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 나름 감상적인 글이에요. 짧으니까 연재..헤헤헿
하나하키병?이라고, 짝사랑하면 꽃을 뱉어내는 설정에서 썼습니다.
아직 설문참여 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질문지의 -3번 새로 연재하는 소설-이란 건 지금 이 소설이에요ㅇ0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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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일상에 지쳐 허덕이던 어느 날 오랜만에 가족이 아닌, 업무 상의 연락도 아닌 전화 한 통이 왔다. 손바닥만한 커다란 화면에 가득 뜨는 귀여운 척하는 셀카. 그리고 이름 석자로만 저장하는 습관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하트를 잔뜩 붙여서 저장해 놓은 네 글자. 평생지기라는 말은 쿨하지 않은 모든 것을 쪽팔려하는 요즘은 물론이거니와 10년 전쯤의 밀레니엄 사춘기 감성에도 조금은 부끄러운 말이었다. 내가 인간관계에 있어 집착을 모르고 스치는 사람을 붙잡을 줄 모르는 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큰 성격적 결함에 학연이 큰 몫을 했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 지나가는 말로 하는 '우리 평생 친구하자'는 선언을 지금까지 열심히 지켜주면서. 전화를 받기 위해 계단실로 자리를 옮기는데 진동이 뚝 끊어졌다. 이쪽에서 걸려고 화면을 켜자마자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성격도 급하지.
"응, 학연아."
"운아! 우리 술 먹자!"
귀가 아프게 소리를 지르는 통에 잠깐 핸드폰을 멀찌감치 떨어트렸다. 내가 요새 얼마나 힘들었는데 넌 연락도 안 하고~ 주절주절 늘어놓는 푸념을 적당히 들어주며 나도 바쁘고 힘들어서 연락을 못했노라고 변명같은 사실을 말해본다. 그렇다고 안 바쁘고 안 힘들 때도 연락을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말하면 학연이 넓은 마음씨로 용서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학연에게 미안해지곤 한다. 먼저 손을 뻗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과 진심없는 거절을 간파해서 억지로라도 손을 잡아주니까. 누구보다 예민해보이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둔감하게 세상을 살기에 시간의 흐름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민들레 홑씨마냥 바람에 흘려버린다. 어느새 11월, 건조한 공기에 조금 거칠어진 흰 손을 내려보며 학연과 시간을 조율했다. 어차피 야근을 하지 않으면 약속이 없으니 학연에게 맞추면 되기에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학연이 이렇게 징징거릴 정도면 꽤나 힘에 부친 모양이다. 계단실에서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전화가 한 통 더 왔다. 누구지? 화면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은 이미 다시 계단실로 돌아와 있었다. 나 얼마나 빠르게 뛴 거지.
"여보세요?"
"형!"
내 심장은 지금 얼마나 빠르게 뛰고 있는 걸까. 네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형이라고 불렀을 뿐인데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대화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숨소리가 아주 비밀스러운 암호라도 되는 것처럼 예민하게 귀를 기울인다. 무슨 말을 할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이렇게 들뜨게 만드는 거지. 들고있는 전화기 저편에서 네가 웃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형 내가 왜 전화했게요?"
"글쎄. 오늘이 며칠이더라. 혹시 내가 책 연체했어?"
"와, 그렇게 처음부터 정답을 맞추면 어떡해요!"
피식피식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모른다. 너는 내가 지금 일주일치의 웃음을 다 써버리고 있다는 걸 알까. 내가 회사에서 차갑고 안 웃기로 손에 꼽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 무척이나 놀라며 형은 그런 사람 아니라고 부정하겠지. 너에게는 언제나 가장 다정하고 좋은 모습만을 보여줬으니까. 나는 너라는 지구를 맴도는 달처럼 언제나 내 우울하고 축축한 뒷면을 숨기고 너를 대한다. 내 거대한 바다를 보고 네가 달토끼를 상상할 수 있도록.
"연체하기도 했는데, 형 얼굴 못 본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연락했어요. 요새 바빠요?"
"이제 연말이니까... 좀 그런 편이지."
"아아아 맞다! 연말이지. 맨날 도서관에만 있어서 날짜를 까먹고 살아요. 날씨도 제대로 몰라서 긴 팔 티에 셔츠 하나 덧입고 출근했다가 추워 죽을 뻔했어요."
"춥게 다니지마. 추위도 잘 타면서."
