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번주에 너무 많이 와서 잉여같아요... 잉여 맞지만....(._. )
02.
화려증후군花戻症候群. 증후군은 어떠한 병리적 상태가 질환과 질병으로 분류될 정도로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몇몇의 증후가 늘 함께 나타나는 동시에 그 원인이 분명하지 않을 때 쓰는 용어다. 꽃토병이라고도 불리는 이 증후군은 꽃을 토한 사람들이 모조리 짝사랑 중이라는 단일한 상태에 있지만 그 정도와 증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 병이 될 수는 없었다. 짝사랑을 해도 꽃을 토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사례들을 조사하여 그 원인을 알아냈다.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꽃을 토한다. 마음 속에서 이미 단념해버린 자신의 사랑을 애도하듯 아름다운 꽃이 쏟아져 나온다.
재환을 처음 본 건 중학교 때. 학생회 문을 두드리며 담임이 학생회 서기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추천을 해주었다고 했다.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동그랗고 까만 눈알을 데굴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선생님들이 시험 볼 때 곧잘 쓰곤 하는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관용어를 이해했다. 재환은 귀여웠다. 글씨를 잘 쓰는 여자애들을 뽑자던 다른 아이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재환을 뽑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싹싹하고 분위기를 잘 파악했다. 회의 시간에 언성이 높아지면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고 애를 쓰고 살갑게 애교를 부렸다. 여자애들 특유의 이성 간의 차이를 이용한 교태가 아니기 때문에 재환의 모습은 순도 백퍼센트의 호의로 받아들여졌고 누구나 재환을 예뻐할 수 밖에 없었다.
학생회 임원들은 학생회실을 비교적 자유롭게 썼다. 복도 구석에 있는 학생회실은 여러 동아리들이 함께 쓰는 동아리실과 달리 단독실이어서 자습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학생회실에서 혼자 음악을 듣곤 했다. 누나가 준 씨디 플레이어는 오래된 모델이라 음악은 잘 들렸지만 씨디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씨디 돌아가는 소리는 시끄럽고 수리를 하긴 귀찮아서 그냥 혼자 노래를 듣는다. 홀로 학생회실 소파에 길게 누워 배 위에 씨디피를 올리고 눈을 감는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이 들리고 창문으로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는 마치 몸에 묻으면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주는 빛가루처럼 보인다. 그때 문득 재환의 얼굴이 생각났다. 봄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 괜히 문을 바라본다. 저 문을 열고 재환이 들어와 어, 형. 혼자 있어요? 저도 여기 같이 있어도 돼요? 하고 묻는 상상을 한다. 왜일까. 왜 나는 나의 가장 따사롭고 행복한 순간에 네가 곁에 있는 걸 상상할까. 콜록콜록.
"...이게 뭐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침을 하며 손으로 입을 막자 손바닥에 뭔가가 닿았다.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펴보니 꽃잎이 너무 투명해 살결이 다 비치는 꽃 한 송이가 놓여져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새로 생긴 늦둥이 동생처럼 예뻐했던 그 애에게 갖고 있는 마음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랑을 처음부터 단념했다는 걸 알았다.
"근데 투명한 꽃도 있나."
그 뒤로 혼자 재환을 생각할 때 종종 투명한 꽃을 뱉었다. 꽃잎이 모인 꼭지를 잡아 햇살에 비춰 보면 마치 프리즘처럼 빛이 사방으로 번졌다. 무지개는 생기지 않았지만 햇빛을 그대로 투과하는 꽃이 퍽 자랑스러웠던 것도 같다. 살아오면서 흘린 눈물들을 셀 수 없는 것처럼 꽃을 토한 횟수를 셀 수는 없겠지만 투명한 꽃을 토하던 때는 그 수를 손에 꼽을만했다. 당시에 썼던 짧막한 일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때만 해도 아직은 투명할 정도로 가벼웠던 마음이었다. 색깔이 있는 꽃을 처음 뱉었을 때를 기억한다.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많은 애들이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며 난리가 난 통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물을 조금 탄 듯한 먹색의 코트도 군데군데 허옇게 더러워져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느정도 친했던 반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얼굴에 묻히는 밀가루를 마지막 의리로 받아주며 운동장을 걸어 가족들을 찾는데 누군가 옷자락을 당겨왔다.
"형, 졸업 축하해요."
