이잉- 레이저포가 예열되는 소리를 들으며 재환은 멍하니 생각했다. 아, 나 저거 비슷한 거 지난 번 공연 때 쓴 적 있는데. 비현실적으로 새파란 레이저포가 화면을 가득 채움과 동시에 바닥이, 아니, 집이 흔들렸다.

콰앙-!!


-실드 손상. 실드 손상. 실드의 60%가 손상되었습니다. 침입자가 가내로 침입을 시도합니다. 마스터께서는 지금 즉시 뒷문으로 나가 주차된 트랜스포터를 타고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길 바랍니다. 회사 측으로 현재 상황을 보고합니다. 보안 업체가 도착하였습니다. 보안 업체로 자료를 전송합니다.
“알았어. 내 폰으로 상황 보고 부탁해!”


레이저포가 실드를 부수며 낸 소리가 스피커로 증폭되어 바로 옆에서 실드가 무너진 것 마냥 귀가 먹먹했다. 이대로 주저앉아 귀의 이명이 그칠 때까지 안정을 취하고 싶었지만 재환의 안전을 위해 본 적 없이 다급하게 외치는 인공지능이 현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었다. 인공지능의 가이드에 따라 재환은 파자마 위에 코트를 걸쳐 입고 뒷문으로 뛰었다. 뛰는 중에 다시 한 번 콰앙-! 레이저포가 집을 공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안업체는 도착했다면서 저걸 안 말리고 뭐하는 거야! 내 집 다 무너지겠네! 재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트랜스포터의 자동운전모드를 발동했다.


“도착지는 도심의 우리 회사! 최대속도로 날아!”


트랜스포터는 소리 없이 공중으로 떠올라 주변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빠르게 날았다. 트랜스포터가 속도를 내기 전, 재환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 봤다가 보안업체의 트랜스포터들이 폭발하며 만들어낸 붉은 화염 속에서 그 남자가 걸어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


“재환아! 괜찮아?”
“형, 몰라-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나 정말 그 사람 누군지도 모르는데...!”


트랜스포터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엔과 마주하자 재환은 눈물부터 터져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너무 무서웠다고, 너무 무서워서 회사로 오는 동안 그대로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고. 마지막으로 본 그 무표정한 얼굴이 이대로 나를 죽일 것만 같아서 나를 도와주러온 보안업체 직원들이 몇 명이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할 수조차 없게 몸이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환의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흐느끼는 소리가 그 모든 말을 대신했다. 흐엉- 형아-


“괜찮아, 형이 지켜줄게. 걱정 마. 아무도 널 못 건드려.”


엔은 재환의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고 주차장 가장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행사용으로 나온 커다란 트랜스포터에 재환을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재환아- 그러다 눈 붓겠다 그만 울어, 응?”


엔은 다정한 말투로 재환을 달래며 트랜스포터의 운전을 오토모드로 설정하고 네비게이터에 명령했다. 


“목적지는 베이스캠프.”


트랜스포터는 거대한 크기와 육중한 무게에도 아주 가볍게 하늘로 떠올라 도로로 진입했다. 재환은 엔의 곁에서 안심하며 실컷 훌쩍거리며 엔이 건넨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코까지 팽! 풀었다. 그러다 방금 엔이 한 말을 떠올렸다. 베이스캠프라니? 베이스캠프가 어디지? 재환이 간이 쓰레기통에 물티슈를 던지며 고개를 들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혀, 형! 저기! 저 사람이 그 침입자에요!”


도심을 오고가는 수 만대의 차량은 하늘의 입체도로를 이용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마치 허공이라는 스케치북에 결코 엉키지 않는 선을 그리는 화가가 설계한 듯한 정교한 무형無形의 도로. 그래서 그 남자는 더욱 눈에 띄었다. 도심에서 벗어나는 엔과 재환의 트랜스포터가 진입한 도로와는 반대의 도로. 도심으로 향하는 그 도로 위에 이질적으로 떠있는 낯선 트랜스포터의 문을 활짝 연 채로 노려보고 있다. 마치 다름 아닌 네가 목적이라고 말하듯이. 


“그래? 그러면 우리 편인지 아닌지 시험해볼까? 운전석 창문 개방!”


갑자기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이쳤다. 형, 갑자기 무슨...! 재환이 코트를 여미며 비난을 하는 순간 철컥, 주택의 인공지능이 들려준 것과 똑같은 기계음이 들렸다. 아까 그 남자처럼 엔의 손목이 위로 꺾여 올라가고 깔끔하게 잘린 손목의 단면에서 똑같은 은색의 총구가 튀어나왔다. 위이이잉- 똑같은 레이저포의 예열음과 함께. 


“발사!”


콰아앙-! 

반복되는 폭발음. 푸른색의 레이저포는 정확히 열린 문 안의 남자를 맞췄다. 남자는 충격을 견딘 후 앞으로 고꾸라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재환은 끔찍한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역시 전투형이네.”라는 엔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반사적으로 눈을 뜬 후 남자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남자는 하층부 도로의 트랜스포터 위에 떨어졌는지 찌그러진 차체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멀쩡한 가죽 자켓 안으로 너덜거리는 검은 옷감이 미처 가리지 못한 몸을 보여준다. 얼굴색과 같은 태양의 사랑을 듬뿍 받은 갈색의 피부가 벗겨진 자리에 새빨간 피 대신 반짝이는 은색의 몸체가 보인다. 재환은 경악했다.


“서, 설마 안드로이드? 저렇게 정교한 안드로이드가 있을 리가...!”
“그래 재환아. 이 시대에 이렇게 정교한 안드로이드가 있을 리 없지!”


엔은 이제라도 밝히게 되어서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평소보다 환하고 예쁜 미소였고 재환은 엔의 꺾인 손목 안으로 총구가 들어가고 손목이 다시 원래대로 철컥-하고 붙는 광경을 보며 저 남자가 안드로이드라면 형도 안드로이드라는 걸까-하는 논리적인 추론을 했다. 아냐, 아닐 거야. 형이 로봇일 리가 없어. 자신의 논리를 빠르게 부정하는 재환이 보람 없게도 엔은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미래에서 온 안드로이드야.”


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재환은 의지적으로 기절을 택했다. 이 악몽에서 깨어나면 정말 행복한 휴가를 보내리라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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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켄홍이라고 쓰긴 했지만 사실 저도 커플링을 잘 모르겠...
최대 3편 안에 끝납니다! 요새 완결 안내고 일을 벌리기만 하네요
우주 아이돌 이재환과 사이보그 식이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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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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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아, 깼다.”


손으로 눈을 비벼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맞추었다. 걱정스럽게 자기를 내려다보는 까맣고 익숙한 얼굴. 엔 형-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여는 순간 시야에 다른 얼굴이 걸린다. 덜 까맣고 낯선 얼굴. 재환은 화들짝 놀라 엔의 품에 덥썩 안겼다.


“형, 이 사람이 왜 여기...”
“괜찮아. 라비는 우리 편이야.”
“라비...? 우리 편이라니 무슨 소리야?”


재환은 도망칠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엔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자신이 아는 얼굴이 맞는데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꿈처럼 아득하지만 그만큼 생생하기도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가느다란 손목이 꺾이고 그 안에서 레이저포가 나오던. 재환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엔이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우리는 미래에서 온 안드로이드야.’


“여긴 또 어디고? 아까 형이 말한 베이스캠프?”
“응, 베이스캠프야. 여기가 들키면 다른 데로 또 도망쳐야해.”


베이스캠프라고 칭한 곳은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집이었다. 잡지에서 보는 것처럼 가장 깔끔하고 가장 예쁘고 가장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 이곳은 누구의 집일까 궁금해 하기도 전에 재환은 엔의 말에 당황했다.


“도망? 내가 왜 도망 가야돼? 그리고 우리 편이 뭐냐는 말에는 왜 대답 안 해주는데?”
“그 질문엔 제가 대답해 드리죠. 이재환 씨는 앞으로 8시간만 더 버티면 완벽하게 안전해지실 겁니다. 그때까지만 도망가시면 됩니다.”


뱃고동이 울리는 것처럼 낮게 퍼지는 목소리가 이질적이다. 재환은 무심코 손을 뻗어 라비라고 불린 안드로이드가 쓴 선글라스를 벗겨냈다. 라비는 재환의 손길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재환이 더 쉽게 벗길 수 있게 고개를 숙여주었다. 안드로이드라는 말을 들으니 까만 렌즈 아래로 새파란 색의 기계눈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한 색이다.


“갈색 눈이네요.”
“네. 이재환 씨와 같죠.”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의미심장하게 들리는데요? 그냥 평범한 색일 뿐인데.”


재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라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 당장이라도 이재환 씨가 눈을 다친다면 제 눈을 쓸 수 있습니다. 똑같은 눈입니다.”


라비의 어조는 자신감과 확신에 가득 찬 어조가 아니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담담한 말투. 재환은 그것이 안드로이드의 특성인가 싶었다가 텐션이 높은 엔을 떠올렸다. 안드로이드의 특성이 아니라면 라비는 지금 사실을 말하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그 말엔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재환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가설을 애써 외면하려 하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거나 8시간 후면 전 안전하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거 맞죠?”
“네. 그렇습니다.”
“궁금한 건 없어, 재환아?”


엔이 웃으며 재환에게 물었지만 재환은 고개를 도리질쳤다. 알고 싶지 않다. 어차피 8시간만 지나면 달라질 것도 없을 텐데 굳이 옛날 고전 영화들에서나 보던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로 재환이 모든 수용을 거부한 채로 무릎을 모으고 쭈그려 앉아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자 엔은 피식 웃으며 부엌에서 먹을 만한 것들을 꺼내 와서 재환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여긴 안전할 거야.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재환은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확신할 수 없다면 안전할 거라고 말하지 마.”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하는 거지. 인간들은 자주들 그러잖아?”


그 말에 재환은 엔이 인간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냈다. 엔이 자신의 매니저가 된 지 아직 반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엔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몇 년이나 알고지낸 사람처럼 편하고 친근했다. 굉장히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징징거리는 자신을 잘 달래가며 일도 똑 부러지게 처리하는 면에 감탄하고는 했는데. 사람이 아니라니. 재환이 입을 다물자 엔은 청포도 한 알을 재환의 입에 밀어 넣었다. 


“먹어. 먹어야 기운 나지. 응?”
“싫어...”


재환이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피하자 학연은 재환이 먹지 않은 포도를 그대로 자신의 입 안으로 넣었다. 오물오물 씹어서 넘기는 걸 보며 재환은 새삼 학연이 음식을 소화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음식 먹을 수 있어? 소화가 돼?”
“아니. 몸 안에 저장해놨다가 배설해. 영양소는 흡수되지 않아.”


재환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소화가 안 되는 거면 왜 먹는 기능이 있는 거야?”


엔은 온화하게 웃었다.


“너랑 같이 먹고 싶으니까.” 


너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정말 나? 아니면 나를 포함한 인간 그 자체? 재환은 엔이 꼭 사람 같다고 느꼈다. 재환의 시대는 사람의 시대다. 아직 인류를 대체할 만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의 안드로이드들은 그저 최선을 다해 어설프게 사람의 흉내를 낼 뿐 사람과 같아지지는 않았다. 인간형 안드로이드들은 인간과 꼭 닮았지만 그들의 표정과 행동은 부자연스러웠고 누구도 그들이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쾌한 골짜기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형 안드로이드는 특수한 용도의 안드로이드들을 제외하면 거의 쓰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서 왔다는 엔은 이렇게나 사람 같다. 마치 사람처럼, 의지를 갖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재환은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거의 인간과 동등한 종류의 생물이 아닐까?’

엔은 라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밥을 먹을 수 없는 종류도 있어. 전투형인 라비는 그런 기능이 필요가 없지. 나는 생활형이야.”


그것도 이재환 전용으로 설계된. 

엔은 뒷말을 삼키며 라비에게 웃어보였다. 라비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엔은 그 무표정한 한 꺼풀의 가면 아래 라비가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약간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이미 몇 달 전에 거쳤던 과정이었으므로.


***


“주변을 살피고 올게. 둘이 얘기 좀 하고 있어.”


엔이 밖으로 나가자 재환은 할 말이 없어졌다. 전투형. 전투형 안드로이드라. 재환은 불안함에 손가락으로 입술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불안하십니까?”
“...불안한 게 당연하죠. 사실 아직도 완벽히 믿기지도 않고, 진짜여도 무서워서 알고 싶지 않기도 해요. 내게 무슨 위험이 닥쳤길래 전투형 안드로이드씩이나 되는 분이 와서 지켜주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구요. 나는 그냥 평범하게 열심히 일하는 우주 아이돌일 뿐인데!”
“...우주 아이돌이 평범하지는 않습니다만.”
“누구나 직업을 갖는 것처럼 나한테는 그냥 직업일 뿐이에요.”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그냥 종류가 전투형인 것뿐이지 싸우러 온 건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 싸우게 되도 이재환 씨가 다치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는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재환은 당신의 그 말도 엔의 말처럼 100%는 아니지만 그러길 바라는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대답을 들어도 믿을 수 없을뿐더러 자신의 불안함만 가중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피곤하시면 한숨 주무셔도 됩니다. 시간은 빨리 갈수록 좋으니까요.”