"형도 추위 안 탄다고 너무 얇게 입지 말아요."
집에 가서 옷장정리를 해야겠다. 시절을 모르고 쌓여있는 얇은 여름 옷들을 차곡차곡 포개어 접어넣고 두툼한 겨울 옷들을 꺼내 추운 계절을 준비해야지. 하지만 요즘 날씨가 너무 춥다고 말하는 네 목소리는 꼭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포근해서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계단실에 앉아 있었다. 몸을 휘감은 봄바람을 남들과 나누기 싫어서 홀로 너의 목소리를 계속 떠올린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던데 감기기운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일은 재밌는지, 내 얼굴을 오래 못 봐서 보고싶다고 생각하는지. 바람이 모두 떠나고 손 끝과 발 끝이 모조리 차가워질 때까지 오래도록 떠올리고 되새겼다.
***
"자, 한 잔 해."
"술도 잘 못 하면서... 나 너 안 데려다줄 거다?"
"야박하긴. 알아, 임마. 그래도 여차하면 너네 집에다가 떨궈놔주긴 할 거지?"
잔을 부딪친 후에 소주 한 모금. 꼴깍, 목 뒤로 넘기자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한 맛에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크으, 오늘따라 잘 넘어가네. 학연은 단번에 잔을 비우고서는 얼른 더 따르라며 성화를 부린다.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하려고."
"외근 있어서 그쪽으로 바로 가면 돼."
"술냄새 풍기면서 거래처 사람 만나게? 적당히 마셔."
"아니, 내가 지금 안 마시게 생겼어? 신입 말이야. 일을 몇 개월 가르쳐줬는데 왜 아직도 그 모양이냐고... 자기가 무슨 며느리야?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내가 몇 개월을 찰싹 달라붙어서 일을 가르쳤으면 이제는 좀 잘 할 때도 됐잖아. 잘하진 못하더라도 실수는 줄어야지. 그게 인간의 도리인 거잖아. 어휴, 죽겠다. 너네는 신입 없어?"
"있긴 한데 내가 안 가르쳐."
"와, 진짜 부러워. 나 걔 가르치느라 업무 하나도 못 하고 걔 실수 수습하는 것만 해도 야근해야될 판이야. 부장은 나보고 하루종일 뭐했냐고 쪼아대고. 진짜 콱 죽어버리고 싶다."
"힘들겠네."
학연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내일은 외근 몇 군데 갔다고 바로 퇴근이야. 걔 얼굴 안 봐도 되서 행복해 죽을 것 같아. 나 아예 영업쪽으로 부서 이동할까봐. 지금도 하는 일이 거의 영업이나 마찬가진데 뭐. 그 답답한 얼굴 보면서 가르칠 생각하니까 차라리 영업 뛰면서 실적으로 스트레스 받는 편이 훨신 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아. 그래. 잘 생각해봐. 여기 순살 양념 하나요. 치즈 추가해서요. 이러다간 푸념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아 얼른 안주를 하나 추가했다. 시켜놓은 오뎅탕은 뱃속이 뜨끈해서 추운 날씨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계속 입에 넣고 우물거릴만한 메뉴는 못 된다. 치킨같은 걸 씹으면서 말해야 대화가 끊기지 안 그러면 밑도 끝도 없이 말을 할 것이다. 치킨은 왜? 내가 먹고 싶어서. 이건 내가 살게. 그래? 학연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다. 원래 피부가 검은 편이라 긴가민가했는데 우환으로 얼굴이 어두워져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니 이렇게 밝아지네. 그래봤자 여전히 까맣지만.
학연의 얘기를 대강 맞장구 쳐주며 들은지 얼마나 됐을까. 학연은 "어휴, 하고 싶은 얘기는 더 많은데 너랑 오랜만에 봤는데 이렇게 꿀꿀한 얘기만 할 수는 없지"하며 말을 마쳤다. 적어도 40분은 넘게 혼자 떠들어댔기에 속에 있는 얘기를 다 꺼내려면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예전에 정말 새벽 5시까지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던 때를 떠올리니 호기심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저 말을 끊기 전에 알아서 자제했으니 고마워하면 되는 일이다. 확실히 오늘 소주가 좀 맛있네. 택운은 눈으로 테이블 위의 빈 소주병을 세어보며 학연이 채워준 잔을 들어 홀짝였다. 학연은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리다가 굳어버린 치즈를 젓가락으로 당겨서 끊어내고 치킨을 한 입 크게 씹었다. 턱이 뾰족하고 좁아서 양껏 베어 물어봤자 크지가 않다.
