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환이 생일 기념 홍켄픽!
으아아;;; 깜빡 잊고 안적었는데 섹스피스톨즈 세계관입니다ㅠㅠ!!
“어제 이재환 무대 봤어? 대박.”
“걔 실제로 본 거 처음이야. 노래 진짜 잘 부르더라. 진짜 멋있어!”
“사진이나 영상보다 훨씬 낫던데? 코 큰 것도 모르겠어, 그냥 잘생겼어."
홍빈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쏟아져나오는 중도로 성큼성큼 큰 보폭을 내디뎠다. 마치 펄떡이며 높은 계곡으로 몸을 내던져 종족 번성의 목표를 이루는 연어처럼 대단히 중대한 사명이라도 짊어진 것인 양 어깨가 부딪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사람들을 거세게 헤치며 지나갔다. 기분 탓인 줄을 알면서도 주변에서 재잘거리며 떠드는 말들이 모두 재환에 관한 이야기들인 것만 같아 표정이 점점 험악해진다.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번 공연 엎자고 한 건데. 이미 손에서 떠나버린 일이지만 화가 난다. 괜히 입술을 짓씹으며 괴롭힌 탓에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가 터지고 말았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자마자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이재환. 아주 기승 전 이재환이다. 홍빈의 작은 머리통은 언제나 재환의 생각뿐이다. 다른 생각 좀 하자, 오늘까지 뭐 해야 하더라? 과제가 뭐지? 억지로 생각의 주제를 바꿔보아도 결국 그 얄팍한 물음은 해변에 쓴 글씨처럼 끊임없이 넘실거리는 이재환이라는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려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빈이 너 또 입술 뜯었지.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재환의 핀잔을 상상해본다. 홍빈은 예전엔 손톱을 물어뜯곤 했다. 지금은 입술로 타겟을 바꿨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처를 매만져주는 재환이 좋으니까. 손끝보다는, 입술을 만져주는 편이 더 좋으니까.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재환이지만 다친 경우에는 다르다. 약지에 연고를 발라 입술의 상처에 가볍게 문질러준다. 약이 없을 땐 급한 대로 투명한 립밤을. 그 손끝에서 풍겨오는 물 냄새 같은 체취가 너무 좋아서, 홍빈은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하루종일 몸을 담그고 있던 적이 있다.
[홍켄] 프리 윌리 Free Willy
"빈아~ 여기야!"
재환이 활짝 웃으며 홍빈에게 손을 흔들었다. 홍빈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 대강 흔들어주곤 재환의 옆을 훑었다. 학연, 택운, 원식에다가 작년까지만 해도 무리에 없던 상혁까지 합세했다. 기껏 대학까지 와서도 또 같이 다니지. 질리지도 않나 싶지만 일단 홍빈 본인이 가장 질리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으므로 할 말이 없다.
"한상혁, 너는 새내기가 이런 늙은이들이랑 뭐하냐. 친구 없어?"
홍빈이 재환의 맞은편에 앉은 상혁을 옆자리로 밀어내며 상석을 차지했다. 상혁은 투덜대며 항의하듯 외쳤다.
"아, 그전엔 고딩이라고 따돌리더니 왜 대학생이 돼도 뭐라 해요!"
"시끄럽고 빈아, 음료수 시키고 와. 1인 1컵 해야지! 여기 도장 받아오구."
학교 안에 있는 작은 카페는 수업 전후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가는 사람이 많고 만석이 되는 경우도 별로 없다. 1인 1음료라는 영업방침이 딱히 없다는 이야기다. 그저 단골가게를 만들거나 쿠폰을 채워서 공짜 음료를 먹는 것을 좋아하는 재환의 습성인 것을 아는 홍빈은 카운터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환은 생글거리며 도장을 8개 정도 채운 카페 쿠폰을 내밀었다. 이 중 5잔은 방금 마신 음료로 찍은 거겠지. 홍빈은 피식 웃으며 머니 클립에서 꽉 채운 쿠폰 몇 장을 내밀었다.
"형 가져."
"헐! 이걸 언제 다 모았어? 대박! 이게 다 몇 잔이야?"
쿠폰 한 장에 찍힌 도장은 10개씩. 재환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홍빈이 내민 네다섯 장의 꽉 채운 쿠폰을 바라보자 유쾌한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홍빈이 교내 카페의 도장을 모은다는 것은 과에서 꽤 유명한 얘기다. 과 사람들은 낯선 이들에게 그다지 살갑지 않은 홍빈에게 말을 걸기 위해 도장이 여러개 찍힌 쿠폰을 건넸다. 재환이 기뻐할 것을 떠올린 홍빈이 대외용 미소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자 빛보다 빠르게 소문이 번져 나갔다. 거리에서 마주치면 홍빈에게 인사 한번 건네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의 여자들도 도장을 모아다가 홍빈에게 진상하듯 두 손으로 바쳤다.
홍빈은 이런저런 얘기를 쏙 빼놓은 채로 재환의 쿠폰을 가져가 음료를 주문했다. 알바생은 쿠폰에 도장을 야무지게 찍어주며 갑자기 몰려드는 손님들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좀 한적했던 카페가 금세 여자들로 바글바글해진다. 아마도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6인방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구경하러 온 것이리라. 테이블이 꽉 차자 테이크아웃 줄이 눈 깜빡할 사이에 길어진다. 하지만 다들 메뉴판에는 관심도 없고 아닌 척 뒤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아예 대놓고 보는 사람도 있다. 홍빈은 음료를 받아가며 알바생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담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알바생의 표정이 반사적으로 풀어진다. 눈썹을 조금 눕힌 것만으로도 쌓인 피로와 짜증을 없애는 대단히 강력한 위력의 미소였다.
"뭐 시켰어?"
"체리 에이드."
"앗, 입 텁텁했는데! 나 한 입만."
"마셔."
"고마웡~"
큰 눈을 접어가며 웃어주고는 새로운 빨대 가져와서 에이드를 마신다. 입안이 톡 쏘는지 온 얼굴을 구겨가며 찡그리는데 연하도, 동갑도 아니고 심지어 연상의 남자에게 이런 참을 수 없는 귀여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홍빈은 정말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래 봤자 이미 몇 년째 귀여워하고 있지만. 눈을 내리깔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속쌍꺼풀 라인이 곱다. 매번 봐도 질리지 않아서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재환이 눈치를 보더니 에이드를 몇 모금 더 꼴깍꼴깍 마시고 내려놓았다. 야아, 많이 마신다고 구박 하냐아? 투덜대며 자기가 마시던 빨대를 뽑아 구겨버리고는 새 빨대를 꽂아 홍빈 앞으로 밀어주었다. 헐랭한 것 같으면서도 이런 거에는 철저하다. 아마 그렇게 이십 년이 넘도록 교육 받았겠지.
사실 에이드도 테이블 위에 있는 음료를 싹 훑고 입이 텁텁하겠다 싶어 시킨 거지만 재환이 그걸 눈치채주길 바라는 건 차라리 재환이 자신에게 고백해주길 기도하는 것만 못한 짓이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
"어제 공연 너무 잘 봤어요, 근데 혹시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사진은 안 돼요."
말없이 라떼만 마시던 택운이 여자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학연은 울상을 짓는 여자들을 달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병 주고 약 주고. 둘은 거의 콤비나 다름이 없다. 사실 사진을 아예 찍지 못하게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제 축제에서 선보인 라이브 공연만 해도 이미 핸드폰, DSLR 등의 다양한 기기로 찍혀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퍼지고 있을 것이다. 방송국 카메라도 온 것으로 보아 어쩌면 케이블 뉴스에 잠깐 나올지도 모른다. 지금 카페에 앉아있는 것도 무음 카메라로 꽤나 찍혔겠지. 하지만 같이 찍어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한 번 허락해버리면 모두가 요구하게 될 테니까. 뒤에서 왜 나랑은 안 찍어주느냐고 욕하겠지. 게다가 이런 걸 잘못 찍어주면 얼굴이 팔리고 욕을 먹는 것은 5명이 아닌 재환이다.