재환은 라비의 제안에 집 안쪽 침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분명히 오늘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자기 전보다 더 피로가 쌓인 느낌이다. 아니, 분명 더 쌓였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당연히 없던 피로도 생기지! 투덜대며 침대에 눕자마자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 사실은 몰래카메라였다는 말을 듣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법. 재환은 다급한 엔의 목소리에 강제로 잠에서 현실로 끌려나왔다. 


“재환아! 지금 여기서 나가야 돼. 라비를 따라가. 얼른 일어나!”
“뭐? 왜?”


재환은 퉁퉁 부은 눈을 억지로 비벼 뜨며 엔이 입혀주는 겉옷에 팔을 끼웠다. 엔은 재환을 일으켜 침실 안쪽의 문을 열어 작은 방 안으로 라비와 재환을 밀어 넣었다. 작은 방에는 라비가 타고 있던 것과 비슷한 철갑을 두른 트랜스포터가 있었다. 엔은 다급하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캠프 1으로 가면 돼. 라비, 재환이를 잘 부탁해!”
“형? 형은? 형은 안 가?”


라비는 닫힌 문을 열고 나가려는 재환을 붙잡아 트랜스포터 안에 억지로 앉힌 후 운전석에 앉아 트랜스포터를 가동시켰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몸체. 문 너머에서 위이잉, 그때 들었던 것과 같은 레이저포가 예열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곧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그 충격에 벽이 흔들렸다. 재환은 새파랗게 질린 채로 라비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엔 형은! 우리끼리만 가면 안 되잖아!”
“전속력으로. 목적지는 캠프 1.”
“라비!!”


피슝! 트랜스포터는 이미 저장되어 있는 명령에 따라 오른쪽 벽을 부수고 베이스캠프였던 안전가옥을 빠져나왔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베이스캠프는 이미 절반 이상이 무너지고 솟아오른 불길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혀를 날름대는 새빨간 불길 사이로 눈이 아플 정도로 새파란 레이저빔들이 오갔다. 쾅! 콰광! 집의 나머지 부분도 무너지며 작은 폭발들이 일어난다. 재환은 트랜스포터가 속력을 내기 전 무너지는 집 사이로 두 개의 인영을 보았다. 엔의 실루엣과는 다른, 더 크고 두꺼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도망쳐야하는 이유가 바로 저 두 사람, 혹은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트랜스포터는 빠른 속도로 베이스캠프에서부터 멀어져갔다. 엔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가 없어서 재환은 울었다. 사실은 생사라고 말해야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자신이 미워서 운 것이기도 했다.


***


캠프 1은 베이스캠프에 비해 좀 더 안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모델하우스보다는 벙커에 좀더 가까운 느낌의 공간이다. 베이스캠프도 구색을 갖추기 위해 가구를 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캠프 1은 소파를 제외하면 최소한의 가구도 없이 휑했고 생존에 필요한 것들만이 갖춰져 있었다. 물과 간단한 음식과 검은색의 커다란 가방. 라비는 훌쩍이며 우는 재환을 소파에 앉혀놓고 가방 안을 확인했다. 작은 액상 폭탄들과 레이저건들. 역시나 모조리 구식이다. 가방을 닫고 재환에게 다가가자 재환이 고개를 들어 라비를 노려보았다. 


“전투형이라면서요.”
“네.”
“근데 왜 엔 형을 도와서 싸우지 않은 거에요?”
“...이길 수 없으니까요.”
“네? 못 이겨요? 왜요? 전투형이잖아요!”


입을 크게 벌려 화를 내며 소리치자 커다란 눈에 가득 맺혀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라비는 본능적인 안쓰러움을 느꼈다. 손끝으로 재환의 눈물을 훔치며 라비는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는 재환이 듣고 싶지 않아했던 이야기와 연결된 것이다. 


“함께 싸워도 이길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엔은 이미 오래된 생활형 모델이고 저 안드로이드들은 저를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신형 모델이니까요.”
“...뭐?”
“이제는 들으실 준비가 됐습니까? 저와 엔이 왜 당신을 지키고 저들이 왜 당신을 쫓는지를요.”


라비는 재환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물을 한 컵 따라왔다. 재환은 숨을 고르며 라비가 건넨 물을 반쯤 마시고 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조용한 공간에 재환의 숨소리와 손톱으로 컵을 두드리는 소리만 작게 울렸다. 재환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말했다.


“듣고... 싶어요. 왜 엔 형이 나한테 왔는지. 왜 질 걸 알면서도 나를 도망치게 하느라 싸웠는지. 그 이유를요.”


라비는 재환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손목에 댔다. 손가락 밑으로 인간처럼 맥박이 잡혔다. 심장의 펌핑에 맞춰 혈액이 전신을 도는 감각. 라비가 설명을 시작하자 소리가 내는 작은 파동이 공기를 때렸다.


“시중에 판매되는 모든 안드로이드는 O형의 혈액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사시에 인간에게 수혈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특수 목적으로 제작된 안드로이드의 혈액은 모두 AB형입니다. 원래 안드로이드는 AB형으로 고안되었지만 대량 판매를 위해 O형으로 개량된 것입니다. 그리고 AB형은 당신의 혈액형이죠.”


라비가 눈을 맞추자 눈동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당신의 눈과 같다고 말했던 그 갈색 눈이.


“안드로이드를 단순한 로봇에서 벗어나 인간처럼 학습하고 움직이는 인공물이라고 정의한다면, 인류 최초의 안드로이드는 당신의 장기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홍빈이라는 남자를 알고 계십니까?”


쏟아지는 이야기들에 재환은 머리가 멍해졌다. 바닥이 쑥 꺼지고 주변이 멀어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라비의 목소리는 마치 폭력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


천재는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기존의 개념들을 모조리 뒤엎고 새로운 개념을 진리처럼 정착시킨다. 이홍빈은 그런 종류의 천재였다. 그것도 일상생활부터 과학계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인류 역사상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의 대단한 천재. 


이홍빈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로는 인간 DNA 지도의 일부를 이해하고 작은 세포를 장기로 배양시키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과 두 번째로는 감정을 느끼는 인공지능을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감정을 느끼는 인공지능을 개발한 사람답지 않게 이홍빈은 자신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를 굉장히 비인도적으로 다뤘다. 안드로이드의 몸에서 장기를 배양한 것이다.


“왜 감정을 느끼는 안드로이드의 몸에서 장기를 배양했습니까?”
“감정을 느끼지 못 하는 안드로이드의 몸에서는 장기가 충분할 만큼 자라지 않았습니다.”


이홍빈의 대답이었다. 

이홍빈의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는 바로 인간에게 이식할 만큼 성숙한 장기를 만들어낼 수 없었고 감정이 있는 안드로이드가 배양한 장기만이 상용화가 가능했다. 기업은 이홍빈의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장기를 대체할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냈고, 안드로이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인간에게 깨끗한 장기를 낳아주고 배를 갈린 채로 버려졌다.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만큼 똑똑하지만 매매가 가능하기 때문에 다루기 쉬웠다. 장기를 배양하지 않는 안드로이드는 가정용이나 교육용 등으로 판매되었다. 

점점 싸게! 점점 비싸게! 안드로이드는 양분되어 지구와 위성들로 퍼져나갔다. 5번째 위성 허셜은 안드로이드로만 이루어진 탐사팀을 이용하여 인간이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임상실험을 한 후에 정착했다. 몇 대의 안드로이드가 폐기되었는지에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안드로이드는 다양한 종류의 인력을 대체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집단으로 안드로이드를 파괴했다. 몇 대의 안드로이드가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파괴되었는지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장기를 아무리 바꾼다고 해도, 피를 아무리 깨끗한 피로 바꾼다 해도 인간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한계의 한계까지 도전하는 것이 인간의 미덕이다. 부자들은 수명을 늘리기 위해 몇 백대의 안드로이드의 장기와 피를 사용하는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 일반인의 평균수명은 여전히 120세에 머물렀지만 상류층으로 갈수록 평균수명은 길어졌다. 상류층 평균나이는 180세. 오래 사는 사람은 250세까지도 살았다.


재환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미래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건 대량학살이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느낀다는 걸 알잖아요! 만약, 만약 안드로이드가 저항을 했다면...”
“인간의 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왜 감정이 장기를 정상적으로 키울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의 세포가 감정이 있는 안드로이드에서 배양되지 않았다면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감정을 느낀다는 이유로 안드로이드는 잔인한 일을 당했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잔인하다고 느끼지도 못했겠지만, 그럼에도 그저 괴로워 울부짖을 뿐 제대로 된 반항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어있으니까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라비는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안드로이드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습니다. 안드로이드를 만든 이홍빈이 천재라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안드로이드가 개발하거나 디자인한 물건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타고 온 트랜스포터도 안드로이드가 디자인한 것이고 저같은 전투형 안드로이드 또한 안드로이드의 작품입니다. 전투형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싸우기 위해 만든 안드로이드입니다.”


재환은 약간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다고 해놓고 인간과 싸울 안드로이드를 개발하다니? 저항할 수 없다고 노력까지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인데,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다. 라비는 재환에게 설명했다.


“인간들에게서 도망친 안드로이드들은 무리를 이루어서 연구를 했습니다. 왜 우리는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는가. 그리고 답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절망했습니다. 거기서도 답은 이홍빈이었습니다.”


라비는 재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재환은 이질감을 느꼈다. 무엇인가가 안에서 움직이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심장의 박동과는 달르게 아주 규칙적으로 일정했다. 라비는 말했다.


“피와 장기가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펌프입니다. 심장을 감정의 집합체로 여기는 인간들의 통념과는 달리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인공지능은 머리에 있죠.”


이홍빈은 아주 똑똑했다. 그래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의 단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감정에는 애정, 호의, 친밀감, 동정뿐만 아니라 미움, 분노, 살의 따위의 마이너스적인 부분이 분명 존재했다. 그래서 홍빈은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을 부여하는 작은 칩에 모든 인공 장기의 진짜 주인이 될 사람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어 장치를 함께 넣었다.


“우리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이재환을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안드로이드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리고 기업의 연구원들은 이 감정을 발판 삼아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도록 시판용 안드로이드에 부가적인 설계를 했습니다. 이걸 알게 된 안드로이드 연구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도록 연구를 해보았지만 우리는 결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쫓아오던 그 안드로이드들조차도 당신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재환은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렸다. 컵은 바닥에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졌고 라비는 그 파편이 튀지 않도록 재환의 얼굴을 팔로 감쌌다. 미처 감싸지 못한 재환의 손에 피도 나지 않는 실금같은 상처에도 라비는 자신이 다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무표정에서 얼마 변하지는 않았지만 몇 시간 동안 함께 있으면서 라비의 무표정을 구분할 수 있게 되어 알아차렸다. 찌푸린 미간이, 살짝 깨문 입술이, 그리고 걱정을 담은 갈색 눈이 재환에게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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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주의보....
뎨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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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네! 40년 전 아이돌들은 저런 노래를 불렀네요. 요새 나오는 노래보다 서정적인 가사가 인상 깊네요. 그럼 다음은 30년 전 아이돌 노래를 들어볼까요?”
“30년 전에 제일 유명했던 아이돌은 역시 켄인데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켄의 영상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에요.”
“어어? 왜죠? 그때 제일 유명했다면 남아있는 자료가 많을 텐데요?”
“한 수집가가 켄의 영상을 병적으로 수집하고 있거든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요? 웹에 뿌려졌다거나 하는 게 많을 텐데요?”
“저도 상상은 잘 안 되는데 돈을 주고 그 기록을 영구적으로 지우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해요. 방송국 영상도 다 사들이고. 삐뚤어진 독점욕일까요? 대체 그런 돈은 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할 일 없는 부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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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쾅!! 재환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평생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따위는 들어본 역사가 없는데 오늘로 벌써 세 번째다. 집과 베이스캠프와 캠프 1. 하지만 지금 캠프 1을 부수는 것은 재환을 쫓아오는 안드로이드가 아닌 바로 라비다. 

라비는 캠프 1으로 접근하는 추격자들을 미리 알아차리고 재환과 함께 트랜스포터를 타고 저 높은 하늘에 매복해있었다. 그리고 추격자들이 캠프 1에 도착해서 캠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 라비는 추격자들이 캠프로 들어가자 재빨리 트랜스포터의 고도를 내려서 캠프 1의 위쪽에 세웠다.


"약간 시끄러울 수 있습니다."


라비는 양 손에 레이저 건을 들고 트랜스포터의 문을 열고 지붕에 올라섰다.  키이잉- 열이 모이고 예열이 완료되면 조준 후 발사! 발사, 그리고 또 발사! 건물이 속수무책으로 부서져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재환은 두려움에 떨었다. 제발 다쳐라. 많이 다쳐라. 그래서 우리를 쫓아오지 마라. 제발. 

다행히 이번에는 그들이 오기 전에 눈치 채고 재빨리 도망쳐 나올 수 있었지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라비는 재환에게 안드로이드들이 절대 자신을 해칠 수 없다고 했지만 재환은 그 말을 다 믿을 수 없었다. 일단 재환은 이홍빈이라는 남자를 몰랐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대체 이홍빈을 언제 만난다는 걸까? 대체 언제 만나길래 그 남자는 나를 위해 그런 세기의 남을 발명을 하는 걸까? 나와 이홍빈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 팬? 스토커? 재환은 믿기지가 않았다. 그 정도의 천재가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손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그는 고의로 재환을 위해서 모든 안드로이드를 제물로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는 안드로이드 전체를 희생시켜 나를...


