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라레
정 택 운 x 이 재 환
점심을 먹고 나니 입 안이 너무 달았다. 택운은 혀로 입 안을 훑으며 고민했다. 물론 입 안이 너무 단 거야 올라가서 양치를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양치를 하기 전에 다른 걸로 입 안을 깔끔히 헹구고 싶었다. 예를 들면 커피라던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카페라떼라던가.
“어? 택운 씨 또 카페 가게?”
“네.”
“거기 사토라레 직원이 택운 씨 좋아한다며?”
“…네.”
1.
사토라레(さとられ). 천 만 명 중에 한명으로 태어나는 일종의 돌연변이로,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특정 범위 내의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염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버리는 특이체질이다.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력한 뇌파를 지녔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에 비해서 뇌활동이 활발해서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최초의 사토라레는 일본에서 발견되었으며 일본의 민화에 나오는 마음을 읽는 요괴, ‘사토리’에서 따와서 전세계적으로 사토라레라고 불린다.
‘사토라레건 뭐건 나만 아니면 관계없지.’
재환을 만나기 전까지 택운의 생각이었다.
사토라레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지만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다. 과학, 수학, 의학, 예술 등 사토라레의 연구와 발견이 인류를 몇 번이나 구했다.
하지만 사토라레는 양날의 검. 국가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사토라레를 보호한다. 사토라레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이웃들이 혹여라도 이상한 말을 하지 않는지 감시한다. 사토라레는 자신의 생각이 남들에게 전달되는 걸 알지 못하는 채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이 가감 없이 모조리 들린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의 미래는 무엇일까. 사토라레라는 용어조차 없을 시절,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신이 사토라레라는 걸 알아버린 사람들은 모조리 자살했다.
‘나 같아도 자살할 거야.’
-핫! 레오다! 어떡해, 너무 좋아…
카페의 유리문 때문에 자신을 보았는지, 벌써부터 들려오는 강력한 염파에 택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알려진다는 걸 알면 자살하지 않더라도 쪽팔려서 죽고 싶지 않을까.
딸랑- 택운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카페 안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택운을 보았다. 그건 택운이 키도 크고 잘생겼기 때문이지만,
“어서오세요!”
-어떡해! 오늘도 너무 멋있어!
이 근방의 명물인 사토라레 청년이 짝사랑하는 상대가 바로 택운이기 때문이다.
‘근데 얜 사토라레가 아니었어도 이 상태면 진작 나한테 들켰겠는데.’
택운은 자신을 향해 눈으로 하트를 발사할 기세인 재환을 보며 언제나 자신이 주문하는 메뉴를 말했다.
“카페라떼 뜨거운 거요.”
“카페라떼 한 잔 주문 받았습니다. 도장 찍어드릴까요?”
“네. 여기요.”
재환은 카운터에 몸을 숙이고 택운의 쿠폰에 도장을 콩 찍었다.
-어라, 도장이 하나 남았네. 벌써 14번이나 왔구나. 설마 도장 다 채워서 커피 한 잔 무료로 마시고 다른 카페로 갈아타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안 돼! 그럼 나 알바 그만 둬 버릴 거야!
“이제 도장 하나만 더 찍으시면 15번 다 채우시네요.”
속으로는 격렬하게 안 된다고 발이라도 구를 기세로 동동거리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다. 그 괴리감에 택운은 웃음이 터질 뻔 한 것을 겨우 참고 쿠폰을 받아 들었다.
“그러게요. 15번씩 채운 게 벌써 3번은 넘은 것 같아서 공로상이라도 받고 싶네요.”
-헉! 50번도 넘게 왔다는 소리야? 하긴 내가 알바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거지 전에는 사장님이 풀타임으로 하셨댔지. 그럼 계속 오겠구나.
“사장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재환은 살짝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쿠폰을 건넸다. 택운은 쿠폰을 지갑에 넣으며 뒤로 물러나서 재환이 카페라떼를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변태라고 생각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괜찮은 애다.
택운이 재환을 처음 본 건 3주 전이었다. 스튜디오 앞에 있는 작은 카페는 생긴 이래로 계속 단골이었다. 사장님이 커피에 관심이 많은지 커피 맛이 체인점보다 훨씬 좋았고 일단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 제일 큰 메리트였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이 업종의 특성상 커피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데 회사 코 앞에 맛 좋은 커피 전문점이 생기다니, 단골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잔, 두 잔, 그 후부터는 세지 않고 말없이 쿠폰 도장을 바꿔가며 얼굴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에 갖다 놓은 커피 머신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커피 맛에 중독이 되어갈 때 즈음, 새로운 알바생인 재환이 나타났다.
처음엔 사장님 옆에서 커피 내리는 법이며, 주문을 받고 돈 계산을 하는 법 등, 여러 가지를 배우는 것 같더니 며칠 뒤부터는 오픈부터 2시까지는 혼자 가게를 보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점심시간이라 사람들 엄청 오네! 사장님도 안 계신데 실수하면 어떡하지….
난생 처음 염파를 들었을 때는 무척이나 놀랐다. 목소리의 진동이 고막에 닿는 물리적인 느낌과는 달랐다. 타인의 생각이 두개골을 넘어서 직접 뇌를 강타하자, 약간의 공포심까지 느낄 정도였다. 지금이 원시 시대라면 저 애를 신神으로 모시지 않았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도 했다. 염파의 내용은 딱 20대 초반의 귀여운 긴장감을 말하고 있어서 공포심은 바로 사라졌지만.
“주, 주문하시겠어요?”
“카페라떼 뜨거운 걸로.”
“네, 카드 받았습니다!”
계산을 하고 뒤로 물러나서 분주하게 커피를 내리고 잔을 준비하는 등을 보고 있었다. 사토라레라고 커피를 다르게 내리는 건 아니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염파가 머릿속을 울렸다.
-대박. 얼굴이랑 몸이 둄마 내 취향. 알바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취향이라니 그거 내 얘긴가? 당황해서 가만히 있는데 음료를 다 만든 재환이 택운을 힐끔 훑어보며 외쳤다.
“뜨거운 카페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헐 고간 봐. 겁나 두둑하잖아- 완전 쩔어!
택운은 두 손으로 자신의 고간을 가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카운터에서 음료를 받은 후 바로 카페를 나왔다.
“잠시 얘기 좀 하시죠.”
그리고 바로 낯선 남자에게 붙들렸다. 그는 사토라레 담당 공무원으로, 재환의 신변에 관련한 일들을 중재하는 일을 맡고 있다고 한다.
“놀라셨겠지만 재환 씨는 동성을 좋아하는 성적 취향이 있어서… 정택운 씨께서 양해를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이름도 압니까?”
“카페에 세 번 이상 온 손님들의 이름과 다니는 직장은 조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사토라레가 뭐라고. 그냥 남자 좋아하는 꼬맹이인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과잉보호를 해야 하나. 아무리 자살방지를 위해서도 이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해라니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정택운 씨는 재환 씨가 뭐라고 하든 못 들은 척하시면 됩니다. 가급적이면 들리는 염파를 못 들었다고 여기시고 행동해주십시오. 이런 배려가 귀찮으시다면 아예 카페에 오시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죠.”