"미안, 어제 공연한 것 때문에 평소보다 시끄러운가 봐"
"...괜찮아."
"그래, 형! 형 잘못이 뭐가 있어. 우리도 재밌었는데."
어깨가 축 처진 재환을 택운과 원식이 서툴게 위로했다. 차학연, 정택운, 김원식, 이홍빈, 한상혁. 나이도 성격도 다른 이 다섯 명이 이렇게 다 함께 친해질 수 있던 것은 몇 년 전 정부에서 소규모로 진행한 한 프로젝트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대상은 이재환. 프로젝트의 목적은 속된 말로, '이재환 친구 만들어주기'였다.
이재환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가 아주 작았을 때였다. 재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톱스타들의 뺨을 후려칠 정도로 유명했고 지금도 유명하며 미래에는 더 유명해질 것이다. 그런 재환에게 사생활이란 개념은 체험으로 완벽하게 아는 것이 아닌 어느 정도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디까지가 사생활 침해지? 라고 물어본다면 재환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글쎄요, 몰래 사진을 찍으면 침해 아닌가? 쫓아다니는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것 같은데...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 재환이 좀 살려주세요!”
십수 년 전, 6살짜리 유치원생 남자 어린이가 차에 치였다. 아이들의 하굣길에 흔히 일어나는 사고였다. 아이의 살갗이 거친 아스팔트 도로에 갈리고 팔다리가 부러졌으나 생명에는 지장 없이 무사했다. 뉴스는커녕 인터넷 기사도 나지 않을 만큼 흔해빠진 사고였다. 하지만 이 사고는 뉴스 속보는 물론, 방송 삼사의 9시 뉴스, 심야뉴스, 새벽 뉴스, 다음날, 아니 몇 날 며칠을 각종 미디어에서 방송했다. 그건 이재환이 돌고래이기 때문이다.
-중국 양쯔강 돌고래의 멸종과 메콩강 민물 돌고래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 가운데, 며칠 전 한국에서 최초로 민물 돌고래가 발견되었습니다.
원인들에게는 한강 민물 돌고래의 발견이라는 말로 포장된 속보였다. 반류 뉴스는 한반도에서 멸종한 줄 알았던 돌고래 반류의 발견이라는 정확한 속보가 떴다. 사실 희귀종의 반류가 나타난다는 것은 그 생물이 그 지역에서 아직 존재한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원인들의 뉴스가 아주 거짓말인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아직 온몸에 붕대를 감고 깁스를 하고 누워있는 어린아이를 상대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재환은 상처가 다 낫자마자 연구소로 보내져 장기간에 걸쳐 온몸을 샅샅이 검사당했다.
재환의 가족 중 재환만이 돌고래로 태어났다. 격동의 근현대로 들어와서는 맥이 끊기다시피 했지만 수중계 반류 가문인 재환의 외가 쪽 가문은 조선 시대에는 돌고래 혼현이 종종 태어나곤 했던 가문이라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족보와 기록을 살피고 재환의 혼현이 거의 선조귀환에 가깝게 발현된 것이라는 사실을 안 부모님은 재환의 혼현을 철저하게 악어로 위장하고 반류 유치원에 보냈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재환의 어머니는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에게 닥친 끔찍한 사고에 너무 놀라 의사에게 재환의 위장 혼현이 아닌 진짜 혼현을 말해버렸고 의사는 그 정보를 바로 언론에 팔았다. 30분도 되지 않아 기자들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한 시간 만에 고위 관료들과 국회의원들이 병실을 점령했다. 그 날을 기점으로 한 가족의 역사가 낱낱이 파헤쳐졌다.
반류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과시욕이 강하다. 인간이 이성의 동물인 것처럼 아직 진화되지 않은 반대편, 동물적인 본능 속엔 약육강식의 논리가 조금도 풍화되지도 않은 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강한 것을 더 강하게, 약한 것은 동정 없이 짓밟아버리는 자연적인 본능. 혼현을 들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외려 인간적 논리에 가깝다. 서열정리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냄새를 풍길 필요는 있다는 것이 본능에 더 가까운 감각이다. 특히나 강한 중종들일수록 자신의 계급 페로몬을 숨기려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냄새로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뽐내는 과시욕. 그럼에도 수가 적은 희귀 반류들은 자신의 계급이나 혼현을 철저히 숨긴다. 그 이유는 딱 하나, 지극히 인간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다. 신변의 위협. 반류가문은 경종이나 중종에 상관없이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지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번영이 반류적 특성에서 나왔다고 믿는다. 가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든 번성한 가문은 이 미신을 믿는다. 심 봉사가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시주하면 자신의 눈이 뜨이게 될 것이라고 믿었듯이 '더욱 강한 반류가 있는 가문이 이긴다'는 현대사회에서 지극히 비논리적인 논제를 종교처럼 신봉한다. 장님이 된 아버지를 지금껏 먹여 살린 심청이를 팔아치울 만큼의 비윤리적인 행위는 그 믿음의 옵션이다.
경종, 중간종 가문은 자신의 가문을 중종으로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중종 가문은 가문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혼현이 강한 희귀종과 중종들을 납치한다. 지금도 그런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한국 밖으로 팔려나가는 것은 아니니 뉴스에 나오진 않는다. 그저 가문끼리 치고받고 싸울 뿐. 절대 뚫리지 않는 창과 방패가 서로 싸우듯이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꽁꽁 무장하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선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아직 힘이 약해서 스스로를 제어하기도 어려운 어린 반류들의 등하굣길이 제일 위험하다.
“선생님, 재환이 형아는요?”
재환은 사고 이후로 유치원에 나가지 않았다. 같은 반 친구들이 열심히 쓴 편지와 위로의 말을 들고 문병을 자주 오던 유치원 담임 선생님은 재환이 다시 유치원에 가는 날 그를 납치하려다가 경호원들의 손에 붙잡혔다.
한국에 사는 반류 중에 재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북한 반류 모임에서도 재환의 이름이 언급된다는데, 남한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야 좀 있겠지만 거의 분기마다 수십 개씩 쏟아져 나오는 인터넷 기사 한 번 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공교육을 받지 않고 홈스쿨링을 하며 집 밖으로 자주 나가지 않는 재환이지만 고화질의 파파라치 사진은 해마다 커가는 재환의 사진을 국민들에게 공개했다. 돌고래 왕자님, 혹시 우울증? 넘어져서 우는 이재환, 형들과의 불화의 가능성이 있어..... 되도 않는 자극적인 기사들. 가격태그에 영이 몇 개나 붙은 좋은 카메라를 들고 재환의 주변을 썩은 고기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마치 그것이 언론의 의무라도 되는 양.
한 나라의 외교부는 대개 중종, 그중에서도 희귀종으로 꾸려진다. '얼마나 강하고 희귀한 토종 반류가 그 나라를 대표하는가'가 외교의 핵심이다. 한국에는 반달가슴곰 반류가 있어 가까스로 체면치레할 뿐이었다. 반달가슴곰은 결국 아시아흑곰의 아종일 뿐, 전 세계적인 시야로 봤을 때 전혀 희귀성이 없다. 호랑이야 흔한 반류고.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려고 전통과 삶의 질을 짓밟고 아등바등 노력한 결과로 경제력이나 문화력으로는 딸리지 않게 되었는데 반류의 다양성 면에서 딸리다니, 위의 꼰대들로서는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대에 들어서 혼혈 반류들이 많이 태어났지만 토착종이야말로 나라의 국력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희귀종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라 그저 타개책 없이 답답해하고만 있던 차에 재환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몇 남지 않은 민물 돌고래. 한국엔 인어는 물론, 상어나 고래 반류도 없었기 때문에 돌고래인 재환의 존재가치는 천정부지로 솟았다. 정부는 재환이 성인이 되어 외교관이나 정치인으로 활약하기를 간절히 바랐고, 이를 위해 재환의 가족에게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환의 홈스쿨링에 각종 유수 대학의 교수를 보낼 만큼 말이다.