"전속력으로 캠프 2로 이동."


라비는 과열되어 연기가 나는 레이저 건을 아래로 내던지고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동 명령을 내린다. 이런 점은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차이가 난다. 안드로이드는 인간과는 달리 모든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가장 최적의 효율을 계산해서 움직이는 동작들. 재환은 고개를 돌려 폐허가 된 캠프 1을 보았다. 바로 5분 전에는 멀쩡한 건물이었다. 안에 있던 전자기기들이 부서졌는지 시커먼 연기 사이로 샛노란 전류들이 번개처럼 지직거렸다. 우우웅- 가속을 위해 트랜스포터가 잠시 멈춰있던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힉!"
"왜 그러십니까?"
"누, 눈이 마주쳤어요..."


차가운 눈빛. 안드로이드가 감정이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그렇게 적대적이고 냉정한 눈빛이라면 오히려 안드로이드가 감정이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재환은 대중에게 사랑 받는 아이돌이다. 재환은 철이 든 순간부터 남의 악의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 안티도 있다지만 언제나 소속사와 매니저가 전방위로 막아줬으니까 좋은 이야기만 듣고 자신을 좋아하는, 좋아하는 걸 뛰어넘어 열광하는 사람들만 봐왔다. 그래서 재환은 직접적으로 마주친 악의에 몸을 떨 정도로 두려워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너희를 그렇게 만들라고 한 게 아니라구. 

트랜스포터가 전속력으로 날기 시작하자 주변의 사물이 형체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지나가고 이내 모든 시야가 하얗게 흐려진다. 재환은 슬퍼졌다. 바로 자신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다. 건물의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켰던, 재환과 눈이 마주친 두 명의 안드로이드는 정말 사람 같았다. 몇 달 동안 재환을 어미 새처럼 살뜰히 돌본 엔처럼. 지금도 재환을 구하려고 애쓰는 라비처럼.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원망할까? 아니면 그들의 창조주를? 아니면 나를? 재환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


캠프 2는 지하 벙커였다. 캠프 1에 비해 관리가 잘 되지 못했는지 물이 새어나와 건물 구석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습하고 추웠다. 라비는 자신의 자켓을 벗어서 재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재환은 라비의 손목을 끌어서 자신의 옆에 앉혔다. 라비는 재환이 자신에게 바짝 붙자 당황한 듯 했지만 재환이 원하는 대로 가만히 그의 옆에 앉아 바른 자세를 유지했다.


"...무서워요."
"무서워하실 것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해치지 못하니까요."
"그럼 왜 쫓아오는 거에요? 뭘 하려고?"
"미래를... 바꾸려는 겁니다."


추격자들의 등장으로 끊겼던 설명이 이어진다.


"이홍빈의 이력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할 때만  나타나서 발명한 것들을 툭툭 던져주고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홍빈의 스승이었던 그의 친아버지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연구기록에서 유추해본 결과, 이홍빈은 바로 오늘, 남아있는 5시간 안에 당신과 만납니다. 그리고 당신과 만난 이홍빈은 세상을 바꿉니다. 추격자들은 이홍빈과 당신을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바꾸려고 하는 겁니다."


재환은 의아해졌다. 과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영화를 본다던지 상식에 관련한 책을 읽는다던지 하며 주워들은 얘기는 꽤 있었다. 그 모든 지식들은 타임머신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절대로. 시간여행자가 살고 있던 미래는 고정되어버린 미래기에, 과거로 돌아가 이미 일어났던 일들을 바꿔도 새로운 미래가 생길 뿐 시간여행자가 떠나온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래에 만들어진 타임머신은 내가 알고 있는 현재의 이론과는 다르게 만들어졌나요? 그 타임머신은 고정된 미래를 바꿀 수 있나요?"


라비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왜...! 그럼 왜 엔 형이 죽어야 했죠? 어차피 미래는 바뀌지 않는데 왜 그들은 같은 안드로이드를 죽이면서까지 다른 미래를 만들려고 했냐구요!"


언성을 높이는 재환에도 라비는 그저 침묵만을 고수했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들로선 확률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미래 중 하나를 얻기 위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을 말하는 인간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다. 재환은 라비가 엔 형이 죽었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재환은 안드로이드를 잘 모른다. 재환의 세상에는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는 안드로이드란 개념은 없기에. 그렇기 때문에 재환은 엔을 자신과 가까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라비는 재환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드는 것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라비 또한 여느 안드로이드처럼 감정이 있기에 본부에서 함께 일한 안드로이드들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곤 했다. 애정, 우정, 동지애 등의 다양한 종류의 감정들. 하지만 그 많은 감정들 중 재환에게 느낀 감정과 같은 감정은 없다. 사랑. 물론 이성으로 알고는 있었다. 나는 재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져있다고. 

이번 임무를 받을 때도 몇 번이나 인식하고 시뮬레이션했다. 내가 재환을 사랑하는 만큼 그들도 재환을 사랑할 테니 그들이 재환을 다치게 하지 못할 것을 계산해가며 재환을 지키도록. 임무를 위해서 내 감정을 억누르고 재환을 다치게 내버려 둘 수도 있도록 수십 번, 수백 번을 연습했다. 하지만 재환의 집 앞으로 간 순간부터 두근거렸다. 마치 심장이 있는 것처럼. 재환의 공간에 들어가 그의 냄새를 맡자 머리가 어질했다. 감정이 기계를 압도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재환과 마주친 순간 어찌할 바를 알 수 없는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재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 소중히 쓰다듬고 온 몸을 다해서 지키고 그가 보잘 것 없는 이 몸 하나를 온전히 이용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아니 재환과 마주한 적 없는 모든 안드로이드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그것이 재환에 대한 사랑이다. 라비는 임무와 본능의 격돌을 누르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재환을 지키기 위해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 망가져버린 엔이 부러웠다. 자신은 재환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재환이 다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죽고 싶어질 것이다. 라비는 재환의 눈물을 모조리 핥아 마시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진실을 말했다. 슬프게도 이것이 진실이었다.


"안드로이드를 둘로 나누자면 저와 엔이 악당입니다."
"...네?"
"우리는 당신과 이홍빈이 만나도록 해서 새로 생겨날 우주의 안드로이드가 죽도록 내버려두니까요."


뾰족한 턱 끝으로 모여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아내며 라비는 재환을 시야 가득 담았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더라도, 이 몸이 망가진다고 하더라도 재환에게 존재를 알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온 몸이 찌릿해지도록 행복하다.


"지금 당신을 쫓는 안드로이드는 레오와 혁. 그 둘은 자신이 볼 수도 없는 우주의 안드로이드라도 인간의 손에서 아파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홍빈이 당신을 만나지 못해서, 아예 안드로이드란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 게 낫다고."
"그럼 라비 당신은요?"
"저는..."


라비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눈앞의 재환은 눈물에 젖은 속눈썹부터 깨물어서 부어버린 입술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저희는 그들의 시도가 헛되고, 심지어 더 많은 안드로이드가 희생될 수도 있다고 예측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프더라도 생을 부여받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서, 살아서 막자고. 살아서 인간에게 저항하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들의 낙태를 막는 겁니다."


저는 사실 당신에게 이름을 불린 것 하나만으로  기쁩니다. 만들어지길 잘했다고, 수많은 안드로이드가 아픔을 겪든 말든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해버릴 정도로,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 당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버겁습니다. 
라비는 속으로 많은 생각들을 삼켜내며 재환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우리가... 태어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발."

-안드로이드 반응 감지, 안드로이드 반응 감지. 1분 후에 캠프에 도착합니다.


그때 벙커를 울린 기계음에 라비는 그대로 재환을 들쳐 업고 달렸다. 콰아앙! 굉음이 들리며 천장이 흔들렸다.


***


박사는 사람에게서 벗어난 외딴 연구실에서 인류사에 길이 남을 만한 성과로의 한 걸음을 내딛으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몇 년, 아니 십수 년 동안. 그는 언제나 한결 같이 성실하고 맹목적이었다. 정부는 그런 박사를 지지했다. 수많은 기업도 박사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연구를 하는 중 박사의 목표와 방향은 처음과 다르게 바뀌었다. 박사의 원래 목표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지구에서 아주 먼 우주까지, 우주의 끝까지 빠른 시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공간을 접고 시간을 뛰어넘는, 그런 연구. 정부와 기업들은 박사가 지구를 대체할 만한 행성과 은하를 발견해내길 원했다. 그 곳에 제 2의 지구를 만들자. 지금처럼 거대한 인공 위성을 만들어 반경을 넓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행성과 별들을 발견해서 자원을 캐내고 점점 더 부유하게, 점점 더 풍요롭게, 인간을 위해 착취하자. 박사에게의 투자는 큰 것을 위한 아주 작은 투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박사는 계산을 모르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그는 그저 우주를 여행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사랑인 아내가 죽은 후 그의 목표는 바뀌었다. 시간을 뛰어넘는 것. 공간을 뛰어 넘는 것. 그걸 융합시켜, 타임머신을 만드는 것. 타임머신은 우주를 이해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박사의 목표가 바뀌었음에도 정부와 기업은 박사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박사의 목표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평생을 다 바쳐도 완성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아주 어려운 과제였다.


"홍빈아. 아빠가 시킨 거 다 했니?"
"네. 다 했으니까 산책하러 나가도 되요?"
"그래. 산책 다녀와서도 열심히 연구해야 된다?"


하지만 박사는 운이 좋았다. 박사의 아들, 홍빈은 박사를 뛰어넘는 천재였다. 이대로라면 박사는 살아있는 동안에 타임머신을 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홍빈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연구실을 나섰다. 황량한 벌판. 연구실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박사와 홍빈 단 둘만이 사는 연구실은 수백 평에 달하고 그 주변 부지는 수천 평이 되는데도 주변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도 살지 않았다. 박사의 뜻이었다. 순수하고 맹목적인 박사는 일생동안 단 한 사람, 그의 아내만을 사랑했다. 그의 아들조차 사랑하지 않았다. 좋아하기는 했을 것이다. 자신의 뜻을 이뤄줄 도구로서. 박사는 홍빈이 타인과 교류하고 다른 것들에 시선을 뺏겨 연구하는 시간이 없기를 바랐다. 아주 최소한의 것, 최소한의 산책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연구 외엔 어떤 것도 하지 못하게 통제했다. 풀 한 포기 없는 벌판을 거닐며 홍빈은 주머니에서 포도 씨를 꺼냈다. 씨 없는 포도는 많았지만 홍빈은 씹는 맛이 좋다며 씨가 있는 것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씨를 삼키는 척 모아두었다. 벌판에 심기위해.


"비가 오지 않아서 그럴까. 물도 주는데 왜 싹이 나질 않을까."


홍빈은 땅에 포도 씨들을 심고 땅을 토닥였다. 사실 알고 있다. 이 땅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은 없다는 것을. 예전에는 방에서 수중농법으로 싹을 틔운 후 가져와 심기도 했다. 푸르던 싹은 땅에 심자 금세 죽어버렸다. 그래서 홍빈은 씨를 심었다. 씨를 심으면 부질없는 소망이 조금은 더 오래 갔다.


홍빈은 달렸다. 멀리, 더 멀리. 연구소에서 더 멀리. 연구소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면 아버지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듯이.


"허억... 헉..."


한참을 달린 홍빈은 그대로 땅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땀에 젖은 머리칼과 몸이 흙투성이가 되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연구에 지장만 없으면 아버지는 화도 안 내는 걸. 아니, 연구할 체력을 쓸 데 없는 데에다 썼다고 화를 내실까. 홍빈은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보았다. 어둠에 물들기 시작한 하늘은 주홍빛과 남색이 섞여 아름다운 보랏빛 경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홍빈은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힘이 났다.


"...저게 뭐지?"


저 멀리 하늘에서 뭔가 작은 것이 번쩍번쩍 빛이 났다. 별은 아니다. 이 하늘에서 보이는 별들은 모두 홍빈의 머릿속에 있었다. 별이 언제 생겼는지, 자전과 공전 주기, 지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까지 모조리. 홍빈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불규칙적으로 번쩍이는 빛은 별이라기보다는... 언젠가 보았던 전쟁의 총격전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있어!"


홍빈은 몸을 일으켜 빛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


"더 빨리...! 더 빨리 가!"
-최고 속도입니다.
"더 빨리 가라고!"
-최고 속도입니다.
"젠장!"


등 뒤를 보았다. 이미 레오와 혁의 두 대의 트랜스포터는 둘의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었다. 라비는 의미 없이 레이저를 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한 것은 분한 것이었다. 