차라리 노골적으로 ‘우리 애한테 이상한 영향 끼치지 않게 카페에 오지 마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택운은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했다.
“카페에 오지 말라니 이건 명백한 월권행위 같은데요. 지금껏 그 꼬마의 사생활을 이런 식으로 조작한 겁니까? 그 사토라레, 애인이 있던 적이 있긴 합니까?”
“……”
공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과잉보호 아래에서 애인 한 번 못 만들어본 사토라레 꼬마가 불쌍했다. 하지만 그 꼬마에 대한 연민보다는, 내가 왜 공무원들 편하자고 내 커피를 포기해야 돼? 난 맛있는 커피를 마실 권리가 있다고! 라는 오기가 먼저였다.
공무원이 자리를 뜨고 나서 미처 터트리지 못한 화를 삭이며 스튜디오로 돌아갔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렸던 어이없는 상황에 입이 말라서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약간 식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재환이 내린 커피는 카페 사장이 내린 커피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 뒤로는 불가항력이었다. 사장님의 커피보다 더 맛있는 커피라니! 야근이 잦은 직업이라 직원들 저녁도 사줘야 하고 재료비도 써야 하고, 이래저래 돈 나갈 구석이 많아서 매일 카페에 가지는 못했지만 여력이 되는 대로 카페에 드나들었다. 나름대로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실장님, 오늘은 카페 안 가세요?” 하고 물어대는 걸 보면 거의 참새가 방앗간 지나치지 못하는 격으로 보였던 것 같다.
-힙업 쩐다… 다리도 엄청 길어… 완전 핫바디의 정석!
-여자친구 있을까? 있겠지? 내가 여자라면 저런 남자 가만 안 놔둬.
-미친 손가락 개예뻐 섬섬옥수라는 말은 당신을 위해 존재해요!
-보다보니까 되게 사자같이 생겼네. 밀림의 왕자 레오 같다.
사토라레의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것은 커피를 내리는 데서도 발휘되는 걸까. 이제는 재환의 알바 스케쥴까지 꿰고서 사장님이 풀타임을 하는 날엔 카페에 들르지 않기까지 한다. 자주 보던 사장님껜 죄송한 말이지만 재환의 커피가 두 배는 맛있었다.
그렇지만 이 꼬마 알바생은 올 때마다 얼마나 속마음으로 쫑알쫑알거리는지. 택운은 커피를 주문할 때 외엔 재환과 말도 섞은 적 없으면서 재환과 엄청나게 친한 사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재환은 택운이 올 때마다 속으로 이래서 취향 저격, 저래서 취향 저격이라면서 자신의 취향을 줄줄줄 읊어댔기 때문이다.
사토라레의 염파가 닿는 범위는 재환을 중심으로 한 3m의 구체. 카페가 작아서 3m 안에도 제법 테이블이 있어서 아마도 카페 사람들은 다 들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낯이 뜨거워지다가도 당사자인 재환은 자신의 생각이 들리는 줄 전혀 모르는데 내가 신경 쓸 일인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택운이 평소처럼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스팀밀크를 치던 재환의 등이 멈추었다. 그러다 평소보다 강한 염파가 들려왔다.
-…나 레오 씨 좋아하나봐.
택운은 숨이 턱 막혔다.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사토라레는 남들보다 강한 뇌파로 남의 뇌에 직접 생각을 전달하는 염파를 보낼 수 있는 돌연변이다. 생각과 감정은 무 자르듯 깔끔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생각을 담은 염파와 함께 감정도 전달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울렁거리는 마음은 자신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재환의 염파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택운은 그렇게 스스로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이건 아냐. 내 감정이 아니라 저 애의 감정이야. 그러니 진정해.’
하지만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재환의 감정이 너무도 강력했다.
떨림과 설렘, 그리고 깨달음이 범벅된 풋내 나는 첫사랑의 염파는 제법 사람을 만나볼 만큼 만나본 택운의 마음까지도 설레게 만들었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약간씩 붉어진 얼굴로 택운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택운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자신을 이렇게 울렁이게 만들고도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재환의 등만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집에 가서도 재환의 뒷모습이 계속 눈 앞에 어른거렸다.
‘날 좋아한다고? 나한테 말도 제대로 안 걸어봤으면서?’
프로젝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샘 작업을 할 때가 아니면 11시에 칼 같이 잠드는 택운이다. 그런 그가 잠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할 정도로 재환이란 존재는 택운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대체 뭘 보고 좋아한 거야. 고간이 두둑해서? 힙업이 쩔어서? 어깨가 넓고 등빨이 좋아서? 택운은 재환이 자신을 보며 생각했던 염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재환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리고 며칠을 밤을 새며 수면부족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인정하고야 말았다. 재환의 염파에 동화되었든 동화되지 않았든, 자신은 이미 재환이 너무도 신경이 쓰이는, 연애의 출발선 앞에 서 있다고.
하지만 인정을 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재환은 여전히 고백은커녕 주문을 받는 것 외엔 자신에게 제대로 말도 걸지 못했다. 택운 역시 재환의 마음을 안다는 티를 낼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택운은 말을 숨기고 재환을 지켜보았다. 대체 자신의 정확히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환의 마음은 날로날로 커져만 갔다. 택운 역시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재환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택운은 누군가가 뾰족한 바늘 끝으로 양심을 콕콕 찌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간단한 말로 하자면 미안해 한다는 뜻이다. 재환은 자신의 마음의 소리가 이렇게 3m이내의 사람들에게 모두 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텐데 자신은 이미 알고 있어서.
재환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택운에게 한 번도 자신의 흑심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 잘 감추고 있는데 성적 취향과 좋아하는 상대까지 모조리 아웃팅해버린 기분이었다. 재환의 노력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맨 처음 택운이 재환의 마음이 어떻든지 자신은 커피만 마시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장 다 찍으면 서비스라고 쿠키라도 좀 드릴까… 거기다 내 번호라도 같이… 아니, 단골 쫓아낼 일 있어? 미쳤어! 미쳤어!
“안녕히 가세요!”
택운은 재환의 인사와 함께 들린 귀여운 속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카페를 나갔다.
“실장님 또 그 카페 가셨어요?”
“네.”
스튜디오로 돌아가니 여직원 한 명이 테이크아웃 잔에 찍힌 로고를 보고 묻는다. 택운은 맛있는 커피를 홀짝이며 맞노라고 대답했다. 여직원은 순순한 택운의 대답에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으… 싫지 않으세요? 그 사토라레 실장님 좋아하지 않아요? 주변에 소문 다 났을 것 같던데.”
택운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여직원을 지긋이 보았다. 무슨 의도로 말하는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혐오스럽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추문에 휘말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불쾌해해도 되는 건가. 택운이 고민하던 때에 남자 직원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 작고 귀여운 남자애라면 모를까 그 사토라레는 키도 실장님만하던데. 좀 징그럽지 않아요? 비위도 좋으시다.”
이 말로 확실해졌다. 혐오스럽다는 뜻이네. 택운은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그 애가 사토라레가 아니었으면 모르는 사람들한테 이딴 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겠죠.”