그런 의미로 재환의 고등학교 입학은 한국 반류 세계에서 손으로 꼽히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사립 반류 유치원을 중도에 그만두고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모두 홈스쿨링으로 이수한 재환은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다. 그런 아들을 걱정한 재환의 부모님은 사회성 함양을 위해 고등학교만큼은 직접 다니게 하기로 했다. 각종 언론과 주변에서 걱정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재환과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두 형은 평범한 반류였지만 재환의 명성 때문에 학교를 다닐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재환의 소식을 알기 위해 따라다니는 기자들, 두 형을 빌미로 재환을 요구하거나, 돌고래가 나올 수 있는 가문의 피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 때문에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재환 본인이 학교에 다닌다면 더욱 심하겠지.
“아, 이재환! 난 이 빵 싫다고!”
“아, 겁나 까다로워. 주는 대로 먹어 좀. 그리고 '형'자는 왜 은근슬쩍 떼는데?”
재환은 코를 찡그리며 원식의 구레나룻을 잡아당겼다. 아아! 아파악! 걸걸한 동굴 목소리로 소리치는 원식을 보며 반 아이들이 피식 웃었다. 재환이 들어온 문으로 홍빈이 등장했다.
"거봐, 김원식은 그 빵 싫어한다니까 내 말 안 듣지."
홍빈은 양팔로 끌어안고 있던 빵 한 무더기를 원식의 책상에 쏟아냈다. 아니이, 그렇게 맛이 다른 것도 아닌데 사온 사람 성의를 봐서 그냥 좀 먹으면 배탈이라도 난대? 재환이 입을 삐죽거리며 뚱바에 빨대를 꽂아 쭉 마셨다. 귀여워. 원식은 빵봉지를 뜯다 말고 재환의 목을 벅벅 긁었다.
"아파! 쫌! 누가 너 곰 아니랄까 봐 다 긁어대냐!"
재환은 처음으로 갔던 고등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 재환이 모두를 왕따를 시킨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사람과 정에 굶주린 재환이 다가오는 이를 마다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통해 유추하자면 왕따를 당한 것이 분명하다.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격렬한 사춘기를 겪는 중이고 반류는 호르몬에 지배받기 때문에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휘몰아치는 청소년기 싸이클론 속으로 평범한 생활에 대해 면역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반류의 슈퍼스타 재환을 똑 떨궈 놓은 것이다. 쟤가 그렇게 잘났어? 실제로 보니까 우리랑 다를 것도 없네. 태어나길 편리하게 태어난 거지. 학교에서 재환의 취급은 외눈박이 마을 속의 두눈박이 병신 정도였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우리 속 동물처럼 보는 환경에서 남에게 벽을 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두 종류로 갈렸다. 재환을 신기하게 보거나, 꼬시려고 달겨드는 타입.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지만 직접 몸으로 겪자 재환은 학교에 가기 싫어졌다. 그렇게 가고 싶던 학교였는데 벌써 가기 싫어지다니.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며 걱정하는 부모님을 안심시켜 가면서 꼬박 5개월을 참다가 결국은 두꺼운 이불 속에 틀어박혔다. 나 학교 안 갈래요. 너무 힘들어.
정부는 허둥지둥 재환을 위해 돌고래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열었다. 청소년 상담사를 섭외하고 상담사의 추천으로 또래 친구들이 될 만한 아이들을 뽑았다. 엄중한 심사 끝에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게 된 인원은 5명, 바로 학연, 택운, 원식, 홍빈, 상혁이다. 선정 기준은 집안, 성격, 교우관계 등이었지만 가장 필수적인 기준은 따로 있었다. 재환과 함께 해파리 유치원에 다녔을 것. 재환을 포함한 이 6명은 모두 같은 유치원 출신이다.
자기 나이 또래를 만난 경험이 워낙 적은 재환은 유치원을 도중에 그만뒀음에도 불구하고 5명을 정확히 기억했다. 또래 친구가 없어서 예전부터 유치원 사진만 끝이 다 헤지도록 봤다고 한다. 티비 속 뉴스로만 보던 소년을 앞에 두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5명에게 재환은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여니형, 우니형, 빈이, 식이, 혁이.”
웅얼웅얼, 발음도 안 좋은 유치원 때 부르던 짧은 애칭 그대로였다. 그 살가운 애칭에 학연이 제일 먼저 경계를 풀고 웃으며 재환을 반겼다.
“재화나! 형 기억해?”
“당연하지!”
재환은 자신을 끌어안는 학연의 동작에 표정을 굳혔지만 얼른 표정을 풀고 마주 안았다.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아 반사적으로 지은 표정인 듯했다. 상담사에게 듣자하니 재환은 혹시 모를 사고를 위해 남이 닿는 것을 조심하라는 교육을 반복해서 받았다고 했다.
말이 사회적응 프로그램이지 내용 면에서 별다른 건 없었다. 같이 MBTI 검사 하기, 보드게임 하기, 나가서 영화 보기, 놀이동산 가기 같은 지극히 평범한, 하지만 재환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을 그런 일들. 신이 나서 몸을 들썩이는 재환을 보며 차라리 돌고래와 놀아주기란 이름이 더 맞는 것 같다고, 5명 모두 똑같이 생각했다.
약 6개월간의 사회적응 프로그램이 끝나고 재환은 다른 학교에서 다시 한 번 고1이 되어 홍빈, 원식과 함께 입학했다. 학교 측에서는 재환이 입학생 선서를 읽어주길 원했지만 재환은 이미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러웠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선서는 홍빈이 대신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 큰 키, 여물어 가는 남자다운 몸, 그리고 그 모든 장점을 잊게 만드는 그림처럼 잘생긴 얼굴. 그리고 중종 혼혈과 가문. 재환만 없었다면 홍빈이 학교의 제일 가는 유명인사가 될 터였다. 재환의 별명은 돌고래 왕자님, 홍빈의 별명은 호랑이 좌의정였다. 원식은 흑곰 우의정.
같은 학교인 학연과 택운은 고3이었지만 자주 1학년 교실로 내려와 재환과 놀아주다 가곤 했다. 학연은 처음부터 재환을 귀여워했고 살갑고 잘 챙겨주는 섬세한 성미로 재환을 챙겼다. 재환은 예전부터 알던 형인데다 자신에게 아낌없이 호감을 드러내는 학연을 엄청나게 따르게 되었다. 그에 비해 택운은 고작 6개월로 친해질 수 있는 쉬운 성격이 아니었지만 재환은 아버지가 택운과 같은 악어라서 쎄한 거에는 익숙하다며 오히려 더 친근감을 보였다.
프로그램은 끝이 났지만 6명은 자주 모였다. 학연은 중학생이라 왕따 당하는 기분이라고 투덜대는 상혁이를 달래며 재환과 손을 잡고 나머지를 끌고 쏘다녔다. 빈말로라도 즐겁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홍빈은 자신이 언제부터 재환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진다. 홍빈은 반류는 이럴 때도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이성을 제어하기 힘든 순간에 본능적인 혼현이 드러나는 것처럼 홍빈 자신이 마음의 방향을 잡지 못하자 몸이 알려주었다.
우선 재환의 기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재환의 표정 변화를 세밀하게 살폈고 기민한 오감을 오로지 재환의 편의를 맞추는 데에 사용했다. 저 멀리에서도 재환을 볼 수 있었고 재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냄새. 꽃을 피우는 봄비 같은, 넘실거리는 고요한 호수 같은, 힘차게 흘러가는 커다란 강물 같은 활기차고 생명력이 넘치는 물 냄새. 홍빈은 어느 날, 원인의 시력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에 있는 재환의 냄새를 알아차리는 자신에게 놀랐고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재환을 보며 깨달았다. 아, 내가 이재환을 좋아하는구나. 그것도 엄청나게. 아웃포커싱을 해서 재환의 웃는 모습만 남긴 것처럼 주변은 보이지도 않았다. 흑백의 세계 속에서 재환만이 선명한 색깔로 빛났다.