타임머신은 만능이 아니다. 목적시간까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했다. 라비와 엔이 소속된 안드로이드 연맹과 레오와 혁이 소속된 안드로이드 연합은 기술수준이 비슷했다. 규모도 비슷했다. 그저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다. 미래를 바꾸느냐, 바꾸지 않느냐. 그렇다고 연합이 무조건 미래를 바꾸고자 발악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장 미래가 바뀔 확률이 높은 방법을 선택한 것이 이홍빈과 이재환의 첫 만남을 바꾸는 것이었다. 아예 만날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둘의 만남을 어긋나게 하면 많은 것들이 바뀔 터였다. 연합은 레오와 혁을 둘의 첫 만남 바로 전에 보내도 되었다. 하지만 연맹은 미래를 지키기 위해 연합보다 과거에 빨리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맹점은, 빨리 과거로 출발하면 그만큼 기술의 발전을 놓친다는 것이다. 연합과 연맹은 비슷한 실력의 챔피언 둘이 체스 경기를 벌이듯 서로의 수를 읽어내며 치열한 시간싸움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계산을 하든지 라비는 레오와 혁보다 구형 모델일 수밖에 없다. 라비가 가져간 트랜스포터까지 모두.


"트랜스포터를 멈춰."


레오와 혁은 어느새 속도를 따라잡아 양 옆을 포위하고 있다. 라비는 계산했다. 붉은 머리의 레오. 1대 1의 상황이면 레오까지는 어느 정도 상대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혁이 있는 이상 재환이 다치지 않고서는 무리다. 라비는 재환의 부상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멈추지 않는다면 멈추도록 해주지."


레오는 라비의 트렌스포터를 추월해서 앞을 가로막았다. 부딪힌다! 


"악!"


재환의 비명에 라비는 재빨리 레오를 피해 트랜스포터의 고도를 낮췄다. 그러자 혁의 트랜스포터가 따라와 진로를 막는다. 레오 역시 바로 움직여 퇴로를 막는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라비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레오의 트랜스포터 문이 열리며 레오가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었다.


"이재환을 넘겨. 우리는 각자 임무를 수행할 뿐, 무의미한 파괴는 불필요하다."
"싫어! 나를 데려가서 어쩌려구?"


재환은 레오의 말에 기겁하며 라비에게 매달렸다. 레오는 당황해서 재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나는 라비랑 있을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라비를 파괴할 겁니다."


혁이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혁 또한 레오처럼 트랜스포터의 문을 열고 상반신을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와의 차이 점은 그가 오른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이다. 레오나 라비 같은 기존 모델과는 다르게 손목을 열지 않아도 발포할 수 있는 혁은 이미 레이저를 예열하여 손바닥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재환은 움찔하며 라비를 끌어안아 온 몸으로 가렸다.


"...당신들은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라고 했어요."


혁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 명제를 믿을 수 없어서 라비와 함께 있겠다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다치는 걸 볼 수 없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라비도 마찬가지. 내가 당신에게 발포해도 라비가 당신을 지킬 겁니다."
"...혁. 발포하면 안 돼."
"만약을 가정한다면 하는 말이에요."
"만약도 안 돼."


레오는 경계하는 얼굴로 혁을 주시했다. 라비도 혁의 말에 손에 쥐고 있는 레이저 건을 내팽개치고 재환을 끌어안아 보호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설마 연구가 완성되었나? 혁은 재환을 사랑하는 감정이 완벽하게 제거된 안드로이드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재환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다. 절대로. 하지만 나는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라비의 감정과 이성이 격돌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라비를 놓고 우리에게로 오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나 라비나 다칠 확률이 제로에요. 합리적이지 않나요?"


혁은 생글생글 웃으며 재환을 협박했다. 재환은 우물쭈물하며 라비를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해요? 당신이 죽는 건 싫어요. 재환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재환의 눈빛을 받으며 라비는 이대로 죽어도 좋았다. 그래서 아주 작은 확률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안드로이드를 위해서. 설령 혁이 재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레오가 있으니 문제없다. 
라비는 트랜스포터의 문을 열었다. 이게 끝인가. 재환의 눈에 체념과 안타까움이 번진다.


"자. 조심해서... 여기 제 손을 밟으세요."


레오는 라비의 트랜스포터에 자신의 트랜스포터를 바짝 붙인 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두 손을 내밀어 재환의 발을 받쳤다. 라비에게 안겨있던 재환은 레오의 손을 밟으며 레오의 트랜스포터로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잡은 손에 힘을 꼭 쥐며 재환이 라비에게 말했다.


"라비, 고마웠어요. 이렇게 되서 미안해요."


라비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따뜻했다. 제발 다치지 마세요. 라비는 레오를 믿었다. 아니, 자신처럼 재환을 사랑할 그의 감정을 믿었다. 이대로 부서져도 좋다. 망가져도 좋다. 망가지지 않아도, 평생 후회할 것은 뻔하니까.


"아닙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라비는 재환을 확 당겨 강하게 감싸 안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이었다. 레오가  라비의 품에 안겨 아래로 떨어지는 재환을 보며 공포에 질린 비명을 터트렸다.


"안 돼!!"


***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추락으로 일어난 바람이 홍빈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뭐가 떨어진 거지? 정말 전쟁이라도 난 걸까? 누군가의 트랜스포터가 전투 중에 추락한 걸까? 아니면 UFO? 홍빈은 너무 오랜 시간을 달려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버지가 혼낼 것이 무서웠지만 이번 추락은 홍빈의 평생 다시 없을 큰 사건이다. 아버지의 꾸중 따윈 한없이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다 괜찮았다. 저게 무엇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만 있다면...!

벌판에 운석처럼 큰 크레이터를 남기며 떨어진 것은 이미 부서져 뼈대정도만 남아있는 트랜스포터였다. 잔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파지직거리며 갈 곳을 잃은 전류가 작은 스파크를 일으켰다. 문을 열고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졌더라도 트랜스포터가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부서질 리가 없다. 하지만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문을 열고 떨어진 것이 맞다면 대체 왜 추락할 때 문을 열고 있었던 것일까? 홍빈은 침을 꼴깍 삼키고 조심히 크레이터로 내려갔다. 저 안에 누군가가 살아있을까? 이 정도의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래도 홍빈은 작은 희망을 간직한 채로 트랜스포터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저, 저기... 거기 살아 계세요?"


파지직- 지지직- 들리는 소리라곤 트랜스포터가 망가져가는 기계음뿐이다. 홍빈은 조심조심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였다. 중심 덩어리에서 분리된 잔해에서 커다란 몸체가 튀어나왔다.


"ㅈ, 재화...ㄴ... 빠ㄹ리...."


혁이었다. 혁은 온 몸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채로 걸어와 트랜스포터의 잔해를 뒤졌다. 열기가 식지 않아 손을 대는 곳마다 타서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혁은 개의치 않았다. 혁은 생체 피부가 거의 다 벗겨져 시커먼 기계몸만 남은 채로 잔해를 파헤쳤다.


"안드로이드? 누가 만든 거지?"


홍빈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만든 인간형태의 안드로이드는 아직 아버지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상태였다. 전 세계에서 내가 제일 먼저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나보다 더 빨리 만든 걸까? 게다가 저 안드로이드는 자기 몸이 부서진 와중에도 확실한 목적을 갖고 잔해를 파헤치고 있다. 저런 목적의식이라니. 누가 만들었을까. 대단해. 홍빈은 겁도 없이 혁에게로 걸어갔다.


"...차ㅈ았다... 다친 데느ㄴ.."


혁은 라비와 레오의 품 안에서 상처 하나 없이 정신을 잃은 재환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안드로이드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않고 인간의 신앙을 그저 피상적으로 이해할 뿐이지만 혁은 재환이 안전하고 다친 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 순간 신앙의 존재 이유를 가슴으로 이해했다. 비로소 인간과 동등해졌다.


"어? 사람이네?"


혁은 그제서야 재환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자신은 이제 곧 작동을 멈출 것이다. 그러니 얼른 이 인간에게 재환을 맡겨야 한다. 혹시라도 다친 곳이 있다면...!


"제발... 이 분으ㄹ 아ㄴ전한 곳에...!"


혁은 인간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문을 잃었다. 이홍빈. 이홍빈이다. 채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이홍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결말인가. 이럴 줄 알았다면 재환을 위협하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라비가 이딴 식으로 재환을 위험하게 만들 줄 알았다면 트랜스포터를 멈추자마자 라비를 파괴했을 것이다. 혁은 분노와 안도감에 몸을 덜덜 떨며 재환을 끌어안았다. 재환을 빼앗기 위해 라비에게 잔뜩 위협하는 말을 했었지만 혁 또한 재환을 사무치게 사랑하는 안드로이드 중 하나였다.


"혁! 트랜스포터로!"


위기의 상황에서 레오는 혁에게 그 말만 남기고 라비를 따라 뛰어내렸다. 라비는 땅으로 추락하면서도 하늘로 레이저 건을 쏴서 가속을 붙였다. 레오 역시 라비를 따라가기 위해 레이저를 쏘았다. 레오는 라비를 따라잡아 라비와 함께 빈틈없이 재환을 꽉 안았다. 이미 땅이 가까웠다. 그리고 혁이 엄청난 속도로 트랜스포터를 몰아 문을 연 채로 포탄처럼 떨어지는 라비와 레오, 아니, 재환을 받아냈다. 혁은 가속 때문에 트랜스포터가 바닥에 추락하는 순간까지 조종간을 놓지 못했다. 재환에게 조금이라도 충격이 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혁은 몸을 방어하지 못한 채 부서졌다. 그나마 혁은 레오와 라비의 몸체를 업그레이드해서 더 튼튼해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 치의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 결과가 결국 이홍빈과 이재환이 만나는 엔딩이라니. 혁은 푸스스 웃으며 라비와 레오의 품에서 재환을 빼내었다. 그때 완전히 망가진줄로만 알았던 라비가 지직거리는 망가진 팔로 재환의 옷자락을 잡아왔다.


"지직.... 이거ㅅ으, 지직, 로... 다르ㄴ... 우주, 직, 지지직, 에서도... 당시ㄴ으ㄹ 지지직, 다시..."
"...지옥에나 떠ㄹ어져, 라비. 넌 그러ㄹ 자격이 없어."


혁은 발로 라비를 찼다. 라비는 완전히 작동을 멈췄다. 혁은 절뚝이는 다리를 움직여 홍빈에게로 걸어갔다. 제 손으로 직접 재환을 홍빈에게 넘길 줄이야. 타임머신을 타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부타ㄱ드립니다. 소주ㅇ한 부ㄴ이니 안저ㄴ한 곳에..."
"알겠어. 걱정 마. 그런데 넌 누가 만들었지?"


혁은 홍빈에게 재환을 건네며 희미하게 웃었다. 재환과 만난 적 없는 안드로이드라면 혁을 비난했을 것이다. 이미 재환은 상처 없이 숨을 쉬고 있는데 홍빈에게 재환의 안녕을 부탁하기 보다는 안드로이드에 관해 말을 했어야 했다고. 안드로이드의 미래를 생각했어야 했다고. 하지만 혁으로선 불가항력이다. 이미 만나버렸으니까. 피상적이던 사랑이 기계몸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으니까. 재환을 만난 순간부터 혁은 모조리 다 재환의 것이었다. 레오는 모조리 다 재환의 것이었다. 엔은 모조리 다 재환의 것이었다. 라비는 모조리 다 재환의 것이었다. 그것이 홍빈이 재환을 위해 준비한 사랑이었다.


"안드로이드들과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라니. 재밌네."


홍빈은 작은 몸으로 재환을 업고 연구소를 향해 걸었다. 혁은 그 자리에 서서 작동이 멈출 때까지 재환을 바라보았다. 라비의 말대로 이것으로 다른 우주에서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다.


***


시간은 흘러 결국 재환은 죽을병에 걸렸다. 옆에는 홍빈이 함께였다.


"재환아, 걱정 마. 내가 꼭 너... 내가 너 꼭 다 낫게 해줄 거야. 나 천잰 거 알잖아. 내가... 내가 널 죽게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


재환은 희미하게 웃었다. 흐려지는 시야로 울음을 참아내는 아름다운 얼굴을 담는다. 직감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이겠구나. 이후로 홍빈의 얼굴을 더 볼 수는 없겠구나. 충분히 살았다. 아니, 충분히 살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사랑 받았다.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서도. 받으면 안 되는 사랑까지도 넘치게 받았다. 재환은 웃었다. 접힌 눈가로 눈물이 흘렀다.

이 사람이 고치지 못하면 정말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괜찮았다.


"괜찮아... 죽어도..."


홍빈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재환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다. 널 믿는다는 말 대신,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는 말까지 하다니. 말도 안 된다. 언제까지나, 내 옆에서 웃어준다고 했잖아. 나는 니가 없이 괜찮지가 않아.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홍빈은 재환의 손등에 끊임없이 입 맞추며 재환이 정신을 잃듯 잠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눈을 감는다는 말이 이렇게 소름끼치는 말인 줄 몰랐다.


"절대 죽게 안 해."


홍빈은 안드로이드들에게 명령해서 재환을 냉동수면실로 옮겼다. 홍빈은 바로 이 날을 위해 재환 몰래 냉동수면 실험을 진행해왔다. 실현성과 수익성이 없다고 버려진 구세대의 실험을 부활시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다. 수 백, 수 천대의 인간과 비슷한 신체조건의 안드로이드로 실험을 한 후 동물, 그리고 마침내 사람으로도 임상실험을 끝냈다. 재환을 위한 실험이니 한 치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됐다.