그 애는 나한테 피해주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이 드러날까 무서워서 자기 마음을 입 밖에 낸 적조차 없는데 사람들의 혀는 어찌나 이렇게 쉽게 움직이는지. 공무원들이 아무리 과잉보호를 하면 뭐하나. 사람들의 세치 혀는 공권력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걸.
“실장님 화나셨어요?”
“죄송해요. 실장님 기분 나쁘실 텐데 저희가 너무 놀리듯이 말했죠.”
직원들은 택운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택운이 화가 난 것 같아보이자 눈치를 살폈다. 택운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차라리 카페에 오지 말라던 공무원을 떠올렸다. 그가 왜 그래야 했는지 알 것 같다.
재환은 택운을 잘 모르지만 택운은 재환을 제법 알았다. 물론 그건 반칙이다. 동의 없이 상대의 마음을 알아 버린 것이니까. 하지만 택운은 재환이 무척 착하고, 순진하고(비록 20대 초반답게 혈기왕성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순진하기 짝이 없다), 조심스러운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작 자기 때문에 재환이 여러 사람들에게 안 좋은 말을 듣고 있다니 어이가 없고 기분이 나빴다.
‘더 좋은 사람도 아니고… 고작 내가 뭐라고.’
택운은 자기비하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제법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기 스튜디오를 갖고 있는 29살의 건축가는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협회가 밀어주는 스타 건축가도 아닐 뿐더러 외모가 그리 뛰어난 편도 아니다. 재환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얼굴과 몸을 좋아해주지만.
‘자기도 몸이 나쁜 편도 아니면서…’
택운은 재환의 취향이 그리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재환이 좀 더 보는 눈이 있었다면 자신보다 더 좋은 남자를 골랐어야 했다. 그런 풋풋한 고백을 듣고 그저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니라 재환에게 단박에 반할 수 있는. 오기와 반발심이 아니라 재환에 관한 연민과 애정으로 카페에 다닐 만한 그런 남자. 그런, 좋은 남자. 하지만 재환은 하필이면 택운에게 반해버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택운은 망설임 없이 스튜디오를 나섰다. 택운의 발은 성큼성큼 재환이 일하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자 “어서 오세요!” 재환의 목소리와 함께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재환의 염파가 머리를 울린다.
-어라? 방금 사갔는데 왜… 혹시 커피를 잘못 드렸나?
택운은 카운터에 섰다. 그리고 평소 주문과는 다른 음료를 주문했다.
“초코 라떼 아이스 한 잔 주세요.”
그건 바로 재환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였다.
“그리고 그쪽 번호도.”
택운은 도장 한 칸이 남은 쿠폰과 함께 펜을 내밀었다.
“……네?”
-……팔든?
재환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되물었다. 택운은 약간 긴장한 것을 티 내지 않고 펜을 재환의 앞까지 내밀었다.
“번호 달라구요. 핸드폰 번호.”
“아, 네에…”
-……어? 이거… 실제 상황이야?
사토라레의 염파는 3m 이내의 구체. 하지만 감정의 강도에 따라 그 범위는 더 넓어진다. 택운은 주문한 아이스 초코 라떼를 재환의 손에 쥐여 주며 “그쪽 마셔요. 아니, 그쪽이 아니지. 재환 씨 마셔요.” 라고 말한 후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카페문이 닫히는 순간 재환이 속으로 외친 염파는 50m 밖까지 날아갔다.
-레오 씨가 나 좋아하나봐!!!!!
당연히 그 염파는 택운에게까지 닿았다. 택운은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 재환의 염파를 느끼며 기쁘게 웃었다.
맞아. 나도 몰랐는데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그리고 몇 번의 만남 뒤, 택운과 재환은 사귀게 되었다.
2.
“택운 씨!”
택운은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재환에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재환은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주변에 마구 뿌려대고 있었다. 엄청나게 시끄러운 염파와 함께.
-어떡해, 택운 씨 오늘도 너무 멋있어…! 한 번 더 반할 것 같아!
‘그 말만 백번도 넘게 들은 것 같아요.’
-택운 씨는 진짜 딱 봐도 건축가 같아. 지적이고 섹시하고 옷도 특이하고…. 건축 잡지에 얼굴 사진 실려서 막 팬클럽 같은 거 생기면 어떡하지? 쫓아다니는 여자들 생겨서 우리 사이 들키는 거 아냐?
‘이미 사진은 실린지 오래에요. 잡지 좀 실린다고 팬클럽은 안 생겨요. 그런 건 아이돌한테나 있는 거지. 아무리 내가 애인이어도 그렇지 재환 씨는 콩깍지가 너무 심해요.’
택운은 습관적으로 재환의 염파에 속으로 대답을 해주며 자신의 앞으로 뛰어온 재환을 가볍게 안았다. 재환이 속으로 외쳤다.
-흡! 나 땀 냄새 날 텐데!
“안 나.”
핫.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네?”
재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묻자 택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재환을 안은 팔에 힘을 약간 줬다가 풀며 대답했다.
“땀 냄새 안 나니까 그렇게 흠칫 놀라지 마요.”
“아아- 티 났어요? 저기서부터 뛰어오는 바람에 땀 났을까봐 신경 쓰여서요.”
재환은 헤헤 웃으면서 손부채질을 했다. 택운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서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는 게, 아마도 공무원들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원래 한 명이던 담당 공무원은 택운과 재환이 사귀던 날부터 3명, 때로는 5명까지로 늘어났다. 도청 따위를 하지 않아도 재환의 속마음을 통해 데이트 날짜는 물론 코스까지 꿰고 있을 테니 스케쥴 내용에 따라 인원수를 조절하는 모양이다.
“자 그럼 갈까?”
“네!”
오늘은 캠퍼스 데이트. 영화를 볼까 연극을 볼까 뮤지컬을 볼까 데이트 코스를 고민하던 중, 재환이 자신의 작업실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 오게 되었다.
사실 사토라레와의 데이트에는 제법 제약이 많다. 영화는 상관없지만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사람이 직접 나와서 공연을 하는 종류는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좋다. 공연을 보며 재환이 떠올리는 생각들이 배우들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3m 밖에서 보면 되는 것이지만 클라이막스라던가, 감정이 격한 씬에서 3m를 뛰어넘는 염파가 방출된다면 배우들이나 관객들이 동요할 것이 분명하다.
영화관 역시 그다지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3m 내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평상시에는 명동이나 강남 같은 번화가에 가지만 않으면 그렇게 사람과 가까이 있을 일이 없는데 영화관은 사람의 밀집도가 높아서 유의가 필요하다.
택운은 난생 처음 듣는 ‘사토라레와 데이트할 때 필요한 주의사항’을 공무원들에게 전해 들으며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공무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재환과의 연애가 순탄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약간 체념했다. 재환이 이상한 시선에 노출되느니, 차라리 감시를 받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말이다.
재환과 사귄지 어느새 2달째. 그 동안 공무원들의 도움을 받아 사람이 적은 영화관을 골라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배우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 뒤에 연극을 보기도 하면서 즐거운 데이트를 즐겼다. 하지만 지금, 택운은 약간의 불만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스킨십!