재환은 수영시간을 좋아했다. CA도 수영부로 들었다. 수중계 반류들로 가득 찬 수영부였지만 재환은 느낌이 달랐다. 뱀이나 악어처럼 물속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물을 밟고 밀어내듯 경쾌했다. 어찌나 신나게 수영을 하는지, 재환이 수영을 하러 올 때면 고3 선배들까지 와서 구경할 정도였다. 재환은 수영할 때의 자신을 구경하는 사람들만큼은 거부하지 않았다. 수영을 잘하는 것도 돌고래의 특성이긴 하지만, 그저 돌고래 이재환 그 혼현 자체가 아니라 '수영을 잘하는 이재환'을 구경한다는 것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홍빈은 CA는 농구부였다. 호랑이가 물을 좋아한다지만 그건 다른 고양이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물에서 유영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공용으로 쓰는 찝찝한 물에 몸을 집어넣고 싶지는 않다. 집에 수영장이 있기도 했고. 게다가 수중형 반류들이 가득한 수영장에서 무슨 말을 들으려고 수영부에 들겠는가. 재환과 함께 수영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장점이지만 홍빈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들 수 없었다. 자신의 흑심이 너무 노골적이라 차마 실천으로 옮길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어느 날 홍빈은 연습경기가 일찍 끝난 탓에 재환이 수영하는 거나 구경하러 갈까 싶어 수영장 건물에 들어갔다. 수영부도 일찍 끝났는지 덜 마른 머리카락을 털며 학생들이 우르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재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더 수영하다 나오나 싶어 홍빈은 대강 방문자용 슬리퍼를 꿰어신고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하, 형 그만! 나 물 먹었어!"
작게 첨벙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수영장 벽을 때렸다. 물 먹은 공기 중으로 듣기 좋은 재환의 목소리가 웅웅 울린다. 홍빈은 수영장 특유의 염소 소독약 냄새 사이로도 재환의 냄새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재환의 향기를 가리는 것은 소독약 냄새보다 더 독한 다른 남자의 냄새였다. 언뜻 맡기엔 재환의 것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 짙고 깊은 늪의 냄새, 잔인하고 지배적인, 피비린내를 풍기는 악어 냄새.
"...언제 왔어?"
"지금 막. 둘이 수영하고 있었어?"
정택운.
홍빈은 자신을 탓했다. 왜 몰랐을까. 생각해보면 재환의 눈은 택운을 향할 때 가장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인 걸 알면서도 매번 별일 없이 3학년 교실까지 오르락내리락, 탑에다 숨겨둔 공주님을 보러 가듯 애닳아하며 찾아가던 것을 보면서도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재환이 오지 않으면 학연의 손에 이끌려 같이 내려온 척하며 부드러운 재환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듯 매만지고 가곤 하는 택운을 왜. 이 지독하게 달콤한 냄새를, 왜 맡지 못했을까.
택운은 재환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채로 물 밖으로 나왔다. 홍빈이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자 재환은 택운을 밀어내며 다급하게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우니형이 악어잖아. 추워서 그러는 거야. 피가 차가우니까... 되도 않는 변명을 듣다 보니 눈가가 축축해졌다. 보기가 괴로워 시선을 살짝 돌리자 수영장에서 올라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택운이 홍빈의 어깨를 잡았다. 넌 몰랐겠지만 난 알고 있었어. 희고 커다란 손이 강한 악력으로 말했다.
그 뒤로 홍빈은 넋이 빠진 사람처럼 지냈다. 그저 좋아하는 것에 급급해서, 재환의 마음까지 살필 여력이 없었다. 재환의 마음을 알았다면, 조금 더 천천히 좋아할 것을. 조금 덜 좋아할 것을. 그것이 가능했는가 하는 문제는 뒤로하고 그저 후회했다. 왜 하필 정택운이야? 괜한 원망도. 다른 사람이었어도 납득하지 못했을 거면서 그의 냄새가 단지 늪처럼 불길하다는 핑계로 재환을 마치 거미줄에 붙잡힌 나비처럼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택운은 금방 졸업할 거니까, 이제 반 학기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때 사건이 터졌다.
-돌고래 이재환, 3선 의원의 아들과 열애 중?
-정태환 의원, 이재환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 확대 꾀하나
선거가 가까이 다가오며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이 높아질 때에 맞춰 기사가 떴다. 학교 수영장에서 끌어안고 있는 택운과 재환의 사진이었다. 택운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 각도였으며 모자이크 처리까지 되어 있었고 재환의 얼굴만 선명했다. 수영장에서 막 올라와 물에 젖은 채로 찍힌 모습이라 사진만 보면 거의 전라에, 야릇한 상황으로 보였다. 시기 적절성, 화제성, 정치성까지 두루두루 갖춘, 완벽하게 연출된 상황이었다. 그 주인공들이 진심이었단 것만 빼면 말이다.
이번 선거로 뒷말 없는 4선 의원이 되어 원내대표를 지내고 종래엔 대통령까지 꿈꾸던 택운의 아버지는 이런 식의 가십을 참아내질 못했다. 게다가 택운만 몰랐지 이미 택운의 이름은 여러 좋은 혼담 자리에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반류는 원인보다 결혼을 일찍 한다. 중종에다 가문이 좋을수록 그 시기는 더 빨라진다. 계급이 높을수록 번식력이 떨어지는 탓이다. 정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얼른 다른 상대를 찾아야 해서 결혼은 빠를수록 좋았다. 반류에게 연애는 물론, 이혼 한 두 번이야 별거 아닌 일이지만 택운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상대가 너무 나쁘다고 생각했다. 하필 골라도 이재환 같은 걸. 재환은 국가적으로 탁월히 이용될 도구지 연애나 결혼의 대상은 될 수 없었다. 그것도 곱게 키운 막내아들의 짝으로는 더더욱.
택운은 수능도 보지 못한 채로 강제 유학길에 올랐다. 배웅을 나간 학연이 말해주기를 공항에서도 핏대 선 붉은 눈으로 이재환만 찾다가 비행기에 탔다고 했다. 희고 잘생긴 얼굴이 온통 푸른 멍투성이였다고 전했다. 4명은 택운을 안타까워했지만 불행히도 재환의 상황은 더 심했다. 국민의 혈세로 상류층과 연애놀이나 하는 거냐는 악플과 괴롭힘에 시달렸다. 학교에 나오지도 못했다. 학교와 집 앞에 진을 친 기자들 때문이었다. 홍빈과 원식이 기자들을 헤치고 재환의 집 안에 들어서자 재환의 어머니가 방까지 안내해주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똑똑. 재환이 형? 괜찮아? 들어갈게. 원식이 방문을 열었다.
홍빈은 그 슬픔의 냄새에 압도당했다. 짠 소금의 냄새. 온통 울음으로 가득한 재환의 방.
"원식아... 흐어엉..."
재환은 퉁퉁 부은 눈으로 울고 또 울었다.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고 켜져 있는 화면은 학연이 보내준 출국하는 택운의 사진이었다.
홍빈과 원식이 곁에 있어준 고작 몇 시간은 재환의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홍빈은 재환의 집을 떠나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재환의 가족은 파파라치 때문에 철통 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비싼 아파트에 살았다. 하지만 홍빈의 눈에 재환은 높은 탑 안에 갇혀서 울고 있는 공주님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제발 울지 말고 정신 차려, 이미 너의 왕자님은 너를 떠났어. 계속 울어봤자 너만 힘든거란 말이야.
점입가경이라는 말을 해야 할까, 재환은 그 상태로 택운의 부모까지 만나야 했다.
"우리 택운이랑 만나지 말아줘요. 그 애는 집안끼리 약속한 결혼자리가 있어요. 부탁합니다."