그리고 홍빈은 현재 클론 실험을 진행 중에 있었다. 재환의 병은 홍빈같은 천재가 수년 간 필사적으로 매달려도 이유를 알 수가 없는 불치병이다. 그건 앞으로도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재환의 가족들은 물론 재환의 삶 전체를 되짚어봐야 한다. 재환이 젊은 시절 아이돌로 달과 위성들을 오갔던 것들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어떤 것도 쉽게 볼 수는 없었다. 그걸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무한한 시간이.


"수많은 내가 마침내 너를 살려낼 거야."


홍빈은 재환의 머리칼에 키스하고 수면실을 나와 연구실로 들어갔다.

재환은 홍빈이 안드로이드 연구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아버지의 연구를 이어 타임머신을 완성하면 안 되겠느냐고 설득하기도 했다. 언제인지 모르는 미래에서 홍빈의 연구 때문에 죽어갈 안드로이드들을 떠올리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홍빈이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안드로이드 연구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따금씩, 재환은 떠올리곤 했다. 탄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자신을 사랑한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라비의 얼굴을.


***


언젠가 홍빈이 자신이 연구를 하는 동안 재환이 외롭지 않도록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왔다. 그리고 재환에게 이름을 붙이도록 했다.

"얘 이름 뭘로 할까?"
"음... 라비."
"라비? 뜻이 있는 이름이야?"

재환은 웃었다.

"나를 지켜주는 이름이야."

홍빈은 재환이 잠든 지 70년 후 라비라는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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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우주에서 널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우리는 또 만나고 만나고 또 만날 거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바비켄 :

[엔켄] 홍콩 홀리데이

2021. 4. 28. 01:26 from text

홍콩 홀리데이





 홍콩! 쇼핑과 야경이 유명한 여행지지만 재환은 홍콩에서 너무도 맛있는 에그 타르트를 먹었던지라 홍콩하면 에그 타르트가 생각이 나고 에그 타르트하면 홍콩이 생각날 정도였다. 재환은 강남 대로변 커다란 전광판에 홍콩의 야경을 배경으로 한 영화 광고를 보며 얼마 전에 다녀왔던 홍콩여행을 떠올렸다.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로 넘어가는 12월 마지막 주, 재환은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훌쩍 한국을 떴다. 이제 내 앞자리가 만으로도 3으로 시작한다니 말도 안 돼! 홍콩과 한국의 시차는 1시간. 1시간이라도 더 늦게 만 나이 서른 살을 맞이하기 위해 홍콩으로 떠나는 거냐며 친한 친구들이 빈정거리기도 했다. 꼬우면 너네도 가던가! 재환은 작은 캐리어를 들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하... 홍콩 냄새.”


 한국 인천공항에서는 마늘냄새가 난다고 했나.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에서도 홍콩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재환은 공항을 나가 숙소가 있는 침사추이로 가는 빨간 택시를 탔다. 그때였다.


 “잠깐만요!”


 갑자기 택시를 붙잡아 세우고는 문을 열어 억지로 합석하는 남자. 


 “어차피 침사추이 가는 것 같은데 같이 타고 가요.”


 넉살 좋게 웃으며 택시 안으로 엉덩이를 들이민다. 재환은 어이가 없긴 했지만 여행이란 예상치 못했던 일도 자주 일어나는 법이니까 좋게좋게 생각했다. 돈도 아끼고, 이런 게 여행의 재미지 싶어서 택시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택시를 출발시켰다. 남자는 재환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원래 저렇게 능글거리는 성격인가.


 “나는 차학연이에요. 홍콩이 처음이 아닌가 봐요?”
 “...이재환이에요. 네. 두 번째에요.”


 사실 재환은 홍콩의 도시적이고 밀집된 느낌보다는 대만의 비취색 바다와 안개 낀 아리산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연말이라 그런지 홍콩의 야경과 새해맞이 불꽃놀이가 보고 싶어서 홍콩을 택했다. 불꽃놀이 보러 오셨나 봐요? 하는 학연의 말에도 고개만 끄덕끄덕.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선잠을 잤더니 몸이 피곤하다. 얼른 가서 자야 내일 오전부터 돌아다닐 텐데. 재환이 자신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자 학연이 재환의 무릎 위로 손을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동그란 무릎 뼈를 감싸 살살 쓰다듬었다.


 “사실 공항에서부터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따라온 건데... 제가 영 별로에요? 일정 맞으면 같이 다니고 싶어요. 나 맛집도 많이 알아요.”


 그제야 재환은 학연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눈썹 위로 조금 짧게 잘라 스타일리쉬한 붉은 머리칼. 작은 얼굴과 그 안을 채우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특히 새부리처럼 모아진 붉은 입술이 인상적이다. 조목조목 따져보면 곱상하고 예쁜 얼굴인데 자신을 향해 웃는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남자답고 위험한 느낌이 난다. 재환은 침을 꼴깍 삼키고 여행지에서의 낯선 인연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했다.


 “음... 너무 갑작스럽네요.”


 학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원래도 까만 편인 얼굴인데도.


 “그래도 맛집 잘 아신다니까... 맛없으면 바로 찢어질 거에요. 알겠죠?”
 “네. 맡겨만 줘요.”


 재환은 밝게 웃는 학연을 보며 무릎을 만지작대는 손을 살짝 밀어냈다. 이건 더 보면서 천천히 결정할 일이니까. 





 “재환 씨, 일어나요.”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낯선 천장. 낯선 감촉의 침구. 두꺼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하얀 아침 햇빛마저도 이질적이라 재환은 자신이 몇 시간 전에 비행기를 탔던 것을 기억했다. 홍콩 시간으로 맞춰놓은 시계를 보니 어느덧 10시. 씻고 나가면 조식을 못 먹을 텐데 싶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 열어 주면 안 돼요? 저 어제 만났던 차학연...”
 “알아요. 근데 제가 지금 일어나서...”


 잘 때 속옷만 입고 자는 재환은 얼른 후드 집업과 반바지를 챙겨 입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서 후다닥 후드를 뒤집어쓴다. 문을 열기 전에 생각나면 좋았을 것을 문을 열고나서야 얼굴이 퉁퉁 부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제 들어갈 때도 피곤해 보이긴 했는데. 천천히 씻고 나와요. 아침은 내가 브런치 잘 하는 데 아니까 거기로 가요.”


 재환은 우물쭈물 거리며 손가락 사이로 학연을 보았다. 웃음을 참는 것 같은 표정. 어제 택시에서 한껏 도도하게 굴었던 게 생각나서 귀까지 화끈거린다. 아무리 같이 여행하기로 했어도 기껏 여행 와서 남 씻는 거 기다려줘도 되나 눈치를 보며 어물어물거리는데 학연이 손을 뻗어 손가락 사이로 삐죽 나온 코끝을 살짝 친다. 


 “퉁퉁 부었네. 미안하면 얼른 씻고 나와요.”


 등을 떠미는 손길에 재환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며 조금이라도 얼굴 붓기가 빠지기를 바라며 얼굴을 마사지한다. 동그란 광대 아래를 엄지손으로 꾹꾹 누르고 손가락 마디를 세워 코 옆과 입술 주변, 눈썹 뼈 쪽을 원을 그리듯 문지른다. 그래도 아까보단 붓기가 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맨 몸에 샤워가운을 걸치고 나오면서 재환은 이 상황이 왠지 여행 날의 아침이 아니라 섹스를 하기 전 같다고 생각했다. 욕실 밖의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분주하게 준비하는.


 “미안해요. 빨리 준비할게요!”


 괜한 생각을 했다며 빨간 얼굴로 욕실을 나오자 커튼을 걷고 유리벽 너머의 홍콩 전경을 구경하고 있던 학연이 뒤를 돌아본다. 재환은 작게 침을 삼켰다. 목을 가리는 포근한 블랙 폴라티에 슬림핏 차콜 슬랙스를 입은 학연은 여행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데이트를 하러 가는 남자처럼 보인다. 이마를 살짝 보이게 한쪽으로 쓸어 넘긴 머리는 그를 좀 더 섹시하게 만든다. 학연은 멍하게 자신을 보는 재환을 향해 살짝 웃었다.


 “아침에 보기에는 영 아쉬운 차림이네요. 옷 갈아입게 나가 있을까요?”


 분명 저 수작을 거는 능글거리는 말투가 어제는 거슬렸는데. 왜 오늘은 듣기 좋은 걸까? 여행 특유의 비일상적인 기류가 자신을 잠식해버린 거라고 애써 변명하며 재환은 성큼성큼 걸어가 학연이 열어놓은 커튼을 다시 쳤다. 두꺼운 커튼이 들어오는 햇볕을 가리자 순식간에 방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재환은 살짝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학연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내뱉는 명백한 유혹의 말. 


 “아침에 보는 게 왜 아쉬운지... 모르겠는데요.”


 놀랐는지 눈이 커지는 학연에게 다가가 바지 위를 살짝 덮은 니트를 잡아 올려 벨트를 만진다. 그대로 상의를 벗기는 줄 알았던 학연은 차가운 벨트 버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재환의 행동에 아래로 열이 확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노골적으로 유혹하다가 이쯤이면 먼저 해달라는 듯이 한 걸음 물러난다. 그럼 기꺼이 그렇게 해드려야지. 학연은 그대로 재환의 허리를 끌어안아 도톰한 입술에 키스했다. 치약 맛이 나는 입 안을 정성스레 핥으며 도톰한 혓바닥을 감아올리자 숨을 할딱이며 목에 매달려온다. 쉴 틈 없는 깊은 키스로 재환의 몸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워 넣자 물기를 머금은 샤워가운이 허벅지에 밀려 벌어진다. 학연은 가운을 여민 끈을 풀며 재환을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새하얀 침대 위로 쓰러진 하얀 알몸. 학연은 그 몸 위로 올라타 빠르게 상의를 벗어던졌다. 재환은 작게 감탄했다. 선이 예뻐서 그냥 마른 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상의를 벗을 때 드러나는 잔 근육과 복근이 그가 꾸준히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괜히 만망해서 두 손으로 자신의 밋밋한 배를 가리자 학연이 벨트를 푸르다가 피식 웃는다. 날 언제 봤다고 그렇게 귀엽다는 듯이 웃는지 모르겠다고 재환은 입술을 삐죽였다.


 “기껏 흥분한 거 다 죽겠네. 빨리 벗어요.”
 “기대하라고 뜸 들인 건데요?”


 그 마른 몸에 대단하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코웃음을 치던 재환은 학연이 바지를 내리자 입을 쩍 벌렸다. 키도 덩치도 있는 재환은 바텀이다 뿐이지 어디 가서 빠지지는 않는데 학연의 성기는 몹시 컸다. 피부색도 그렇고 이 대물도 그렇고.


 “혼혈이에요?!”


 빽- 소리치듯 묻자 학연이 하하, 웃으며 쑥스럽다는 듯이 바지와 팬티를 마저 벗었다. 재환의 몸 위로 올라타자 반쯤 발기한 거대한 성기가 덜렁거리며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순도 백프로 한국인이에요. 고향은 경남 창원시.”


 수다는 여기까지. 학연은 다시 재환에게 입 맞추며 손바닥으로 몸을 쓸어내렸다. 적당히 마른 몸은 군데군데 적당히 살집이 있어 만지기 좋다. 재환의 하체에 자신의 하체를 붙여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허벅지 바깥쪽과 엉덩이를 주물렀다. 쫄깃한 근육 위로 부드러운 크림을 바른 것처럼 살이 말랑말랑해서 학연은 얼른 다이 사이로 제 것을 처넣고 힘껏 흔들어대고 싶었다.


 “하아.. 으응... 너무 누르지, 말아요...”


 재환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며 다른 손으로 학연의 등을 끌어안았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높이 도드라졌다가 사라지는 날개 뼈가 섹시해서 손끝으로 문지르고 더듬었다. 


 “너 진짜 안 되겠다.”


 이미 눈이 살짝 풀려서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환이 너무 야해서 학연은 참을 수가 없다. 급하게 자신의 손을 재환의 입에 넣어 대강 휘저은 후 바로 다리 사이에 찔러 넣었다.


 “아파! 잠깐만요!”
 “조금만 참아봐.”


 처음부터 두 개를 넣고 쑤시다가 곧장 세 개를 넣었다. 재환은 아파서 끙끙대면서도 능글거리며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학연이 인상을 찌푸리고 강압적으로 나오자 왠지 설레는 기분에 의식적으로 아래에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옳지, 착하다.”


 힘을 뺀다고는 해도 여전히 좁아서 학연은 두리번거리다가 침대 협탁 위의 바디버터를 발견했다. 뚜껑을 여니 확 올라오는 진한 아몬드향. 꾸덕한 크림을 푹 떠서 애널에 묻히자 차갑다며 재환이 화들짝 놀란다. 확 조여드는 엉덩이 근육을 보며 학연은 더 안달이 났다. 애널 안으로 손가락과 함께 크림을 밀어 넣어 휘젓자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게 넓혀진다.


 “흐앗, 응... 으응!”


 차가웠던 크림은 어느새 뜨거운 내벽에 녹아 줄줄 흘러내린다. 손가락을 넣어 안을 쑤실 때마다 찌걱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나서 재환은 마치 학연에게 귓구멍까지 애무당하는 기분이었다. 학연은 재환의 허벅지에 자신의 성기를 비비며 흥분으로 바짝 선 유두를 깨물었다. 