물론 아주 스킨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손도 잡고 포옹도 했다. 뺨에 뽀뽀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몇 살인가. 내년이면 계란 한 판이다. 어린애 장난 같은 스킨십에 아쉬움만 커져 갔다.
재환은 속으로는 고간이 두둑하다느니, 힙이 빵빵하다느니 잘도 평해놓고 정작 사귀게 되니 굉장히 수줍음을 많이 탔다. 물론 그런 모습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재환이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본 것은 택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별 불만은 없다. 오히려 귀엽지. 첫 데이트 때 손을 잡았다가
-헐... 섰어...
손만 잡았는데도 발기를 했다는 말에 택운은 난생처음 조카가 아닌 누군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미친 귀여움이었다.
그래서 큰 불만은 없다. 그저 어디를 가나 사방에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는 만큼 욕구가 쌓이는 것뿐이다.
‘꼭 자고 싶은 것도 아닌데.’
택운은 재환을 버스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서서 재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미용실 갈 때가 되어 가는지 곱슬거리는 머리 뿌리가 올라오고 있어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걸 용케 들었는지 재환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왜, 왜 웃지? 나 머리에 비듬 있나? 아닌데? 나 엄청 깨끗하게 씻었는데??
‘비듬 같은 거 없어. 있어도 그걸로 웃지 않을 거고.’
택운은 재환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으며 버스 창문 밖을 구경했다. 학교 안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천천히 교내 도로를 따라 학교 주변에 심긴 가로수들을 구경시켜주었다. 나무의 가지마다 새싹들이 움 틀 준비를 하고 있는 듯 까만 몽우리가 올라와 있었다. 이제 봄이구나. 택운은 자신의 손길에 잔뜩 얼어버린 재환과 함께 이 봄을 맞는 것이 퍽 기뻤다.
‘이런 애랑 뭘 하겠어.’
그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싶을 뿐이지만 재환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택운은 쑥스러운지 발갛게 열이 오른 재환의 목덜미를 지긋이 내려 보았다. 그런 택운을 바라보는 공무원들은 소리 없이 외쳤다.
‘미친놈아 그만 좀 봐! 애 울겠다!’
재환은 천성도 그렇지만 여러모로 국가의 관리를 받은 터라 또래에 비해 순진한 면이 있었다. 성적 호기심은 왕성하지만 그 호기심은 질척하고 더러운 욕망보다는 연애에 대한 환상에 가깝다. 그래서 공무원 모두는 재환의 이상형을 알고 있었다.
야한 남자.
이게 재환의 이상형이다.
정택운이란 남자는 재환의 이상형을 현실로 구현시킨 듯이 너무나도 야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무심한 동작 하나하나가 야했다. 날렵한 눈매와 두꺼운 목, 넓은 어깨, 두터운 허리와 중심부, 그리고 길고 늘씬하게 뻗은 다리까지. 긴 팔로 휘적휘적 움직이는 모습은 이상하게 위협적이다. 게다가 목소리는 또 어찌나 반전 있는 미성인지. 덩치도 커다란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라떼 한 잔이요.” 라고 매일 같이 카페에 와서 주문을 해대니, 재환이 택운에게 빠지는 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의외인 점은 택운도 재환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조사한 결과 귀찮은 걸 꺼리는 성격이라고 해서 국가의 관리를 받는 재환을 꺼릴 줄로만 알았는데 택운이 재환을 받아준 것은 재환을 관리하는 부서에서도 꽤 놀랄 만한 일이었다. 택운에게 의외로 반골기질이 있다는 것을 안 후로 ‘아…’약간 깨달음에 탄식하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택운은 제법 재환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았는데, 문제는 그 진심이 너무나도 진심인 것에 있었다.
‘눈빛이 너무 야해!’
처음에는 택운이 재환을 이용하려는 것인가 싶어 경계하던 그들도 택운의 행동이나 눈빛으로 그가 진심인 것을 알게 되었다. 택운은 ‘내 어디를 보고 좋게 느낀 거지. 나한테 실망하면 어떡하지?’ 불안해하는 재환의 손을 잡아 말없이 다독여주었고, 사토라레의 특성상 연애를 숨기지 못하는 재환 때문에 회사 사람들은 물론 카페에 다니는 손님들에게도 재환과의 연애가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택운은 서툴지만 자신을 많이 좋아하는 재환을 진심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재환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야했다! 어린 애한테 그런 눈빛은 반칙이야! 라고 말할 만큼 야했다!
택운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고 재환은 말도 많았지만 속마음도 시끄러운 편이다. 택운이 재잘거리는 재환을 말없이 바라보면 재환은 돋보기에 태워지는 개미처럼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머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날 것처럼 열이 올랐다. 마음의 소리도
-…! ….!!
무슨 모스부호마냥 끙끙거리기만 할 뿐, 어쩔 줄을 몰랐다.
공무원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귀게 된 후로 택운이 매일 밤마다 재환의 꿈에 나와서 그를 희롱하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지금껏 택운이 뭐라도 하려고 하면, 보고 있다는 티를 내서 진도를 못 빼게 한 것인데 이제 슬슬 한계가 온 것일까. 택운의 재환을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진득해지고 재환의 꿈 속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느끼던 공무원들은 오늘 데이트가 그들의 연애의 분기점이 될 것을 예감했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 밀실에서 단둘이!
뭘 하겠는가? 물론 끝까지 가진 않겠지만… 뻔하지. 재환을 가장 오래 지켜본 공무원은 재환이 데이트 계획을 짜서 택운에게 말하려고 연습까지 하는 것을 보며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순진했던 내 새끼가 어느새 이렇게 다 커버렸어…!
삐익- 재환은 버스 벨을 누르고 손으로 뒷목을 긁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빨간 얼굴은 이제 택운과의 데이트를 따라다니는 필수템과도 같다.
“이, 이제 내리면 돼요.”
“그래요.”
-연상의 존댓말… 택운 씨는 너무 모에한 것 같아…
‘모에? 모에가 뭐지?’
택운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재환을 따라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갔다. 방학이지만 예대라서 그런지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이 간간이 보였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복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짐들에 택운이 피식 웃었다.
“나 학교 다닐 때도 이랬는데. 요새도 이러나 봐요.”
“네. 조교님이 방학 전에 짐 다 갖고 나가라고 해도 듣는 애들이 거의 없어요. 아, 저는 교수님 밑에서 일하는 애들이랑 같이 쓰는 작업실이라서 안 나가도 돼요!”
재환은 택운이 혹시 자기를 뻔뻔한 애로 알까봐 열심히 자기변호를 하며 작업실로 택운을 데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확 기름 냄새가 풍겼다.
“미대 작업실은 이런 느낌이구나.”
넓은 데스크 두 대를 붙여놓고 모니터 두 대를 기본으로 장착한 컴퓨터들이 즐비했던 건축과 스튜디오에 비해 회화과의 작업실은 상대적으로 넓고 어지러웠다. 물론 재환의 작업실은 교수님 아래에 있는 학생들의 작업실이니 일반 작업실보다는 인원이 적은 편인 걸 감안해야 하지만 말이다.