네이버 초록창에 이름 두 자만 입력해도 자동완성으로 진짜 이름이 뜨고, 검색하면 사진과 경력이 뜨는 대단하신 택운의 아버지와 택운의 어머니가 늦은 밤 직접 재환의 집으로 찾아와 고개를 조아렸다. 재환의 부모는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재환은 그제야 자기가 지닌 파괴력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자신의 열애기사가 수십 개의 다양한 언어로 쓰여진 것을 보았을 때보다 더욱 실감이 났다. 아, 나 때문에 엄마아빠가 모르는 사람한테 고개를 숙이고 있어. 나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가족은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너무 힘들게 살고 있었구나. 그리고 난 어쩌면 엄마와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정말로 어쩌면 나는 국가가 정해주는 사람이랑 결혼해야 될지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재환은 평생을 평범하지 않게 살아왔기 때문에 평범한 미래를 상상하지 말았어야 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환의 알맹이는 너무 보통 남자여서, 정말로 평범한 보통 사람이어서 보통사람들이 꾸는 보통의 행복한 꿈을 꿔버렸다.
3주 만에 등교한 재환은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로 시들어버린 어린 나무같았다. 그 3주 동안 택운의 아버지는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이용해 스캔들을 가라앉혔고 수차례의 반박기사와 정정기사는 아직 어린 재환마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혔다.
몇 주 만에 등교한 가십의 주인공을 구경하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복도가 북적거렸고 홍빈과 원식은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내며 성난 페로몬을 뿌렸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홍빈과 원식처럼 강한 두 중종의 날이 선 페로몬을 뚫고 올 수 있는 건 그 역시 강하면서 둘과 친분까지 있는 학연밖에 없었다. 학연은 재환과 홍빈, 원식을 댄스부 연습실로 데려갔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에 네 명의 모습이 비쳤다. 막혀있는 공간에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재환을 지독하게 안정시켰다. 학연이 재환의 마른 어깨를 안아주자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재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말고... 응? 형아가 아무것도 못 해줘서 미안해."
"아니, 아니야. 내가 여기저기 폐만 끼치고... 바보 같은 거 아는데, 난 정말 몰랐어서..."
재환은 편하게 울었다. 난 정말 바본가 봐. 평생 이렇게 살아서 내가 남한테 피해를 주는지 몰랐어. 우니형도, 우리 엄마아빠도, 형들도 나땜에 이렇게 힘들어지는 줄 몰랐어. 진짜 몰랐어. 아무도 나한테 그런 거 얘기 안 해줬어. 꺽꺽 소리를 내며 서럽게 우는 재환은 자신의 눈물에 세상이 떠내려가길 비는 것 같았다. 홍빈은 살면서 그렇게 크게 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홍빈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비극과는 먼 운명을 지녔다. 유복한 집안의 슬픔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고민과 슬픔의 정도는 언제나 고만고만했다. 기껏 해봐야 우리 엄마가 밖에서 애를 낳아왔어. 아빠도 나한테 10살짜리 이복동생을 소개해줬어. 하는 등의 반류의 고질적인 애정과 섹스문제 정도? 하지만 재환의 상처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함께 집에 찾아갔던 그 날에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커다란 슬픔이었다. 그때의 재환이 실연의 슬픔에 울고 있었다면 지금의 재환은 자신의 존재 때문에 울고 있었다.
재환은 몇 시간이나 울었다. 학연과 원식은 재환을 위해 물과 먹을 걸 사러 나갔고 홍빈은 재환에게 무릎을 내주고 우는 등을 어설픈 손길로 다독였다. 축축하게 젖어드는 교복 바지가 슬펐다. 재환의 눈물이 안타까웠다. 홍빈에게 재환은 이대로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형, 지금 형은 잠깐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형을 참 좋아해. 정말 많이."
"그건 형이 돌고래라서가 아니고 이재환이라서야."
"형이 돌고래인 덕분에 우리가 다시 만난 거지만 그건 그냥 계기에 불과해."
"돌고래는 형의 한 부분이지 전부가 아니야."
"그러니까 형도 돌고래라는 것 때문에 형의 전부를 포기하지 않아도 돼."
"지금 일어난 일이 형의 미래를 결정하는 건 아니야."
"형 울지 마."
홍빈은 횡설수설했다.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호랑이는 집단생활을 하는 사자와는 달리 홀로 생활한다. 호랑이 가문에서 태어난 홍빈은 개인주의적인 생활에 더없이 잘 맞았다. 남의 상처를 못 본척할 줄은 알았지만 상처를 핥고 위로해주는 건 익숙지 않았다. 홍빈은 더듬더듬 최대한의 진심을 말하며 재환의 등을 토닥였다.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쏟아내던 재환이 어느 순간부터 작게 흐느끼더니 이내 울음이 잦아들었다. 재환은 홍빈의 무릎에 누워 숨을 골랐다. 홍빈은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등을 쓰다듬고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남이 울든 말든 상관도 안 했는데 재환이 우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손에서 땀이 나고 어쩔 줄을 몰랐다. 울지마, 울지마. 그래도 나은 건 혼자 울지 않고 내 무릎에서 운다는 것. 내가 위로해줄 수 있는 곳에서 울고 있다는 것.
재환이 번쩍 고개를 들고 헤, 웃었다.
"고마어 비나."
눈코입 할 것 없이 다 뚱뚱하게 부어있었다. 엎드려서 우느라고 얼굴은 울긋불긋 달아올랐고 머리칼은 땀에 젖어 빈말이라도 예쁘다고 말해줄 구석이 없었다. 그래도 홍빈의 눈에는 예뻤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다.
재환은 금세 기운을 차렸다. 원식과 학연이 사온 1.5리터짜리 음료수를 반병을 그 자리에서 마시더니 빵을 흡입했다. 몇 주 사이에 푹 꺼진 볼이 고작 매점빵으로 가득 찬 안쓰러운 꼴을 본 학연이 당장 연습실로 치킨과 피자를 시켰다. 히, 학교 오길 잘했다. 재환이 닭 다리를 씹으며 하는 말에 원식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학연이 홍빈에게 칭찬의 눈짓을 보냈다. 어떻게 달랬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잘했다고. 치킨과 피자를 다 먹고 넷은 연습실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경비 아저씨에게 쫓겨났다.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재환의 눈물 때문에 홍빈의 교복 바지가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다음 날 재환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등교해서 수영부를 그만뒀다. 그리고 밴드부를 뚝딱 만들었다. 홍빈은 무슨 변덕이냐고 핀잔을 주려다 말없이 밴드부에 드는 것을 택했다. 원식도 잘만 하던 축구부를 그만두고 밴드부에 들겠다고 설쳤다. 학연은 고3이라 이름만 걸어두겠다고 했다. 최소 인원이 되지 않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걸 재환이 떼를 쓰고 우겨서 작은 CA실 하나를 얻어냈다. 한바탕 큰일이 있고 나더니 자기가 돌고래라는 걸 이용해 억지 쓸 줄 알게 된 모양이다. 학교 비품 창고로 쓰던 작은 교실에 쌓인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고 버리고 먼지를 쓸고 닦아내니 꽤 그럴듯해졌다.
"난 상남자 메인 보컬 할래!"
"그럼 난 랩퍼."
"난 기타."
"빈이 너 기타도 쳐?"
"잘 못쳐."
"치는 게 어디야~ 역시 팔방미남!"
청소를 다 하고 바닥에 뻗어있자 재환이 슬슬 노래를 불렀다. I believe I can fly, I believe I can touch the sky. 익숙한 노래에 감격을 담아 들어본 적 없는 감동으로 부르는 목소리. 그러고 보니 홍빈은 자신이 흥얼거림 외에 재환의 노래를 처음 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환은 감정을 실어 부르느라 작은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노래를 부르다가 말했다.
"너네도 그래? 난 물속에서 수영하면 꼭 하늘을 나는 것 같았어."