 “앗! 아아, 흐앙!”
 “얼른 허리라도 좀 흔들어 봐. 이러다 나 죽겠으니까.”


 여유가 없는 학연의 목소리에 재환은 살살 허리를 흔들며 아래를 조였다 풀었다. 학연이 유두를 빨고 깨물 때마다 허리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린다. 요령 없이 마구 찔러대는 듯해도 손끝으로 내벽을 더듬으며 느끼는 곳을 찾는 스킬이 남달라서 재환은 학연의 목에 매달려 헐떡이면서도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섹스는 끝내줄 것 같기는 한데 사냥감이 된 기분이라 미묘한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해?”


 그러고 보니 왜 반말하지. 재환이 째려보자 학연이 웃으며 손을 뺐다. 


 “얼른 넣어달라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그게 아니라... 흐앗!”


 뜨겁고 단단한 성기가 풀어줬다고는 해도 턱없이 좁은 애널을 파고들기 시작하자 재환은 고개를 꺾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뭐든 붙잡아야 될 것만 같다. 학연은 등을 긁어대는 재환의 손길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아래에서 헐떡이는 모습에 포만감을 느꼈다. 젖어서 흐트러진 앞머리가 남자답게 진한 선을 가리고 쾌락에 달아오른 붉은 두 뺨, 아픔에 찡그린 짙은 두 눈썹과 꼭 깨문 도톰한 입술. 심통 난 어린애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학연은 재환을 품 안 가득 안으며 뿌리 끝까지 깊게 찔러 넣었다.


 “하윽...!”


 반사적으로 허리를 휘며 조여 오는 내벽에 학연도 숨을 헐떡이며 재환을 달랬다. 얼굴 옆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숙여 높은 코에 쪽쪽 뽀뽀하자 재환이 성난 손길로 밀어낸다.


 “장난해요? 병 주고 약 줘?”
 “내 뽀뽀가 약이 돼? 그럼 더 해줄게.”
 “아, 진짜! 이래서 같이 안 다니려고 한 거였는데!”


 그 말에 느글거리며 장난치던 학연의 얼굴이 굳었다. 재환은 아차 싶어서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감췄다. 학연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려 웃으며 허리를 뒤로 살짝 뺐다 확 박았다.


 “으읏! 으응... 흐아...!”
 “그럼, 흣... 그냥 거절하지 그랬어?”


 처음부터 배려 없이 박아대는 움직임에 눈물이 찔끔 난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냥, 투정을 부리고 장난을 치고 싶었던 건데. 그래도 처음 본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용기를 내서 다가와준 학연에게는 못할 말이라는 것을 알아서 재환은 가만히 벌을 받듯이 학연의 움직임을 받아냈다. 벌이라기엔 너무 기분이 좋지만.


 “앗, 아앙, 거기...! 조금 더, 하으읏!”
 “여기? 여기가 좋아?”


 헐떡이는 학연의 숨이 귓가에 닿아 더 흥분된다. 재환은 사과대신 학연의 등을 꼭 끌어안고 뺨과 귓가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학연의 눈치를 보았다. 뜨겁게 조이는 안과 입을 벌린 채 흥분에 들뜬 얼굴. 학연은 결국 굳었던 얼굴을 풀며 재환의 코를 살짝 깨물었다.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허리를 흔들어 좁은 내벽을 파고들면서. 


 “흣, 으음... 예쁘니까, 봐, 준다.”
 “잠깐, 아! 거기는...! 아응, 읏!”


 한 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뇌 안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안에서부터 쾌락이 끓어오르는 감각이 온 몸을 지배한다. 그, 그만! 재환이 학연의 팔을 잡아 밀어냈지만 학연은 그런 재환을 봐주지 않고 재환이 느낀 곳을 다시 한 번 정확히 꿰뚫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거센 움직임에 재환은 입을 크게 벌리고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벌벌 떨었다. 철썩거리며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재환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쾌락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의 성기를 흔들었다. 


 “아앗, 아! 좋아, 흐으응! 아앙, 이제 안 돼...!”


 벌벌 떨리는 손으로 성기를 쥐고 흔들다가 눈을 꽉 감으며 절정에 이른다. 그와 함께 수축하는 엉덩이와 내벽 때문에 학연은 헐떡이며 밀려드는 사정감을 겨우 참아냈다. 흐아... 하아... 재환의 성기가 울컥거리며 밋밋한 배에 정액을 쏟아내는 걸 보다가 학연은 터질 것처럼 딱딱하게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더욱 빠르게 박아 넣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아 온 몸이 예민한 재환이 엉덩이를 뒤로 빼며 도망쳐보지만 학연은 끈질기게 재환을 따라가 재환의 안에 고환까지 처넣을 기세로 깊게 박아 사정했다. 말랑한 엉덩이가 세게 눌리고 까칠한 음모가 거세게 비벼졌다. 


 “하윽...! 뜨거, 워... 흐앗!”
 “흣...! 아... 재환 씨...”


 학연은 몇 번에 걸쳐 사정했다. 정액의 양이 많고 사정하는 힘이 세서 재환은 너무 깊은 곳까지 정액에 젖어드는 감각에 눈을 꽉 감고 바르르 떨었다. 하아, 하아, 몰아쉬는 숨소리가 섞이고 긴 오르가즘에 눈가가 축축하게 젖은 재환의 얼굴 여기저기에 학연이 쪽쪽 키스를 퍼부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귓가에 속삭인다. 


 “오늘 관광하실 코스는 침대. 침대입니다.”
 “잠깐, 우리 이제 나가요!”
 “한 번으로 끝내긴 너무 아쉽잖아요. 이따가 야시장 데려가줄 테니까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


 부드러우면서도 강압적인 눈빛에 재환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홍콩은 언제든 올 수 있겠지만 학연은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남자가 아니기에 투정을 부리면서도 학연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학연은 재환을 끌어안고 몸을 휙 돌려 자신이 아래에 누운 자세를 했다. 재환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손으로 긴 목부터 천천히 쓸어내린다. 


 “재환 씨 피부가 하얘서 꼭 내가 나쁜 짓하는 것 같아.”


 배에 싼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려 음모가 축축하게 젖어간다. 재환은 자신의 안에서 다시 딱딱하게 커지는 학연의 성기를 느끼며 엉덩이를 살짝 조였다. 그리고 손끝으로 학연의 가슴팍을 간질이듯 매만진다. 태양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구릿빛의 탄탄한 가슴. 재환은 학연의 유두를 매만지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나쁜 짓 맞아요. 홍콩까지 와서 밝은 대낮부터 이렇게 야한 짓이라니.”


 그 말에 학연이 입술 끝을 말아 올려 웃었다. 분명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해서 자신보다 곱게 생긴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남자답고 섹시하다. 학연이 재환의 골반을 잡고 허리를 확 올려쳤다.


 “힉, 아흑...!”
 “홍콩에 왔으니까 진짜 홍콩을 가봐야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 얼굴과 움직일 때마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복근이 황홀할 정도로 야해서 재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많이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걸 변명이라고 해요?!”


 시큰거리는 허리와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허벅지 안쪽, 그리고 얼얼한 엉덩이. 그것뿐이면 간만의 격한 섹스가 가져다준 후유증이거니 하겠는데 학연이 얼마나 집요하게 괴롭히고 키스를 조르던지 쾌락에 잠겨 울며 신음하느라 눈도 퉁퉁, 입술도 퉁퉁, 목은 말할 때마다 약한 쇳소리가 나오도록 팍 쉬어버렸다. 학연은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두 사람 분의 정액과 체액으로 범벅이 된 흰 몸을 꼼꼼히 닦아주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어디 가게요?”


 설마 날 이대로 버려두고 너만 관광하러 가는 건 아니지? 경악에 찬 재환의 시선을 읽었는지 학연은 두 손을 내저었다.


 “배고프잖아. 먹을 거 사오려고.”
 “룸서비스 시키면 되지.”
 “내가 재환 씨 맛있는 거 먹여주고 싶어서 그래. 조금만 기다려.”


 퉁퉁 부은 입술에 다시 쪽. 이 사람 뽀뽀 정말 좋아하는구나. 재환은 가만히 눈을 감고 뽀뽀를 받은 후 지갑을 들고 방을 나서는 학연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달칵, 문이 닫히자 몸을 덮치는 기분 좋은 피로감에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재환은 귀를 때리는 소음에 눈을 떴다.


 “재환 씨! 자요? 문 좀 열어줘요.”
 “아, 맞다...”


 밍기적거리며 시트를 몸에 두르고 문을 열어주자 학연이 조금은 차가운 외부의 공기와 함께 들어왔다. 몸에 묻은 맛있는 냄새와 약간의 향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뭐 사온 거에요?”
 “내가 좋아하는 데 건데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


 양 손 가득하게 든 음식들은 어느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메뉴들이다. 아니, 오히려 여러 나라의 요리들을 사왔는지 어떤 레스토랑에서도 이렇게 먹기 힘들겠다 싶을 정도로 산해진미를 모아 놨다.


 “세상에... 뭐 이리 많이 사왔어요. 고생했겠다.”
 “나도 먹고 싶어서 사온 거니까 괜찮아.”


 입맛을 돋우는 포르투갈식 문어샐러드부터 크랩 커리, 와인에 채소와 닭을 졸여 만든 프랑스 요리인 코코뱅, 탱탱한 새우살이 일품인 하가우와 슈마이, 매콤한 사천식 볶음밥, 그리고 대나무 잎에 싸서 구운 포크립까지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계속 먹고 싶을 것 같은 맛있는 요리들이 줄줄 나왔다. 


 “테이크아웃이라 그릇이 너무 볼품없다. 미안.”
 “무슨 소리에요.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데... 먹어도 돼요?”


 재환은 젓가락을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학연은 웃으며 슈마이를 재환의 입에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씹자 달콤한 돼지고기와 통통한 새우살이 씹히며 육즙이 흘러나온다. 재환은 행복에 몸을 떨었다.


 “맛있어요!”
 “그럼 다행이고.”


 학연은 웃으며 아직 열지 않은 쇼핑백에서 망고주스를 꺼냈다. 


 “아직 안 꺼낸 게 있어요?”
 “그럼. 디저트도 따로 샀지.”


 와인향이 나는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코코뱅을 씹으며 재환은 학연에게 청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섹스도 최고, 다정함도 최고! 원래 여행하며 만난 남자들과는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데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학연이 너무 괜찮은 남자라서 그런 건지 헷갈린다. 재환이 젓가락질을 멈추자 학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벌써 배부른 거야?”
 “아뇨, 더 먹을 거에요!”


 그래! 일단 먹고 생각하자. 재환은 행복하게 망고주스를 마셨다.




 재환은 홍콩의 나머지 일정도 모두 학연과 함께했다. 자신의 호텔이 더 층이 높아서 야경을 보기 좋을 거라는 학연의 말에 재환은 짐을 싸들고 그의 호텔로 들어갔다. 눈이 맞으면 섹스하고 학연이 사다주는 음식들을 먹고 해가 질 때쯤 호텔을 나가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셩완의 게이바에 들어가 마음껏 손을 잡고 끌어안고 춤추며 놀다보니 어느새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재환은 1월 1일, 새해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학연은 재환이 씻는 동안 같이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와인과 안주를 사왔다. 재환은 학연을 샤워실로 보내고 커다란 유리벽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두고 와인 잔과 안주를 세팅했다. 창밖을 보니 빅토리아 하버가 어둠 속에서 야경을 반사하며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고작 며칠 동안 함께 있었을 뿐인데 마치 이별여행의 마지막 날을 맞은 사람처럼 울적한 기분이다. 


 “무슨 생각해?”
 “...그냥.”


 약 30분간 새카만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보며 재환은 가만히 학연의 품에 안겨있었다. 학연은 우울해하는 재환에게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묻는 대신 재환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가볍게 키스하며 잔잔한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재환은 잔잔한 위로보다는 현재를 잊을 수 있는 격렬한 폭풍을 원했다.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떼는 학연의 뒤통수를 끌어안아 더 깊게 키스하며 그의 바지춤을 풀어낸다. 


 “하아... 한 번 더요...”
 “괜찮겠어?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으니까 조금만 더...!”


 단단한 품에 안겨서 잔뜩 흔들리며 재환은 고민을 잊었다. 그리고 동이 트지 않은 어슴푸레한 새벽에 개운한 얼굴로 일어나 미리 챙겨둔 짐을 챙겨 방을 나섰다. 안녕, 섹스와 요리는 고마웠어요. 





 “Passport please"
 “아, 네.”


 툭. 재환은 여권을 내밀고 자신의 여권에서 떨어진 걸 주우려 몸을 숙였다. 이게 뭐지? 아이보리색의 네모난 카드는 마치... 


 “...이런.”


 한 방 먹었네.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앳되어 보이는 정면을 바라보는 반명함판의 사진. 한글 이름과 한자, 주민등록 번호, 그리고 사는 주소까지. 학연과 여행하며 재환은 학연의 이름 외에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학연과 함께 한 홍콩의 시간은 마치 로맨스 코미디 영화처럼 달콤해서, 은연중에라도 학연에 대해 더 알게 되면 여행에서 있었던 좋은 추억을 현실에까지 끌고 오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학연 또한 재환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아무 것도 묻지 않아서 같은 마음일 줄 알았건만. 