벽마다 붙어있는 사진이나 엽서들, 쌓여있는 책과 잡지들을 보며 택운은 이런 면은 비슷하군,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은 눈에 보이는 큼직한 짐들을 구석으로 치우고 의자를 가져왔다.
“여기 앉으세요.”
“네. 재환 씨가 그린 것들은 어떤 거에요?”
“큰 것들은 다 여기저기 대전이나 전시 같은데 출품돼서 없구… 지금은 작은 습작이랑 스케치만 있어요. 잠깐만요.”
재환이 가져온 목탄화와 아크릴 스케치를 보면서 택운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건축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안다. 건축은 현실과 예술을 이어주는 그릇이라는 걸. 현실과 예술이 한 선으로 나뉘어 있다면 건축은 그 선 위에 찍힌 점과도 같다는 걸. 하지만 그 말은 건축에는 제약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금전의 벽, 기술의 벽, 건축법과 환경법, 다양한 법의 벽이 존재했다. 실용과 철학을 오가며 끊임없이 정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재환의 그림에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건 언제를 그린 거에요?”
택운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재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재환은 택운의 앞에 쪼그려 앉아서 설명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랑 같이 치악산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계곡에서 놀았는데 물이 초록색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죠. 냉장고에 넣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차가울 수 있다는 것두요. 형들이랑 계곡에서 실컷 놀다가 무심코 계곡 한쪽 구석을 봤는데… 그때 부모님은 제가 잘못 본거라고 했지만 뭔가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걸 그리려고 한 거에요.”
택운은 열심히 설명하는 재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화 물감과 커피 냄새가 나는 사토라레 남자애. 혹여라도 자살하지 못하도록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고, 그 주변인들조차도 국가의 통제를 받는, 자신이 얼마나 세상에 알려져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이 아이를 다 알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재환이 쓰는 색깔은 다채로웠다. 치악산이라고 했지만 한국적인 느낌과 함께 이국적인 느낌이 풍겼다. 하나하나 같은 초록색이 없었다. 스케치답게 거친 터치와 의도적으로 뭉개버린 부분들이 보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인 그림이었다. 오싹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어린 날의 그림. 재환의 그림은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봐요? 이상해요?”
재환은 설명을 하다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택운을 보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이쯤되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재환은 택운의 눈길에 영 익숙해지질 못했다. 택운은 의자에서 내려와서 재환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아뇨. 예뻐요. 색이 예쁘네요.”
“아… 고마워요.”
-뭐야, 난 또… 내가 예쁘다는 줄 알았잖아. 등치도 큰 게 양심도 없지. 이쁘다는 말은 듣고 싶어가지고…
재환은 지레 설레발을 친 것이 부끄러운지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 말에 택운은 웃음을 참으며 재환의 옆모습을 보았다. 남자답게 잘생긴 이목구비인데 이상할 정도로 곱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웃을 때. 수줍어하며 눈을 접을 때. 마른 얼굴에 살이 올라오며 광대가 동그래지면 사랑스러움이 함께 차오르는 것 같다. 택운은 충동적으로 재환의 턱을 잡아 자신에게 돌려서 도톰한 입술에 꾹-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어…”
-어…?
속마음과 진짜 말이 동시에 튀어나온다는 건, 당황했다는 것. 택운은 이번엔 재환의 뒷목을 감싸 안고 더 길게 입 맞췄다. 이렇게 입술이 두꺼운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푹신하게 눌리는 입술이 기분이 좋다. 계속해서 키스를 하고 싶을 만큼. 택운은 재환의 입술을 살짝 핥으며 입술 사이로 파고 들었다.
“흡…!”
-대박! 대박..!
호들갑을 떠는 염파조차 사랑스럽다고 느낀다면 이미 게임은 끝이 난 것이 아닐까. 택운은 깊은 키스에 어디를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적거리는 재환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목에 둘러주고 재환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으음…”
-대박… 엄청 기분 좋아… 혀가 막… 너무 야해…
택운은 재환의 반응에 더욱 부응하기 위해 고개를 꺾어서 더 깊이 키스했다. 혀를 얽어서 비비고 입천장을 훑자 재환의 몸이 빳빳하게 굳으며 쭈그려 앉아서 키스하던 두 사람의 균형이 깨졌다.
“앗!”
-넘어진다!
재환이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가려고 하자 택운은 반사적으로 재환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 하지만 재환도 180cm가 넘는 건장한 청년인지라 그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택운도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무거웠죠?”
재환을 깔아 뭉개버렸던 택운은 얼른 팔로 몸을 지탱해 일어나려고 했다. 재환이 택운의 목만 끌어안지 않았다면 말이다.
“…안 무거웠어요.”
-이제 익숙해질 무게인 걸요…
택운은 발칙한 재환의 속마음에 얼굴을 붉히며, 7살의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자제력을 잃고 재환에게 달겨들었다.
-읍! 으응..! 택운 씨, 너무 좋아…!
-앗, 근데 나 섰어 어떡하지?
-아 몰라… 처음은 좋은 데서 하고 싶었는데 작업실도 나쁘지 않지. 학교에서 첫 섹스! 너무 로맨틱해!
오래도록 키스를 하며 재환이 쉴 새 없이 야한 생각으로 가득한 염파를 쏟아내는 바람에 결국 핸드폰으로 카톡이 쉴 새 없이 날아오는 ‘공무원 stop’이 들어와 버렸지만, 제법 괜찮은 첫키스라고 택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바닥에 누워서 반쯤 풀린 눈으로 황홀하게 자신을 올려다 보는 재환 때문에 하체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남자와의 섹스를 딱딱하고 차가운 작업실 바닥에서 할 생각은 없으니까.
“카톡은 뭐였어요? 급한 거에요?”
재환은 몸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택운에게 물었다. 택운은 고개를 저었다. 공무원에게서 온 카톡은 ‘우발적인 동성 간의 관계는 받는 쪽의 물리적인 피해가 무척이나 크기 때문에 사전준비를 마치고 해라’, ‘반경 20m 내로 듣는 사람이 없도록 호텔이나 펜션을 마련해줄 테니 부탁이니 첫경험하기 전에 예고를 해달라’는 내용을 길게 길게 풀어 쓴 것이었다.
‘하긴. 나도 내 애인이 섹스할 때 느낀 걸 남한테 들려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처음에는 섹스 전에 미리 말해놔야 한다니 이 무슨 비인도적인 처사인가 싶었지만 지금 보니 꽤 합리적인 절차인 것 같다.
“물감 묻었어요.”
“네? 어디에요? 얼굴에?”
택운은 얼굴을 마구 비비는 재환의 손을 잡아서 엄지로 손등을 문질렀다. 바닥에 굳어있던 물감이 묻은 것인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재환의 손을 잡아 올려서 혀로 핥은 뒤 문지르자 색이 흐리게 번지며 지워졌다.
“됐다. 이제 나가요. 배고프죠?”
“아… 네…”
-택운 씨… 너무 야해… 얼른 자고 싶다…
“콜록 콜록!”
택운은 깜짝 놀라 기침을 했다. 뭘 했다고 야하대? 물론 나도 자고 싶지만 너무 음란마귀가 낀 거 아냐? 택운은 재환의 손을 꽉 잡으며 키스로 퉁퉁 부은 재환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갑자기 입술을 맞은 재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요?”