"음... 난 아니던데. 그건 형이 돌고래라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그래, 원식이 말처럼 적어도 곰이랑 호랑이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겠지. 그래서 택운이 형을 좋아했어?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 홍빈은 고개를 돌려 재환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재환의 시선. 지금 택운이 형을 생각해? 이제서야 홍빈은 실감할 수 있었다. 첫 사랑이자 첫 실연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홍빈의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됐다. 물론 대상은 여전히 이재환. 실연을 깨닫자마자 눈을 깜빡일 때마다 팔락거리는 긴 속눈썹에 반했다. 두 번째 실연은 재환이 새로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겪게 되었다. 재환은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애들과 가볍게 사귀기 시작했다. 교내에서 손을 잡고 다니는 예쁜 커플. 두 번째 실연을 위로해준 것은 그래도 재환이 여자친구를 밴드부실에 데려온 적은 없었다는, 따지고 보면 그다지 위로가 되지도 않는 사실이다.
"구경하면 안돼?"
"안돼~ 오빠 말 듣자, 응?"
연습을 구경하겠다고 문 앞까지 온 애를 그대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홍빈은 재환의 여자친구가 문 앞에서 재환의 노랫소리를 듣다가 가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재환도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재환은 단호했다. 택운과는 같이 수영도 곧잘 했으면서 어떤 의미일까. 홍빈은 괜히 위가 쓰리는 기분에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원식은 주말마다 베이스를 배우러 다녔고 재환은 상혁에게 드럼을 배울 것을 요구했다.
"너 우리 학교로 올 거잖아~ 그럼 밴드부로 들어와야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드럼 배워놔."
"아주 신났네, 살판났어. 솔직히 난 베이스가 더 좋은데."
"베이스는 내꺼야, 선착순으로 끝났어."
패스트푸드점에서 시시덕거리는데 가게 유리문으로 재환의 여자친구가 걸어들어왔다. 청순해 보이는 꽃무늬 원피스에 오트밀색의 니트 코트. 딱 봐도 데이트를 위한 아주 예쁜 차림새였다. 하지만 재환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긴 웬일이야?"
"내가 못 올 데 왔어? 오늘 만나자고 해도 바쁘다고 하더니 바쁜 게 노는 거야?"
명백하게 홍빈, 원식, 상혁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원식은 홍빈의 팔을 툭툭 쳤다. 야, 자리 비켜주자. 상혁이 빨대를 빼고 마지막 남은 콜라를 급하게 들이켜는데 재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아 급하게 마실 필요 없어. 얘 보낼 거야."
"오빠!"
"너 지금 뭐하는 건데? 여자친구면 여자친구지 내 친구들한테 이래도 돼? 내가 주말에 너만 만나야 돼?"
여자애는 울면서 가게를 나갔고 근처에 있던 친구가 여자애를 달래며 재환을 노려봤다. 당연하게도 재환은 여자애한테 차였다. 하지만 재환은 차인 것에 조금도 마음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 뒤로도 재환은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들 몇과 어울렸다. 누가 봐도 적당히 만나는 것이 보였고 일정 선 이상 넘어오려고 하면 칼같이 쳐내는 탓에 홍빈은 재환이 아직도 택운 때문에 아파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택운이형 때문이야? 지금 여친들이랑 그러는 거."
원식이는 베이스 학원에 가고 둘만 밴드부실에서 딩굴대던 주말의 오후였다. 홍빈은 뚱땅거리며 기타 줄을 튕겼다. 재환은 핸드폰으로 음악을 켜놓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정택운. 그 새끼 때문이야? 너 지금 이러는 거? 홍빈의 물음에 재환은 홍빈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다시 딩굴 굴렀다.
"글쎄... 아닐걸? 그냥 확인해보는 거야. 좋아하지 않아도 사귈 수 있나 하고."
재환에게는 정택운이라는 이름도 이젠 별로 감흥이 없어 보였다. 재환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홍빈에게 말했다.
"내가 얼마 전에 만화책을 봤는데 거기서 그러더라."
"현실의 무게에 사랑이 쪼그라든다고."
"내 사랑도 쪼그라들었나 봐."
"내 사랑은 그 정도였나 봐."
"고작 이 정도 사랑 때문에 외국으로 쫓겨난 택운이 형이 불쌍해."
그때, 재환이 다시 학교에 온 날 홍빈의 위로가 재환에겐 특별하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재환은 종종 학연이나 원식에게는 하지 않는 자신의 연애에 대해 고민과 푸념을 홍빈에게 털어놨고 홍빈은 고민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재환에게 실연당하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재환의 곁에 머물렀다. 다행히도 재환의 연애 행각은 고3 여름 축제 때를 기점으로 멈췄다. 드럼 한상혁, 베이스와 랩에 김원식, 기타와 서 브보컬 이홍빈, 메인보컬 이재환. 호화스러운 출연이었다. 인근 학교에서도 구경을 와 학교 운동장은 물론 교문 앞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학교가 외부인 출입을 허락하는 몇 안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돌고래 이재환을 보러 온 일반인들과 기자, 방송국 관계자들은 물론 중종이 많은 학교 특성상 애인을 만들기 위해 온 타교 학생들, 이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고 구경 온 중학생들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넘쳐났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리얼~ 브이! VIXX 빅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학연이 졸업하기 전에 지어주고 간 VIXX라는, 어딘가 보이그룹 이름 같은 밴드명과 구호를 외치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재환은 무대를 뛰어다니며 좌중을 압도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평생 돌고래의 노래를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재환의 목소리는 노래를 한 소절 한 소절마다 음색을 바꾸며 때로는 낮게, 때로는 높게, 돌고래가 꼬리로 공을 가지고 놀 듯 음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원식의 파워풀한 랩이 노래에 개성을 더하고 홍빈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감칠맛을 더했다. 공연은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성공이었다. 학교에서 부른 걸그룹 공연이 있기 전에 분위기를 띄우라고 넣은 순서였는데 너무 뜨거운 반응에 뒤에서 대기하던 걸그룹이 당황할 정도였다. 자체휴강을 하고 축제에 구경하러 왔던 학연이 자기가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보여주며 정말 대단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진짜? 진짜 잘했어?"
"그럼! 엄청 잘했어, 내 새끼. 언제 이렇게 연습을 했어? 기특해라."
재환은 아줌마처럼 엉덩이를 토닥이는 학연의 손을 피해 홍빈에게 덥석 안겼다. 땀이 줄줄 흐르는 끈적한 피부끼리 서로 달라붙었지만,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재환은 택운과 헤어진 후로 가장 밝게 웃고 있었고 그런 재환을 안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홍빈은 섣불리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다. 홍빈이 보기에 재환은 아직도 현실에 쪼그라들어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대학에 가서도 연애를 하지 않는 걸 보고 있자니 그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대학 오면 바로 연애할 것처럼 굴더니?"
"됐어, 그나저나 너 연애하는 꼴을 못 본 것 같다? 그 잘생긴 얼굴 아껴둬서 뭐핼래?"
"누가 연애를 안 해. 형이 모른 거지."
"헐! 딘땨? 나만 몰랐어?!?"
재환이 억울한 표정을 짓자 원식과 학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홍빈은 대학 온 기념으로 이쁘장한 여자와 남자를 몇 명 만나봤지만 그저 스치는 가벼운 관계였다. 홍빈은 고민했다. 재환은 현실의 무게에 사랑이 쪼그라들었다고 했는데 왜 나는 쪼그라들지도 않는 걸까. 택운과 재환의 연애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를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 놓고. 그래도 홍빈은 지금 이대로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재환도 연애를 하지 않고 자신도 그저 재환을 바라보기만 하는 바로 지금 이 상태. 하지만 상황이란 변하는 법. 어느 날 학연은 재환을 뺀 원식, 홍빈, 상혁을 불러냈다.
"택운이가... 한국에 온대."