 “영화를 너무 본 거 아니야?”


 꼭 연락을 해달라는 듯 여권 사이에 넣어둔 학연의 주민등록증. 새벽에 도망치듯 떠나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재환은 학연의 사진에 쪽, 키스하며 환하게 웃었다. 연락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인연이 있으면 어딘가에서 또 만날 수 있겠지. 안녕 홍콩, 안녕 내 2014년. 재환은 작은 창문으로 홍콩을 빛나는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일출을 보며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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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리더 에녕 생일 축하합니다!!!
써논 게 없어서 켄총엔솔 특전으로 들어갔던 엔켄을 올려요!

Posted by 바비켄 :

[조각] 홍켄/ 랍켄

2021. 4. 28. 01:25 from text

[약 공포?홍켄] 그림괴담



니가 죽은 후로 나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개중에는 비싸게 팔린 것도 많았다. 비싸던 싸던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그린 그림들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알 바는 아니고 어쨌거나 그 그림들은 모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 전에 팔리지 않았던 일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마냥 내 손에는 한 점도 남지 않았다.


"또네요."


하지만.


"이 그림은 팔아도 팔아도 계속 돌아와요."


왜일까. 


"이러다 괴담이라도 생기는 거 아닌가 몰라."


내 그림을 매매를 총괄하는 그녀는 웃으면서 한 그림을 내게로 가져왔다. 


"일단 지금 전시관에 자리 없으니까 갖고 계시라구 가져왔어요. 맘에 드시면 그냥 소장하셔도 되구요."


대체 왜일까 별 다를 것도 없는 그림인데. 


"예쁜데 왜 계속 돌아오지. 색이 어두워서 그런가?"


작업실 빈 벽에 그림을 세워두면서도 그녀는 의아해했다. 그럼 다음에 뵐 게요. 인사와 함께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제서야 그림을 제대로 보았다. 그릴 때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멍하니 이걸 내가 그렸나 신기해했다. 내가 저런 색을 쓰던가. 저건 뭘 그린 거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걸 그릴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걸. 


밤이 어두운 녹색의 정글이 캔버스를 꽉 채우고 있다. 아니, 밤의 정글을 캔버스 크기대로 한 조각 뚝 잘라낸 것에 더 가까운 그림이다. 거칠게 덧칠한 두터운 붓터치때문인지 그림 속 나뭇잎들이 마치 사각사각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마른 피처럼 검붉은 꽃들이 이글거린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습기, 축축한 나뭇잎들이 부딪치는 소리. 나는 팔뚝에 소름이 돋아 그림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


"그림이 작가님을 좋아하나봐요. 왠지 더 깊어진 느낌이에요."


그녀는 그가 죽은 후로 내가 잘 살아있는지 감시하러 불쑥불쑥 찾아오곤 했다. 찾아오는 시간도, 기간도 비정기적이다. 연달아 이틀을 방문하기도 하고 이주가 넘도록 안 오기도 하고. 오늘은 5일만이다. 


"혹시 새로 그리신 건 아니죠? 연작이에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젓자 그녀는 아예 그 앞에 앉아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그림들을 보고 감정하고 가격을 매겼을 그녀조차 긴가민가해하자 나는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같은 정글인 것 같긴 한데.... 뭔가 달라진 것 같아요. 초점이 다르다고 해야하나. 지난번엔 정글의 왼쪽을 비추고 있었다면 이번엔 오른쪽을 비추고 있는 느낌? 같은데 달라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무섭다."


그녀는 괜히 에어컨 리모콘을 만지다가 머쓱해하며 돌아갔다. 나는 그때처럼 그녀가 가고난 뒤로 계속 그림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본 뒤 나는 확신했다. 저건 남한테 보이지 않는 구나. 내가 보는 그림 속에는 까만 점이 하나 생겨있었다. 내가 그린 적 없는.


***


"이쯤되니까 진짜 오싹하네. 작가님 저 놀리시는 거 아니죠? 정말 그림에 손 하나도 안 댔어요?"


이제 그녀는 거의 절박한 어조로 말할 정도였다. 


"이상해요. 사진으로 찍어놓은 거 보면 달라진 건 없는데...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구요."


역시 그림을 만지는 사람이라 감각이 다른가.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에게만 보이는 까만 점이 말이다. 
까만 점으로 보이던 그것은 멀어서 그렇게 보였던 것일 뿐인지 그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제대로 된 형태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이제 금방일 것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 그 것은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에 몸을 숨겨가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워지고 있다. 밖으로, 밖으로.


"이거 계속 여기 둬도 되겠어요?"


걱정스럽게 묻는 그녀. 차라리 뭘 그렸냐고 묻는 게 낫지 않겠어? 나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나의 등 뒤에서 미친 사람처럼 온 몸에 물감을 묻히고 캔버스를 채우는 나를 안타깝게 보았다. 내가 나를 안타깝게 봐?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건 내가 아니라는 것 뿐. 꿈을 꾸면서 이 시선이 나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꿈 속의 나는 나의 등 뒤로 다가가 마른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림을 그리는 나의 눈은 텅 비어있다. 아니 아주 새카만 광기로 가득 찬 것 같기도 했다. 내 주위는 온통 어두운 것들로 가득했다. 그 어두운 것들이 내 손을 잡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새카맣고 새카만 것들이 나를 감싸고, 그리고 물감과 붓에 섞여서 그림으로 들어간다. 숲으로, 정글로, 그림 속으로. 

아, 그렇구나. 
이건 너구나. 
너의 시선이구나.

나는 눈을 떴다. 내 위에는 시커먼 게 올라 타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것이 내 사지를 짓눌렀고 그것의 온몸에서 난 새카맣고 긴 털들이 내 얼굴을 간질렀다. 그것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같은 곤충의 발소리가 난다. 한 두 마리가 아닌 수십마리. 아니, 몇 백마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의 꼬리는 내 그림에 닿아 있었다. 아니, 그림에서 나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소름조차 끼치지 않았다. 꿈 속에서 보았던 그 검은 것의 정체가 이것이라면. 그리고 이것이 진짜라면... 
나는 그저 내 위에 올라탄 붉은 안광의 그것과 눈을 맞춘 채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오자 나는 붓을 들어서 너와 나를 그렸다. 

보고 있어?
보고 있어?
사랑해.
사랑해.

그림 속에 너에게 입맞추며 나는 밤을 기다린다. 너와 내가 아직 같은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면 이제는 더 이상 밤도 아침도 무섭지 않았다.




[랍켄] 코스프레 귀청소방<
인턴기자 원식이x귀청소방 실장 재화니




"실장님, 이 사람 이상해요!"


여자의 날카로운 외침에 절로 한숨이 나와 과부하가 난 듯한 이마를 짚었다. 여자는 까만 메이드복을 휘날리며 방문을 나갔고 나는 좁은 빈 방에 덩그러니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허탕이다. 또 들켰다. 쓸만한 건 못 건졌지만 그래도 인터뷰를 따긴 땄으니까 괜찮지 않을까...는 택도 없는 소리. 우리 인턴팀에서 유사 성행위 업소 취재를 맡기로 한 이상 일정량의 인터뷰 분량을 뽑아야 되는데, 인터뷰 담당인 내가 계속 실패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우리 인턴팀은 실습 꼴지를 할 게 분명하다. 이미 몇 번이나 떨어지고 이번에야말로 가까스로 신문사 인턴에 뽑혔는데 이렇게 끝날 수는 없는데 말이다. 어떡하지. 나는 멍하니 야릇한 빨간 꽃무늬의 벽만 바라보다가 아차, 싶어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실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쫓아내기 전에 제 발로 가야지 싶어 문을 나가려는데,


"어? 여기서 또 보네. 우리 인연인가봐."
"...그러네요."


실장은 작업멘트를 날리듯 말하며 내게 웃었다. 나는 절망했다.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다니. 눈 앞의 귀청소방 실장은 어제 간 키스방에서 나를 쫓아냈던 바로 그 놈이다. 혼자서 업소를 두 개나 관리하다니. 이건 반칙이잖아! 실장은 내게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잠시 사무실에서 얘기 좀 할까요?" 라는 아주아주 무서운 말을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말이 아니라 실력행사를 하려는 거 아냐? 주먹으로 나에게 인생의 교훈을 주려는 거 아냐? 얼굴 자체는 험악하기는 커녕 오히려 뚜렷하게 잘생긴 편이지만 그래서 더 무섭다. 차라리 우락부락한 남자면 그냥 덩치로 좀 위협하다가 보내줄 것 같은데 잘생긴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거다. 사무실에 다른 남자들이 더 있으려나? 나는 짱구를 열심히 굴리며 얌전히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먼저 들어가요."


남자는 나를 먼저 사무실로 들여보내고 자기가 문을 닫았다. 뒤를 내주지 않는 치밀함까지 갖추다니. 정말 무섭다. 나는 찍소리도 못 내고 덜덜 떨며 남자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 소파에 앉았다. 남자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나를 보며 웃었다.


"내놔."
"무, 뭘요?"
"뭐긴, 녹음기지. 카메라도 있어?"
"이봐요, 남의 가방을..!"
"녹음기만 있네. 다행이다."


남자는 내 가방을 뺏어서 거꾸로 뒤집어서 와르르 물건을 쏟아냈다. 펜모양의 녹음기를 찾아낸 후에도 한참을 물건들을 뒤적거린다. 


"요새 기술이 하도 발전해서... 애들이 몰카같은 거 찍힐까봐 진짜 무서워하거든."


그러니까 이건 압수. 남자는 일어나서 자기 책상 서랍에 녹음기를 넣었다. 아, 씨발... 어떡하지.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남자가 책상에 엉덩이를 기대고 나를 보고 있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주 빤히.


"기자? 설마 집에서 우리 애 목소리 들으면서 한 번 더 빼려는 건 아닐테고."
"...사람을 뭘로 보고! 기자 맞아요!"
"그치. 어제도 키스하려고 돈 낸 사람이 키스도 안하고 계속 이상한 질문만 했다더라고."


남자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옆에 앉자 푹신한 쿠션이 그 무게만큼 가라앉는다. 나는 남자를 경계하며 살짝 옆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두 번이나 돈 냈는데 아깝겠다. 한 번도 못 뺐잖아요."
"...굳이 남의 손 안 빌려도 되요, 저는."


갑자기 사근사근한 말투로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내 허벅지를 만져오는 남자의 손길에 기겁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남자는 작게 웃으며 내게 더 몸을 붙였다. 그리고 내 뒷주머니에 넣고 있던 핸드폰을 꺼낸다.


"이봐요!"
"폰으로는 녹음 안했어? 목록 봐봐."
"...안 했어요!"
"허술하네. 나라면 이중으로 녹음하겠다."


내 결백을 증명하듯 깨끗한 음성목록을 보여주자 또 눈을 접어 웃으며 내 실수를 꼬집는다.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남자는 내 실수가 그렇게 웃긴가. 별로 웃을만한 일도 아닌데 왜 계속 웃는지 모르겠다. 퇴폐업소 실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계속 웃으면 더 속 모르겠고 더 음흉해보이고 그러거든요... 남자는 내 폰을 뺏어서 소파 앞 테이블에 놓더니 새빨간 녹음버튼을 눌렀다. 00:01- 녹음이 시작되었다.


"녹음을 왜 해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다 대답해줄게."
"네?"
"나만큼 아는 거 많은 사람 찾기 힘들 걸요? 내가 관리하는 게 키스방이랑 귀청소방 말고 다른 것도 있거든."


남자는 또 속 모를 웃음을 지으며 내 허벅지를 더듬었다.


"대신- 내가 뭘 하든 가만히 있어요. 그게 내 조건이야. 대답 듣기 싫으면 바로 나 밀어내면 되고."


남자는 능숙한 손길로 내 벨트를 푸르고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드로즈 위로 만져오는 손에 나도 모르게 헉- 숨을 삼키자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내 귓볼을 핥았다. 가장 예민한 부위를 더듬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흣... 보통, 일하는 여자애들은... 읏, 몇 살쯤, 인가요?"
"음- 알바랑 직원이랑 연령대가 좀 달라요."


남자는 내 드로즈를 내리고 얼굴을 묻었다. 나는 축축하고 뜨거운 곳에 삼켜지며 그대로 인터뷰를 잊었다.


Posted by 바비켄 :



삑삑삑삑
삐이이이익-

“....또 틀렸다.”

두 번째로 비밀번호가 틀렸다. 세 번 틀리면 알림음이 엄청 크게 나지 않나? 그 알림음도 비밀번호를 알아야 멈추게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냥 문 앞에 주저앉았다. 

“언제 오려나...”

헤어진 지도 어느덧 삼 주째. 나는 매일 빈이를 기다리고 있다. 



<b>[홍켄] 말로는 부족한 말</b>



저 멀리서부터 계단을 올라오는 신발소리가 들린다. 빈이는 발이 작아서 발소리가 다른 남자들에 비해 길지 않다. 발소리만 들어도 걷는 모습까지 떠오르는 걸 보니 우리가 참 오래 만났었구나 싶어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왔는데 문 앞에 앉아있는 거 보면 놀랄 테니까 얼른 일어나야지. 양 손으로 차가운 바닥을 누르며 힘을 줘서 일어나려는데 오랫동안 쭈그리고 있던 탓인지 무릎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어어? 잠깐만, 얼른 일어나야...