“…얄미워서요.”
“네? 뭐가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택운은 손을 풀고 작업실을 나갔다. 재환은 쪼르르 택운의 뒤를 따라 나오며 쨍알쨍알 물었다.
“아 왜요~ 뭐가 얄미운데요~ 고칠게요 말해줘요. 네? 빨리요!”
“싫어요. 말 안 해.”
택운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복도를 걸으며 고개를 숙이고 픽 웃었다.
어떻게 고칠 건데?
귀여워서 얄밉고, 발칙해서 얄밉고, 속마음까지 사랑스러워서 얄미운 건데 그걸 어떻게 고치게?
택운은 졸졸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재환 때문에 웃음이 멈추질 않아서 식당까지 가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택운은 책상 앞에 앉아 재환의 마음을 알던 날을 떠올렸다. 지금껏 자신에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다고는 자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재환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싫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도 않고. 그저 남의 마음의 파동을 그대로 받아낸 것이 처음이라 낯설고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웃는 얼굴을 보면 귀엽고 깨물어주고 싶고. 울상을 짓는 표정까지 좋아서 가끔 힘이 들어가지 않은 딱밤을 먹이기도 하는 평범한 연인의 마인드. 택운은 결국 자신에게 숨겨진 양성애적 성향이 재환을 통해 드러났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
‘휴일에 게이 야동이나 보면서 연구를 하고 있으니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사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재환은 저 멀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택운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러분! 저 남자가 바로 제 남자입니다! 제 애인이라구요!
라고 쩌렁쩌렁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광대를 하늘 끝까지 밀어버릴 듯이 찢어지는 입을 억지로 눌러 내렸다. 그리고 살금살금 뒤쪽으로 걸어가서 택운을 놀래키려 하는 순간,
“왔어요?”
“아, 깜짝이야!”
택운이 먼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놀래키는 것은 실패! 택운은 이렇게 자신이 장난을 치려는 것을 귀신 같이 알아차리기 때문에 언제나 역공을 당하고 만다.
재환은 투덜대면서 택운의 옆에 서서 걸었다. 그거 좀 모른 척 걸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하는 생각에 입이 튀어 나온다. 평소에 옆에서 재잘거리는 재환이 입을 다물고 뚱하게 굴자 택운이 반 걸음정도 재환에게로 가까이 붙었다.
“…왜요?”
“향수 냄새가 좋아서.”
“아 뭐야…”
그 말에 사르르 마음이 녹는 건 내가 바보이기 때문일까? 사랑의 바보… 재환은 자신의 유치한 생각에 피식 웃으며 차도에 주차해둔 택운의 차에 올라탔다. 사실 택운은 자차를 몰기 때문에 데이트의 시작은 이것보다 훨씬 더 간단할 수 있었다. 택운이 재환의 집으로 데리러 온다던가, 재환의 가까운 정류장 주변에 차를 대고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재환이 차에 탄다던가. 그러나 재환은 부모님께 택운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도 두려웠고(물론 택운이 동성이기에 학교 선배라던가 아는 형이라고 둘러대도 되는 일이지만 재환은 언제나 부모님을 상대로 하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택운을 만나러 가는 시간 동안 설레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서 언제나 데이트의 목적지나 중간지점까지 직접 가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의외로 택운도 굉장히 로맨티스트라서. 차에서 재환을 기다리는 것보다 차에서 내려 재환이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기를 즐겼다. 재환은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것처럼 택운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왜 나와 있어요? 차에서 기다리면 되지.”
“발걸음이 귀여워서요.”
많은 말이 생략되었지만 몇 달간 택운의 화법에 익숙해진 재환은 알 수 있었다. 택운의 말은 (재환 씨가 나한테로 걸어오는) 발걸음이 귀여워서요. 라는 뜻이라는 걸.
-껍데기는 야한데 알맹이는 로맨틱하기까지… 너무 완벽해…
재환은 안전벨트를 매주는 택운의 가까운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술을 내밀어서 쪽! 뽀뽀했다.
“!”
“헤헤… 그냥요!”
택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재환은 이 순간이 무척 행복했다. 많은 말을 하지 않는 택운이 표정으로 자신에 대한 애정을 보여줄 때. 백 마디의 말보다 사랑스럽다고 웃어주는 입꼬리가 더욱 무거울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 넘치는 것이 모자란 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집안에서 말과 사랑을 가득가득 받으며 자란 재환으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형태의 애정이다.
재환은 택운이 매준 안전벨트를 손에 꽉 쥐고 물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요? 연극? 뮤지컬?”
택운은 보통 재환의 의사를 물어가며 데이트 코스를 짜는 편이라 재환도 데이트날 대강 뭐 할지를 알고 나가는 편이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택운은 아무 것도 묻거나 말해주지 않았고(예를 들면 같이 등산을 갔던 날은 내일은 운동화를 신으라고 말해주었다) 그저 잘 자고 내일 보자는 말만 했다. 그래서 재환은 궁금하면서도 이 궁금함도 색다르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TPO를 염두에 두지 않은 데이트 코디를 고민하는 것도 재밌었고! 지난번엔 뮤지컬을 보러 가느라 나름 차려입었으니까 이번엔 약간 캐주얼하게 가야지. 두 번째로 좋아하는 빨간 조던에 검은 스키니를 입고 빨간 맨투맨 안에 흰 셔츠를 받쳐 입고 블랙 블루종이라는, 빨검빨검의 코디!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어린 애인의 캐주얼함을 어필하기 위해 나름대로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택운이 오늘도 무릎보다 조금 높은 정도의 엄청나게 긴 가디건을 입고 있는 것을 보자, 아무리 그래도 커플인데 택운의 스타일로 코디를 조금 맞출 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다.
“오늘은… 바다 보러 가요.”
“네? 바다요?”
“응. 조개구이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먹으러 가요. 바다도 보고.”
재환은 택운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뭐야- 조개구이가 메인이에요? 바다가 아니라?”
역시 먹보야. 택운은 보기보다 식탐이라고 해아 할까- 먹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자신도 먹는 것을 좋아하지마는 택운이 잘생긴 얼굴을 무너트리며 와앙- 입을 크게 벌려서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왔다. 커피도 좋아하고. 커피랑 같이 쿠키 먹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데 어떻게 살이 이렇게 안 찌지? 툭하면 프로젝트 때문에 밤새면서 일해서 그런가. 재환은 운전하는 택운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신기해했다. 자신도 밤을 새거나 야작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살이 너무 잘 붙는다. 특히 엉덩이와 볼살! 물론 한창 몰입할 때는 온몸에 물감이 묻어있고 그걸 닦기조차 귀찮아서 군것질조차 하지 않고 며칠을 밤을 새가며 작업을 해대느라 그림 하나를 끝내고 나면 살이 쪽 빠져있고는 했지만 그때도 볼과 엉덩이에 붙은 총량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살이 빠지면 튼실한 종아리도 제법 가느다래지는데 왜 엉덩이만…!
-그래도 엉덩이에 살이 있으면 뒷치기 할 때 푹신하고 좋댔어!
“콜록콜록!”