네 명이 재환에게 그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 지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택운의 귀국날짜가 다가왔다. 택운의 귀국 전날에 이제는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고 네 명은 재환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입을 뗐다.
"저 재환아. 놀라지 말고 들어. 내일 택운이가 한국에 와."
"....뭐?"
"미리 얘기 못해줘서 미안해,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라서..."
학연이 쩔쩔매며 재환의 표정을 살폈다. 재환은 고개를 숙였다. 홍빈은 슬퍼하는 재환을 보고 동요하지 말자고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되내였던 것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가는 걸 느꼈다. 재환이 다시 울지 않을까, 아니면 택운이 옴으로써 자신에게 말했던 그 쪼그라든 사랑이 다시 펴지지 않을까 숨 막히게 걱정이 되었다. 원식과 상혁은 발을 동동 구르며 재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울어? 울지마, 우리가 잘못했어."
".....안 울지롱! 그리고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바보들아!!"
재환은 입을 쭉 내밀고 인상 쓰면서 핸드폰을 내밀었다. 노란색 카톡창에는 택운과의 나눈 대화창이 떠 있었다. 모두가 놀라 재환을 바라보자 재환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
"설마 그동안 형이랑 연락 한 번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우린 이제 그냥 친구야. 작게 덧붙이는 말이 슬프게 들렸던 건 기분 탓일까, 다음날 다섯 명은 공항까지 택운을 마중 나갔고 택운의 흔들리는 눈에도 불구하고 재환은 그저 밝게 웃으며 가볍게 포옹했을 뿐이었다. 택운의 흰 목이 바닥을 향해 떨궈지는 것을 보며 홍빈은 저열한 기쁨을 맛봤다. 택운과 재환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모순적인 감정이 뒤섞였다.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사랑을 잃은 택운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결국 이렇게 될 거면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뒤로 반년, 상혁이 대학교에 입학하자 그들은 다시 같은 공간에서 6명이 되었다. 홍빈의 우려와는 달리 재환과 택운은 정말 친구 관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택운의 약혼 소식이 들려왔다. 홍빈은 때 이른 결정에 놀랐지만 학연이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 역시 그랬구나하는 감상만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아마 택운이 한국 오는 거 결혼하러 오는 걸 거야. 그 집안이 손이 귀하잖아. 재환이 일도 있었고."
재환에게 택운의 귀국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던 때에 한 말이었다. 우리 재환이 불쌍해서 어떡하니. 학연에게 재환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아무리 희귀종에 특별취급이어도,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정계인사의 막내아들이었어도, 첫사랑만큼은 스스로 매듭짓게 하는 게 맞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택운은 약혼식이 대단치 않았으며 가족끼리 밥을 먹는 정도의 형식적인 절차였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야, 예뻐?"
재환의 물음에 택운이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홍빈은 보지 못했다.
재환은 가끔 혼현을 드러낸 상태로 한강을 유영했다. 민물 돌고래의 생태를 확인하는 정부 측 의뢰였다. 홍빈은 자신의 요트를 타고 나와 연구소 측 배 옆에 대고 재환의 곁에 있어주었다. 사실 재환이 수영하는 걸 보는 것은 고등학교때부터 지속되어 온 오랜 홍빈의 취미였다. 이제 수영을 잘 하진 않는 재환이지만 계곡이나 강, 바다처럼 생물이 살아가는 물은 아직도 좋아해서 예전처럼 곧잘 헤엄치곤 했다.
보통 돌고래보다 더 하늘빛을 띠는 재환의 혼현이 짙푸른 한강을 헤엄치는 모습은 대단히 아름답다. 가끔 운이 좋으면 재환은 한강 민물 돌고래와 함께 헤엄치기도 하는데, 반류의 힘이 같은 종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재환이 함께 나오면 30% 이상의 확률로 민물 돌고래를 관찰할 수 있지만 재환이 없으면 보기도 힘들다고 한다. 재환이 직접 물에서 확인한 바로는 한강 돌고래의 개체수는 10마리 남짓. 이 중 8마리에 보호 관리태그가 붙어있다. 밀렵을 막기 위한 조치다.
"수고하셨습니다~"
"재환씨, 여기 수건이요."
"고마워요."
재환은 혼현을 갈무리하고 배에 올라탔다. 연구원들에게 재환은 선망의 대상이다. 한강 돌고래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쓸데없이 혈세만 낭비한다고 점점 연구비가 삭감되고 있을 때 재환이 태어나면서 연구소가 유지될 수 있었고 지금은 실제로 연구의 진척이 보이고 있다. 그것도 고마운데 재환은 연구에 실질적인 도움과 경제적인 도움 모두를 주고 있다. 최근 재환이 상처 입은 돌고래 새끼를 발견해 연구원 손에 전달한 덕분에 대대적으로 기사가 났고 이로 인해 대중들의 돌고래에 관한 관심이 커진 것이다. 요새 한강 주변엔 돌고래를 지키자는 팻말들이 여기저기에 붙어있다. 서울은 시의 마스코트로 돌고래를 내세우는 것이 어떨까 하는 고민도 하고 있다고 하니 연구소로서는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재환 자체도 매력적인 사람인 것도 한몫했다. 탄탄한 몸에 큰 키, 뚜렷하게 잘생긴 얼굴, 잘 웃는 다정함. 젊은 인턴이 재환에게 수건을 건네다 얼굴을 붉혔다. 연구소 배 옆에 댄 요트에서 그걸 못마땅하게 보던 홍빈이 소리쳤다.
"아, 나랑 논다며 언제까지 기다려!"
"지금 갈게! 실장님, 술고래는 괜찮아요? 많이 나았어요? 다음 주 중에 보러 가도 돼요?"
"네, 많이 나아졌어요."
"다행이다. 그럼 나중에 연구소로 갈게요."
재환은 자신이 구해준 새끼 돌고래에게 술고래라는 애칭을 붙였다. 물론 연구소에서 붙인 이름은 다르지만 재환은 꿋꿋이 자기가 붙인 이름으로 불렀다. 재환은 연구소 배 옆에 붙은 홍빈의 요트로 훌쩍 뛰어넘어 갔다. 홍빈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재환에게 핀잔을 줬다.
"그러다 다치려고 그러지. 말이라도 하면 갑판 붙여줄 텐데 왜 뛰어."
"이게 빠른걸."
재환은 젖은 머리를 털며 홍빈과 함께 선체 안으로 들어갔다. 홍빈은 아직 몸이 젖은 재환을 위해 상비해놓은 가운을 입혀주고 히터의 강도를 높였다. 재환은 으으으, 춥다. 손으로 팔뚝을 비비며 히터 앞에 앉아서 떨었다.
"그렇게 추워?"
홍빈은 자신의 패딩을 가져다 어깨에 걸쳐주며 재환의 앞에 앉아 차갑게 식은 발을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고 따뜻한 손으로 주물러주었다.
"으, 물비린내. 근데 한강 안 더러워?"
"헤엄칠 정도는 돼."
"아, 집에 가자마자 샤워해. 더러워."
재환은 그런 홍빈을 바라보았다. 더러운 거 절대 못 참는 성격이면서 깨끗한 손으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차가운 발을 꾹꾹 주물러준다. 젖은 발때문에 홍빈의 바지가 더러워지고 있었다. 깨끗한 수건으로 발에 묻은 더러운 걸 닦아주던 홍빈이 그 시선을 눈치채고 재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그냥. 이렇게 다정한 놈이 왜 연애도 못 하나 싶어서."
"허참, 별걱정을 다한다. 못하는 거 아니거든요~"
하긴, 맞는 말이지. 이홍빈이 연애를 못 한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재환은 소파에 등을 깊게 묻으며 생각했다. 집안 좋지, 학벌 좋지, 다리가 좀 짧은 게 흠이지만 일단 키 크지, 그리고 엄청나게 잘 생겼지. 성격도... 음,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까칠한 면 뒤에 다정함이 있으니 충분히 매력 있었다. 재환은 홍빈이 왜 연애를 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연애를 하지 않으니 홍빈이 연애를 하지 않아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 과연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넌 언제 결혼할 거야?"