"왜 실실 처웃냐."
"내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나. 손으로 입주변을 더듬으니 확실히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있다. 학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까 전화할 때는 별 말 없더니."
"좋은 일은 무슨."
"왜, 재환이가 너 보고싶대?"
놀라서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맞다. 나의 이 마음을 아는 건 눈 앞의 차학연 뿐이다. 학연이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저 동그랗고 까만 눈이 평소의 장난기를 지운 채로 똑바로 마주해오면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 버린다. 내 생각을 모두 알고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니가 그렇게 웃을 이유가 걔밖에 더 있어?"
그렇지. 다른 이유가 없지.
대꾸할 말이 없으니 그냥 계속해서 술이나 마실 뿐이다.
***
계산을 하고 나오니 밤이 새벽처럼 깊었다. 겨울같은 추위 속에선 숨결마저 하얗게 변한다. 찬 바람에 열 오른 얼굴을 식히며 학연이 어디있나 두리번 거리며 찾는데 저 가로등 밑에 서서 담배를 피는 모습에 그만 숨 쉬는 것을 잠깐 잊었다. 학연과는 정말 좋은 친구사이지만 때때로 이렇게 닮은 모습을 발견해 버리면 어쩔 수 없이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그리고 기억으로 시야를 바꿔 버린다. 마치 수채화를 덧그리는 것처럼 천천히 초점을 흐려 원래 모습을 물로 번지게 하고 새로운 물감으로 그 위를 칠한다. 닮았지만 전혀 다른 그 모습으로. 껑중 큰 키에 마른 몸, 작은 얼굴, 가늘고 긴 목선. 실루엣은 대강 바꿀 수 있지만 이목구비는 너무 달라서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빠르다. 웃는 얼굴을 떠올려본다.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지는 눈매와 도톰하게 올라오는 애교살, 마른 볼살을 밀어올리는 입꼬리. 차들이 도로 위를 달리자 차와 함께 가던 바람이 매섭게 몸을 때린다. 바람에 등을 밀려 휘청이는 몸을 가누며 눈을 뜨자 물기를 머금은 나의 소년은 가고 또렷한 현실만이 보일 뿐이다. 학연은 저 멀리서 후우, 고개를 떨군 채로 담배 연기를 뿜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며 한숨을 내쉰다. 까만 밤에 하얗게 부서지는 숨결이 이제는 꾸짖는 것조차 지친다고 말하고 있다. 가슴이 저려오며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올라온다.
콜록콜록. 두 손으로 입을 꽉 가려보지만 가려지지 않는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아니, 기침이 아니라 재채기였나. 그게 무엇이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요지는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것에 있으니까. 그래, 사랑은 숨길 수 없다. 어떻게 숨길까. 이렇게도 확실히 보이는 것을.
"...오랜만에 보네. 색깔이 엄청 화려해졌다."
멀리서부터 걸어와 할 말을 찾던 학연은 고작 그 말을 하고는 자신의 구두 뒷굽에 담배를 비벼껐다. 내 두 손에는 붉고 푸르고 노랗고 시커먼 꽃들이 가득하다. 짝사랑을 하는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
외사랑을 앓는 이들은 심장에서 꽃이 핀다. 그 꽃은 심장에 뿌리를 내리고 그 피를 빨아 자라나면서 심장을 조인다. 숨 막히도록. 그러면 심장은 꽃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제 그만하라고. 네 사랑은 가망이 없다고. 기약 없는 짝사랑의 시작은 언제인가. 손바닥 위에는 아무도 이름을 모르는 나의 꽃들이 이미 시든 채로 죽어간다. 내 심장은 어린왕자가 없어 바오밥나무의 뿌리에 잠식된 소행성처럼 부서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차라리 부서져 새롭게 태어나자고. 새로운 사랑을 찾자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심장은 하나라는 걸. 부서지면 다시는 재생하지 못하고 그저 죽는 날까지 부서진 채로 살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사랑의 뿌리가 심장을 찌르는 것을 괴롭게 참으며 그저 밭은 숨을 내쉰다. 재환아. 재환아. 혹여라도 들릴까 무서워 소리 내어 부르지도 못하는 이름을 혀 끝으로 더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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