“어? 사래 들렸어요? 물 없나 물?”
재환은 갑자기 기침을 해대는 택운에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물을 찾았지만 택운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재환을 진정시켰다.
“뒷좌석에 담요 있으니까 좀 자요.”
“어디까지 갈 건데요? 막 부산 같은 데 갈 건 아니죠?”
-설마 우리 외박하나? 오늘 막 첫날밤이고 그런 거 아니야? 헐! 그런 거면 미리 말해주지! 준비할 거 많은데..!
재환은 자신도 모르게 잔뜩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으로 택운을 바라보았다. 택운은 그런 재환을 약간 외면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먼 데는 못가요. 그냥 강릉. 2시간 반 정도 걸리니까 조금 눈 붙이면 휴게실에서 깨워줄게요.”
“에이 그래도 애인이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요. 내가 말동무해줄게요.”
하지만 재환은 큰소리치기가 무섭게 금세 곯아떨어졌다. 택운은 신호를 기다릴 때 뒷좌석에서 담요를 가져와서 재환의 위로 덮어주었다.
“재환 씨. 일어나요. 휴게소에요.”
“씁- 네? 휴게소여? 아… 내가 언제 잤지…”
재환은 잠에서 깨어서 어눌한 발음으로 자책하며 택운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바보 멍충이! 모지리! 띨띨이! 기껏 택운 씨가 바쁜 시간 쪼개서 바다에 데려가 주는 건데 옆에서 퍼질러 자기나 하고…! 다음에 안 데려가주면 어떡하려고 그래? 택운이 보지 않게 머리를 퍽퍽 때리고는 붓기를 빼기 위해 열심히 뺨과 코, 입술 옆의 혈을 꾹꾹 눌렀다. 자고 일어나면 코와 입술이 땡땡하게 붓는 것이 콤플렉스라서 인터넷에서 혈자리 지도를 공부해가며 익혀둔 스킬이었다.
“뭐 먹을래요? 아침 안 먹었죠?”
보통 데이트로 점심, 저녁을 같이 먹기에 재환은 아침을 거르고 나왔다. 재환은 휴게소 메뉴판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휴게소 오는 게 되게 오랜만이에요.”
“그래요?”
“가족끼리는 기차를 자주 타고 가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고속도로 휴게실은 학교 수학여행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아요.”
“자주 데려와야겠네. 난 차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거든요. 답사 때문에도 자주 가고.”
“……”
재환은 쑥스러워서 바닥을 보고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첫 연애가 이럴까?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는데,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한 짝사랑만 해서 이렇게 첫 애인으로 택운처럼 큰 선물이 찾아와준 걸까?
택운은 여러모로 재환이 상상한 남자와는 달랐다. 재환은 처음에 택운을 봤을 때 굉장히 나쁜 남자를 기대했다. 야한 얼굴과 몸으로 자신을 마구 휘두르고, 어쩔 수 없는 매력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착취한 뒤 매정하게 버려버리는! 그런 소설 속에서나 볼 법한 나쁜 남자 말이다. 하지만 택운은 재환의 기대와는 달리 굉장히 사려 깊고, 배려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젠틀하고, 쓸데없는 터치를 하지 않으면서도 이상한 타이밍에 귀엽다면서 목을 꼬집고 아프기는커녕 간지러운 딱밤을 날려대서 밤잠을 설치게 하는 남자. “아야야-” 아프지도 않은데 괜히 어리광을 부리면 웃긴다고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려서 웃으면서 뺨을 툭 건드렸다. 그 섬섬옥수가 몸에 닿을 때마다 배꼽 아래가 간지러웠다. 벅벅 긁고 싶어진다. 긴장으로 팽팽해지는 그 느낌. 아니, 긴장이 아니라 열기인가.
“우동 먹을래요? 여기 우동 맛있는데.”
“네. 그거 먹을게요.”
“그럼 앉아있어요.”
재환은 자리에 앉아서 주문을 하고 계산을 하고 물을 떠오는 택운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침대에서도 저렇게 다정할까…
움찔! 왠지 캐셔가 화들짝 놀라는 것 같았지만 재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한이라도 왔나 보지. 재환은 자신이 정전기가 유독 안 나는 편이라서 그렇지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수시로 정전기가 나곤 한다고 부모님께 들어서 타인의 흠칫거리는 행동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택운 씨도 정전기가 잘 안 나는 편인가보네. 우리는 이런 것도 천생연분인가 봐!
재환은 택운이 떠다 준 물을 꼴깍꼴깍 마시며 고작 첫 연애에 천생연분 소리까지 하는 자신을 향해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택운 씨라면… 남자 백 명과 자겠다는 내 일생일대의 꿈을 포기해도 아쉽지는 않을 것 같아.
재환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한 뒤 세웠던 원대한 목표를 포기할 정도로 자신이 택운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놀라워했다. 어느새 이렇게까지 좋아졌지? 분명 시작은 단순히 ‘나 저 남자를 좋아하는구나’라는 작은 깨달음에서부터였는데 그 마음은 눈덩이가 불어나듯 커져서 어느새 인생의 목표까지 바꿀 정도가 되었다.
-자각을 못해서 그렇지 택운 씨야말로 마성의 게이가 틀림없어! 애인이랑 게이바 가보는 로망은 그냥 접어야겠다. 온 게이가 다 꼬이겠네.
재환은 노말이던 택운에게 고백도 하지 않고 눈빛만으로 꼬셨다는 이유로 자신이 혹시 만화책에서만 보던 마성의 게이인 것은 아닐까 장난삼아 하던 고민을 택운을 보며 깔끔하게 접어서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재환은 혼자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느라 택운이 자신의 얼굴을 텔레비전 보듯 구경하며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다 다 왔어요. 일어나요.”
“핫! 벌써요?”
이번엔 진짜 안 자려고 했는데! 뜨끈한 우동으로 빈속을 채우고 이번엔 택운의 말상대가 되어주려고 아이스커피까지 마셨건만 오히려 가득 차버린 배가 독이 되었는지 아까보다도 꿀잠을 잤다. 재환은 울상으로 차에서 내렸다가 눈앞에 펼쳐진 새파란 바다에 으꺅! 하이톤의 비명을 내질렀다.
“바다다!”
“네 바다에요.”
“택운 씨! 바다에요! 엄청 파래!”
재환은 택운의 소매를 붙잡고 얼른 해변으로 뛰어갔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말부터 급격하게 날씨가 추워진 탓에 해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재환은 지금 잠에서 막 깨서 몸에 뜨끈뜨끈 열이 올라 추위를 못 느끼는 것 같지만 이제 곧 춥다면서 근처 아무 가게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뭐… 귀여우니까.’