"뭐?"
재환의 표정이 어두웠다. 홍빈은 덜컥 겁이 났다. 왜 갑자기 결혼 얘기지. 홍빈은 최대한 목소리를 떨리지 않게 가다듬고 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뭐, 택운이 형 곧 결혼할 거고. 너네들도 순서대로 가겠지 싶어서. 다들 좋은 집 아들들이잖아. 금방 하겠지. 넌 정해진 상 대같은 거 없어?"
"에구, 재환이 형 혼자 남을까 봐 걱정돼요?"
애써 장난치듯 말하자 재환은 고개를 떨궜다. 홍빈은 가슴이 쿵쿵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홍빈은 재환과 같이 있지 않았던 시간들이 모조리 불안해졌다. 홍빈에게 재환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저 조그만 머리통 안에는 뭐가 들어있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나와 다른지.
"...나 아마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게 될 걸."
"누구랑?"
"글쎄, 국가가 정해주는 사람이랑?"
재환은 피식 웃었다. 홍빈이 사랑해 마지않는 동그란 갈색 눈이 체념에 푹 잠겨있었다.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홍빈이 뭐라 대답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재환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 그래서 대학 와서 연애 안 한 것도 있고. 솔직히 결혼상대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랑 연애하는 건 비매너잖아."
"...어제 나 관리하시는 분 있잖아, 그 상담소 소장님. 그분이 혹시 이 안에 마음에 드는 애 없느냐고 리스트를 주더라."
재환은 홍빈의 손에서 발을 빼고 두 무릎을 세워 얼굴을 가렸다. 180cm가 넘는 큰 키에 홍빈만큼은 아니지만 잘 벌어진 어깨를 지닌 재환이지만 몸을 웅크리자 한 품에 안아 들 수 있을 만큼 작아졌다. 아니, 홍빈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재환의 18살, 지금보다 작고 어리던 그때의 모습이 지금 재환의 모습 위로 덧입혀져 날카로운 가시처럼 홍빈을 쿡쿡 찔렀다.
작게 웅크린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재환을 보는 홍빈은 마음은 종이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마음을 양손으로 잡아쥐고 천천히, 조금씩 찢어내는 것처럼 아프다. 홍빈은 벌벌 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여 재환의 옆에 앉아 마른 어깨를 안았다. 히터를 잔뜩 켠 보람도 없이 패딩 아래로 젖은 가운을 입은 재환의 몸이 강물처럼 차가웠다.
홍빈이 어깨를 안고 천천히 보듬어주자 재환이 입을 열었다. 울음기가 가득 섞인 목소리.
"아무리 예상한 일이라도... 직접 겪으니까 참 달라. 차라리 그냥 막 살아버릴걸, 지금에 와서 후회가 돼."
"너도 알잖아, 내가 이상한 거지 우리 집은 평범한 거. 가끔씩 너네한테 얘기 듣고 그러면 놀라고 그랬어. 낳아준 엄마랑 키워준 엄마가 다르다거나 새 큰어머니가 우리보다 5살 많은 사람이라거나 그런거."
"솔직히 감정 없이 결혼하는 것까진 그럴 수도 있어. 근데 그런 결혼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된다면.... 난 자신 없어. 정말 무서워, 빈아."
"그럼 나랑 결혼해, 형."
정말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었다.
홍빈은 언젠가 재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대강의 시기조차 정해놓지 않았었다. 언젠가, 그저 언젠가, 몸을 가득 채운 마음이 넘실넘실 흔들리다 결국 목 밖으로 흘러넘치게 될 때 말하지 않을까 예상할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때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렇듯 홍빈에게 재환이란 예측불허다. 수없이 고민하고 다짐했던 마음을 아주 간단히 부숴버리고 모든 예상과 기대를 뛰어넘어 홍빈이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게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재환은 그 말에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얼굴을 들어 홍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언젠가처럼 눈물로 젖은 얼굴은 홍빈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충동이 결심이 되고 결심이 현실이 되도록.
"그런 아무나랑 결혼할 거면 나랑 해. 나랑."
"빈아."
"내가 형 지켜줄게. 우리 집 대단한 거 알잖아. 형 정도 얼마든지 지킬 수 있어."
"빈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내가 형을 좋아해."
재환의 눈이 커졌다. 홍빈은 작은 손으로 재환의 눈물을 닦아주며 젖은 속눈썹을 어루만졌다.
"형이 행복하면 좋겠어. 그래서 진짜 좋은 사람이 생기면 놔주려고 계속 기다렸는데 이런 식으로 남들이 형 휘두르게 못 둬. 아니 안 둬."
"이렇게 갑자기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계속 좋아했어."
"나중에 형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놔줄게. 그래도 지금은 내가 형을 지킬 수 있게 해줘."
재환의 까만 눈동자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좋아했다니 대체 언제부터? 홍빈은 혼란스러워하는 재환의 눈을 자신의 손으로 가리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재환의 입술은 상상처럼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차갑고 꺼슬한, 도톰한 입술. 하지만 재환의 입술이란 이유 하나로 홍빈은 손끝이 저릿해질 정도로 좋았다. 더 깊게 파고들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내며 홍빈은 눈을 가린 손을 내려 재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실 나중에라도 재환을 놓아줄 자신은 없다. 처음부터 손에 닿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번 손에 들어온 이상 절대 놓치지도 빼앗기지도 않으리라. 홍빈은 예전에 자신이 느꼈던 무력감을 떠올렸다. 우는 재환을 앞에 두고 홍빈이 할 수 있던 일이라곤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를 뺏어서 눈앞에서 부숴버리는 것뿐이었다. 택운을 외국으로 쫓아내는 택운의 부모님을 막을 수도 없었고 쏟아지는 기사를 막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제는 이렇게 우는 재환을 달래주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홍빈에겐 돌고래를 가두고 있는 작은 울타리를 부술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울타리 바깥 역시 완전한 바다는 아니다.
하지만 형, 내가 더 넓어질게. 형을 내 안에 가두지 않도록 더 넓어져서 형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줄게.
재환은 가만히 홍빈을 바라보다가 홍빈의 뺨을 어루만졌다. 홍빈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재환은 자신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름다운 얼굴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몇 년을 봐온 얼굴이지만 새로웠다. 껍질을 부수고 내면을 드러낸, 누구도 본 적 없는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얼굴. 그 얼굴이 지금껏 당신만을 사랑해왔노라며 열렬히 외치고 있었다.
"빈아, 날 좋아해?"
"형을 사랑해."
홍빈은 자신이 부순 울타리를 넘어 돌고래가 나와주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두 눈이 마주치고 홍빈에게 억겁처럼 느껴지는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재환이 천천히 다가왔다. 홍빈은 가만히 자신의 목을 끌어안는 재환의 팔을 느끼며 재환의 입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재환은 홍빈의 넓은 어깨를 어루만졌고 홍빈은 재환의 가운을 벗겼다.
사랑하기를 포기했던 재환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몇 번째인지 모를 홍빈의 사랑은 한강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 사랑의 끝이 해피엔딩이라 다음번 사랑은 찾아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홍빈과 재환은 같은 미래를 꿈꿨다.
-------------------------------------------------------------------------------------------------------
사실 영화 프리윌리에 나오는 윌리는 돌고래가 아니라 범고래지만...() 이미지상 맞으니까여!
재환아 생일축하해ㅠㅠㅠㅠㅠㅠ
'tex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켄총] 밴드물 조각 (0) | 2014.05.10 |
---|---|
[홍켄] Aloha ma LUV (2) | 2014.05.01 |
[랍켄]한양에서 김서방 찾기 (2) | 2014.04.06 |
[켄총] 재환이 우유썰 조각글[비번 재환이 생일 4자리] (0) | 2014.03.31 |
[홍켄] 나의 사랑스러운 깡통 (4) | 2014.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