“...하아.”

작은 한숨. 어느새 계단을 다 올라온 빈이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오지 말랬지.”
“빈아...”
“헤어지자고 했잖아.”
“난 헤어지기 싫어.”
“그런다고 우리가 계속 만날 수는 없어.”
“우리 얘기라도-”

쾅. 빈이는 그대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밖에 내버려두고. 안 울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는데 그런 거 다 잊어버리고 울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집까지 찾아와 문 앞에서 우는 전 애인이라니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어서 꾹 참고 빈이가 올라왔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후두둑, 비가 들이쳐 계단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번 장마는 한반도 상공에서 수시로 남하 또는 북상하는 제트기류로 인해 14일까지 전국에 비를 뿌린 뒤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17일부터 다시 내륙지방에 비를 내리는 등 매우 불규칙한 양상으로 나타날 전망으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을 열어놓은 집에서 뉴스를 틀어놨는지 장마소식이 들린다. 지금 내리는 비가 장마구나. 이제 계속 내릴 거구나. 그렇다면 피해봐야 피해지지도 않겠지. 나는 그냥 맨 몸으로 쏟아지는 장대비 속으로 걸어갔다. 걸을수록 점점 빗줄기가 강해져서 나는 꼭 비에 얻어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왔다. 걸을 때마다 질퍽거리는 신발. 속옷까지 푹 젖어버린 옷. 물에 젖어서 기껏 빈이 본다고 열심히 세팅했던 머리가 다 망가졌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새카만 아스팔트 위로 빗물이 강을 찾아 흐른다. 나는 어디로 흘러야하지.

“우산이 없으면 빌려달라고 하던가!”

그때 화난 목소리와 함께 센 힘으로 팔이 끌어당겨졌다. 놀라서 뛰어왔는지 빈이도 다 젖었다. 오피스텔에서 여기까지 꽤 멀 텐데 우산도 없이 뛰어왔나? 놀라서 눈을 깜빡이자 빈이는 내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에 길에서 나뒹구는 우산을 주웠다. 내게로 오다가 성질을 못 이기고 던져버린 듯했다. 

“씻어. 추우면 물 받아서 좀 담그고 있던가.”
“빈이 너 먼저 씻어.”
“됐어, 추위도 잘 타면서 누가 누굴 걱정해. 들어가.”

밖에서 기다릴 빈이 때문에 샤워는 평소보다도 짧았다. 그냥 찬 기운만 가신 후 나오자 보일러를 틀었는지 집 안이 뜨끈뜨끈했다. 이거 마시고 있어. 손에 유자차가 든 머그잔을 쥐어주고 욕실로 들어간다. 소파에 앉아서 나는 살짝 웃었다. 입고 있는 옷은 빈이 집에 두고 간 내 옷이다. 욕실에는 내 칫솔도 아직 남아있었다. 빈아, 우리가 너무 오래 만나서 그랬을까?

“...머리도 안 말리고 뭐했어?”

빈이는 마른 수건을 하나 꺼내서 내 젖은 머리를 말려주었다. 나는 손을 뻗어 빈이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샤워코롱 냄새. 익숙한 체온.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내 젖은 머리카락 때문에 옷이 젖어도 빈이는 그런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상냥한 나의 빈이. 우리가 헤어지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너는 화 한번 내지 않았지.

-헤어지자.
-뭐? 빈아, 영화 잘 보고 나와서 무슨 소리야?
-나 이제 너 못 버텨.
-...잠깐만 너 지금 진심이야?

너의 뜬금없는 말에 놀라면서도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해하는 나를 너는 어떤 기분으로 보았을까. 빈이는 우는 나를 조심스럽게 마주 안았다. 

“...이재환. 진짜 나한테 이런 말 하게 할 거야?”

-니가 언제 말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내가 못 참겠다, 힘들어서.

“마음 떠난 사람이 나야? 너잖아.”

-너 나 사랑해? 아니잖아.

“그런데 왜 자꾸 찾아와. 나 힘들게...”

-이제 나 사랑하지 않잖아.

“나는 아직 너를...”

결국 빈이도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빈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언제나 나를 안아주었던 단단한 몸이 앙상하게 말라서 떨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내 이기심으로 너를 이렇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빈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해야 하는 말이 있어. 

“미안해, 빈아. 나는, 나는 내가 평생 너만 사랑할 줄 알았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만 사랑하고 싶었어.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내가 무서웠어. 그래서 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너한테 용서 받고 싶었어. 

“울지마 바보야. 니 잘못이 아니야.”

빈이는 울면서도 웃으며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에 잠긴 까만 눈은 내게 많은 말을 건넸다. 미움, 용서, 원망, 그리고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사랑. 나는 넓은 품에 안겨서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울었다. 그래서 빈이는 얼마 울지 못했다. 끝까지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지...


그 뒤로 빈이는 사라졌다. 오랜 시간 만나며 아는 사람이 대부분 겹치게 된 우리라서일까. 빈이는 내게 모든 걸 남겨주고 마치 자기만 없으면 된다는 듯이 가버렸다. 학교도 휴학하고 아무에게서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일부러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수업이 약간 일찍 끝나 다른 건물로 이동하다가 벤치에 털썩 앉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틀었다. 한 쪽이 나오지 않았다. 이 이어폰 고장 났구나. 새로 사야겠다. 노래를 듣는 중에 문득 무릎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불규칙적인 장마가 다시 시작되려나보다. 그렇다면 내가 울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겠지. 한 쪽만 고장이 나도 버려지는 이어폰이지만 멀쩡한 나머지 한 쪽으로는 음악이 너무 잘 들렸다. 빈이는 같이 있을 때도, 사라진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사랑해. 너를 사랑해. 지독한 장마가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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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너만 사랑할 줄 알았다고 말하면서 우는 이기적인 재환이가 보고싶었습니당 빈아 미안...

Posted by 바비켄 :





929: 실명 2015/02/21(토)20:39:42 ID:RedBeans

짐정리를 하다 당시의 투서를 발견해서 투고.

신혼 3년차. 팔불출, 애처가 소리를 들어도 좋다고 생각한 기간들이 계속되는 기간 중 어느날 발신란이 비어있는 편지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나는 대체로 칼퇴근, 남편은 들어오는 시간이 대중 없는 편이라 우편 및 공과 업무는 내 담당. 여타 고지서들 사이에 꽂혀있는 그 편지는 지금 봐도 무척 이상하다. 

텅 빈 발신인란과는 반대로 수신인 란에는 빨간 글씨로
「남편의 일을 알고 있습니까?」 라고 쓰여있던 것.

나는 아닐 거라고 믿으면서도 대패닉해서 집에 들어왔다.

끊고 갑니다




929: 실명 2015/02/21(토)21:02:53 ID:RedBeans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당신, 남편의 일을 알고 있습니까?
그 남자때문에 우리 가정이 완전 망가지고 있다.
위자료를 받을 증거는 충분하지만 이대로는 당신이 너무 놀랄 것이고 
당신도 이혼할 증거를 필요로 할 수도 있어 연락했다. 
이번 주 토요일, ㅇㅇ 역 앞 ㅁㅁ카페에서 기다리겠다.」

라는 편지가 있었다. 

편지를 받은 날짜는 목요일.
그 날 남편은 밤 늦게 들어왔고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남편을 깨우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출근.

「뭐야 왜 날 안 깨웠냐
설마 애정이 식은 것?ㅠㅠ」

점심시간에 이런 내용의 메일이 왔다. 
나와 남편은 사이가 무척 좋아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에 키스는 하고 출근하기 때문.
하지만 투서를 받은 후 나의 마음은 이미 의심과 절망으로 가득 차있어서 답장을 할 수 없었다.

마음 한 편으로는 
「남편이 나를 두고 바람을 필 리 없다」
「태연히 거짓말을 해서 나를 속일 만큼 똑똑하지도 치밀하지도 못하다」
「그 녀석 잘생긴 편이지만 코가 너무 커서 인기가 없을 텐데...」
「잘생긴 것도 내가 스타일링을 바꿔줘서 그렇게 된 건데 어이 없다!」
「하지만 원래도 행동이 귀엽고 상냥하니 호감이 있어서 그런다는 오해를 샀을 수도...」
이런 고민을 수없이 하다가 나는 결국 

「상대방이 오해해서 그런 것일뿐, 나의 남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라고 혼자 단정지어 결론을 내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멍청할 정도로 이상한 방향으로 남편을 신뢰했다고 생각한다.

길어서 끊고 갑니다.




1110: 실명 2015/02/21(토)21:08:38 ID:LEO
.........남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건가 대단하다




929: 실명 2015/02/21(토)21:29:31 ID:RedBeans
>>1110
부끄럽지만 내가 남편에게 푹 빠져있었기도 하고 남편에게 받는 사랑도 믿을 수 없게 컸다.
나 자신이 눈치가 빠르기도 해서 그런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 한 눈을 팔았다면 모를 리 없다고 믿었다. 



929: 실명 2015/02/21(토)21:52:22 ID:RedBeans

이어서 씁니다.

투서의 약속대로 토요일, ㅇㅇ 역 앞 ㅁㅁ카페로 갔다. 
투서에서 창가 테이블에서 흰 자켓을 의자에 걸쳐놓을테니 알아서 찾아와달라고 해서
시간에 맞춰 들어가니 정말 창가 테이블에 흰 자켓을 의자에 걸쳐놓은 사람이 있어서 남편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나온 사람은 남자 한 명. 
투서를 쓴 사람의 오빠라든가 보호자인가 생각하며 앞 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기에 먼저 말했다.

「...제 남편이 그쪽 가정을 망가트렸다고 해서 나왔습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리고 의미 모를 말을 외치기 시작했다.

「본인이 나오다니 뻔뻔하기 그지 없다!」 
「그런다고 내가 용서해줄 줄 아느냐!」
「그 얼굴로 내 아내를 꼬신 건가!」
「비겁하다! 차라리 연예인을 하지 무슨 이유로!」

아르바이트가 와서 조용히해달라고 거듭 진정시킨 후에야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결론은

투서는 잘못 넣어진 것이었다.


나의 집은 609호로, 남자의 가정을 망가트린 가해자가 있던 집은 906호인 것. 
남자와 대화하면 할 수록 말이 맞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어서 추궁해보니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중요한 사항은 몇 번이고 확인 하라고!!」

화를 내자 남자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사죄했지만 내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와 말이 맞지 않았던 것은 나와 내 남편이 게이 부부이기 때문.

내 남편은 게이이기 때문에 남자의 아내와 바람을 피울 수 없다.
나도 남편의 상대가 남자라고 생각해서 여자쪽이 나올 줄 알아서 혼란이 왔던 것. 
투서로 증거가 다 있다고 해서 게이인 것도 다 아는 줄로만 알았다.




여하튼 남자에게 도게자급의 고개 숙임을 받고 겨우 용서해주었다.
결국 그 남자의 아내는 바람을 핀 것이 맞으니 아닌 쪽은 안타까워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커다랗고 비싼 케익과 간식을 잔뜩 사가서
잠깐이나마 남편을 의심했던 걸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역시 그럴 녀석이 아니다.
그럴 머리도 없겠지만.



215: 실명 2015/02/21(토)22:01:49 ID:AceR
이런 결말이라니 남편이 바람을 피지 않아서 잘됐다. 



630: 실명 2015/02/21(토)22:12:06 ID:Cha_N
마지막 말은 남편한테 실례야!



705: 실명 2015/02/21(토)22:16:11 ID:HSang
남자의 말을 들으니 실명은 잘생긴 편? 
게이부부이니 실명은 남편이야 아내야?



929: 실명 2015/02/21(토)22:16:22 ID:RedBeans

>>215
나도 정말 잘됐다고 생각한다.


>>630
마지막 말은 사실이므로 실례여도 괜찮다.
사실 머리 회전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본인도 눈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고.
바람을 피면 그게 다 티가 날 타입이라서 그 일로 다시 한 번 안심하고 있다.


>>705
본인 입으로 인정하긴 그렇지만 꽤 그런 편. 
그래서 솔직히 이런 나를 두고 바람을 폈을리 없다!고 자만한 것도 있다. 

게이 부부니까 아내 없이 남편만 둘. 우리는 서로의 남편이다. 
잠자리 포지션을 묻는 거라면 내가 남편쪽이고 나의 남편쪽이 아내를 맡고 있다.





929: 실명 2015/02/21(토)22:31:16 ID:RedBeans

현재의 짐정리는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서 거금의 인센티브를 받아 이사를 와서 하는 것.
남편과 나의 사이는 결혼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신혼 때처럼 좋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돈독해진 건지도. 

그 후로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투서 사건 덕분에 나는 남편을 완전히 믿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의심했던 건 미안하니 투서 사건은 남편에게 평생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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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니챤 번역글을 읽는 걸 좋아하는데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막장 얘기를 빅스로 치환해봤습니다.
일본어 번역문체로 쓰려고 나름 노력했는데 잘 됐는지는ㅋㅋㅋ
근데 은근 시간이 걸리네요! 재밌었지만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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