택운은 재환의 손에 이끌려 바다로 걸어가며 잠에 퉁퉁 부은 얼굴로 신이 나서 웃어대는 재환에게 함께 웃어주었다. 눈이 쌓인 마당을 처음 본 새끼 강아지 같다고나 할까. 별 거 아닌 데이트에도 이렇게 기뻐하며 웃어주니 뿌듯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은데 해외를 가자니 시간의 제약도 있지만 재환의 특성상 외교 문제도 있어서 바로 나가기 어렵다. 나름 최대한 개인 시간을 쪼개서 데이트를 하고 틈틈이 얼굴을 본다지만 그 나이대의 로망인 CC라던가, 같은 대학생 커플에 비하면 데이트도 자주 못할 텐데 재환은 아무런 불만 없이 따라와 주고 있다. 불만이 없다는 건 속마음이 다 들리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라서 반칙이지만 일부러 하는 반칙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아우 추워! 왜 갑자기 추워졌죠?”
아니나 다를까 재환은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코를 훌쩍이며 점퍼를 꼭꼭 여미기 시작했다. 택운은 벌써 차갑게 얼어버린 재환의 뺨을 자신의 목도리로 둥둥 감고 빨갛게 물든 손을 잡아다가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쑥 넣었다. 춥다고 재잘대던 재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마음이 시끄러워졌다. 날씨도 추운 해변가에는 아무도 없는데, 이렇게 훤한 대낮에 손을 잡았다고 아주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다. 자기도 좋으면서.
택운은 꼼지락거리는 재환의 손가락을 꾹 누르며 말했다.
“조개구이 말고 고기 구워먹을래요?”
“아 그럴까요? 근데 방금 전에 먹었는데 바로 먹기는 좀…”
“응. 바로 먹지 말고 마트에서 사가요.”
“네?”
“펜션 잡아놨어요.”
“헐.”
짧은 외마디의 말과 함께 재환의 염파가 폭발적으로 커졌다.
-뭐? 펜션? 펜셔어언?? 외박! 외박하나봐! 대박! 나 외박한다! 엄마 나 오늘 외박해요! 아빠 나 오늘 외박해!! 형아들! 나 오늘 남친이랑 외박한다! 헐. 근데 나 오늘 아침에 화장실 못 갔는데… 약국 있나? 관장약 사야 돼!
택운은 별로 듣고 싶지 않지만 사실은 듣는 게 앞으로의 계획에도 좋은 재환의 염파를 들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재환을 차로 데려갔다. 조수석에 재환을 태우고 아까처럼 안전벨트를 매주는데도 재환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긴장했다.
-으아아 어떡해! 나 오늘 못 잘 거 같아!
‘나도 잘 거라고 생각 안 하거든 꼬마야.’
택운은 그저 재환에게 자신이 익숙해지기를 바랐다. 물론 처음과 같은 설렘도 중요하지만 어느새 만난 지 3달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재환이 자신을 좀 더 편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면 둘의 관계는 좀 더 장기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7살 연상 애인의 흑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마는…’
재환처럼 귀엽고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남자아이가 어디 흔한가. 뭐 택운은 원래 바이가 아니었으니 굳이 남자아이일 필요는 없지만 여자 중에서도 재환과 같은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택운은 자신이 사토라레면 재환처럼 깨끗한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재환이 더욱 대단해보였다. 이렇게 키워준 부모님도 대단하지만 재환이기에 이렇게 착하고 사랑스럽게 자란 것일 테다. 온실 속의 화초와는 다른 의미로, 양지에서 따스한 햇볕만을 쬐며 자란 해바라기처럼 밝은 에너지가 넘쳐난다. 택운은 재환을 만날수록 욕심이 났다. 재환이 사토라레라는 점은 재환에게 전혀 마이너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택운이 자신이 많이 부족한 사람인 것을 알게 해주는 거울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나도 재환에게 더 보여주고 백퍼센트의 진심으로 다가가야 할 텐데.’
지금껏 자존심 때문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해서 어긋나고, 봤던 것조차 모른 척 지나갔던 연애들과는 달리 재환에게는 전심전력으로 노력하게 된다. 그건 재환이 가식 없이 솔직하게 자신에게 애정을 부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택운은 미리 찾아두었던 마트에 들려서 재환과 고기와 라면, 과일, 술, 안주거리 등을 잔뜩 샀다. 재환이 핸드폰을 두고온 척 콘돔을 사러 들어간 것도 모른 척했다. 어차피 못 쓸 텐데. 라는 생각을 했지만 사실 택운도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준비해두기는 했기 때문이다.
택운과 재환은 예약해둔 펜션에 가서 고기를 구워먹고 술을 마시고 티비를 보다가 술 냄새와 고기 냄새가 잔뜩 나는 입술로 키스했다. 매번 가글이나 양치를 한 후에 했던 청량한 키스에 비해서는 비위생적이지만, 어차피 키스란 그런 것이다. 침샘에서 분비되는 소화액, 즉 침을 나누는 행위. 아무리 깔끔을 떨어도 결국은 섞여버리고 만다. 서로의 일부가. 서로의 세포가.
택운은 재환의 혀를 휘감으며 하나가 되고 싶다고 애원하듯이 재환의 몸을 더듬었다. 재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부르륵! 부르르륵! 매너모드의 택운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 택운은 재환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와서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잠금 화면을 풀었다.
-두 분의 100일을 기념하여 펜션 로비에 케익과 와인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재환 군의 부모님께도 외박 사실을 미리 말해두었으니 내일 오전에 천천히 출발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아닙니다.
택운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고 반쯤 풀린 눈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재환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100일인 거 알아요?”
“어? 그래요?”
그러니까 다음에 하래.
택운은 아무 것도 모르는 재환의 앞에서 차마 짜증은 내지 못하고 그저 재환의 사랑스러움을 원망하며 로비에서 케익과 와인을 가져왔다. 재환은 기쁨의 비명을 지를까봐 손으로 입을 막는 대신 염파로 대박이라며, 택운 같은 남자는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쩌렁쩌렁 외쳤다.
택운은 재환과 함께 바람을 불어 숫자 초에 붙인 불을 끄며 재환에게 속삭였다.
“…손만 잡고 잘게요.”
“…네.”
-꼭 안 그래도 되는데…
‘나도 그렇긴 하지만, 첫 경험이니까 좀 더 준비해서 하는 편이 좋을 거 같기는 해.
다양한 시청각자료와 후기를 찾아본 결과 첫 경험은 지옥과도 같다는 걸 알고 있는 택운은 공무원 stop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따를 만한 가치는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나중에 재환과 첫날밤을 보낸 택운은 이 날의 결정을 후회한다. 재환은 전립선을 찔러주지 않아도 내벽에 비벼지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느끼는 천생 바텀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택운과의 속궁합도 최상급!
‘그냥 그때 무시하고 할 걸!’
아무리 후회해보아도 이미 늦은 일. 애석하게도 택운과 재환이 같이 첫날밤을 보내게 된 것은 이날로부터 제법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The End
-------------------------
개인지로 냈던 글입니다~
쟈니 생일 때 올리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바빠서 이제야 올리네요!
'tex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랍켄] 힘을 내요, 미스터 김 (0) | 2021.04.28 |
---|---|
[Vch 홍켄] 이야기 두개 (0) | 2021.04.28 |
[홍켄] 우리의 콘트라포스토(for.파프님) (0) | 2021.04.28 |
[Vch 랍켄] 만화 연출을 따라하는 놈과의 친구를 그만두었다 (0) | 2021.04.28 |
[랍켄홍] Error: code 01,02,03 (0) | 2021.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