재환은 꽤나 큰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분홍색과 연두색, 노란색이 예쁘게 섞인 큰 꽃다발. 재환의 눈시울이 붉었다. 친했던 형누나들이 졸업을 하니 텅 빈 기분이라고, 자기가 졸업하는 것도 아닌데 싱숭생숭하다며 학생회실에서 시무룩해져서는 다른 애들에게 쓰다듬을 받던 모습이 기억났다. 내가 살가우려고 노력했다지만 그건 다른 애들에 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서. 워낙 여기저기에서 예쁨 받고 사랑 받는 것에 익숙한 너에겐 정말 스쳐가는 손길 중에 하나였을게 분명해서 나는 그 애에게 향하는 많은 신경들을 속으로 참곤 했다. 하지만 친한 선배들이 졸업한다고 울먹거리는 큰 눈도 추워서 빨개진 귀 끝도 사실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꽃다발을 다시 품에 안겨주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눈물이 고였다. 나는 얼른 내 목도리를 풀어 재환의 휑한 목에 둘러주었다. 목이 길어 폴라티를 입었는데도 여간 추워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짙은 푸른색의 목도리를 여러번 둘러서 꼼꼼하게 묶어주고 다시 꽃다발을 가져갔다. 재환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나는 그 말이 고마웠다. 아무 것도 아닌 내 1년에 들어와준 너. 네덕분에 내 1년이 너무도 예뻤다고, 학교로 걸어가는 길목마다 너와 만나지 않을까 설렜었노라고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헤어지는 와중에 너에게 좋은 선배는 되지 못할망정 이상한 사람은 되지 말자고 속으로 삼켰다. 그냥 까맣고 동그란 머리통만 슥슥 쓰다듬었다. 떨리는 손 끝을 눈치챌까 차마 몇 번 만지지도 못했었는데. 재환은 쑥쓰러운듯 웃고는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해서 나와 사진까지 찍고 다른 학생회 아이를 찾아 떠났다. 나는 묻고 싶었다. 너 혹시 내가 어느 고등학교로 가는지 알고 있니. 내가 서울을 떠나는 걸 알고 있니. 너도 공부를 잘 하는데 혹시 나중에 내가 있는 학교로 올 생각은 있니.
"...오늘이 끝이니까."
구질구질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부모님의 성화로 기숙사제 명문고의 입학 시험을 치르고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손에 꼽게 친한 아이들과 선생님 몇 명만 아는 일이었다. 혹시 마음씨 착한 재환이 빈말로나마 네, 형! 꼭 형 있는 학교로 갈게요! 말해버리면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그 아이를 기다릴지도 몰랐다. 그러긴 싫었다. 재환이 고맙다고 한 말은 꼭 내 마음에 대한 대답같아서, 마치 기대도 하지 않았던 보상같아서 그 모습 그대로 놔주고 싶었다.
"어머, 아들. 너 졸업하는 거 많이 섭섭했구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나보다. 어머니가 건네준 푸른색의 페이즐리 손수건에 눈물을 닦다가 작게 기침을 했다. 그 애를 놔주겠다고 생각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꽃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았다. 회색이 섞인 하늘색. 머지않아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릴 거라고 예고하는 하늘의 색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을 믿었다. 한 번 푸르게 변한 꽃은 다시는 투명해지지 않았고 가끔 심하게 재환을 생각할 때면 그 색이 더 짙었다. 하지만 이제 따로 연락해서 찾아가지 않는 한 볼 수 없을테니 금방일 거라고 여겼다. 학교는 핸드폰을 금지시켰고 부모님은 그걸 착실히 따랐다. 부모님과도 기숙사 내의 공중전화로 가끔 통화하는 게 다인데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재환과 연락이라니, 어불성설이다. 다만 가끔 꿈에 재환이 나왔다. 서로의 어깨가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나란히 운동장을 돌며 산책을 하는 게 다였다. 근데도 부끄러웠다. 같이 걷는 꿈만으로도 하체가 딱딱해져 있었다. 내가 이렇게 피부도 닿지 않는 사소한 일상을 지독히 열망한다는 게 혐오스러웠다. 무서워서 잠도 잘 자지 않았는데 키가 길죽하게 자랐다.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내가 남들과 다른 내 마음조차 튀어 보일까봐 부끄러워 목을 움츠리고 다녔다.
신입생이 들어오는 2학년 봄, 나는 나도 모르게 재환을 기다렸다. 1학년 반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신입생 꼬투리를 잡으려는 무서운 선배라는 소문도 났다. 없구나. 당연하지. 꽃은 한층 더 푸르러졌다. 이제는 하늘색보다는 바다 깊은 곳의 색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재환은 내 예상을 뒤엎고 1학년 2학기 때 전학생이라는 신분을 업고 나타났다.
"야, 정택운! 니 후배 왔다!"
후배라고 부를만한 애가 없어서 이상해하며 나가니 재환이 있었다. 1년 반만에 더 성숙하고 남자다워진 얼굴로, 내 꿈 속에서보다 더 또렷하고 선명한 얼굴로 내게 웃었다.
"이 학교에선 형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면서요? 선배, 저 선배 따라서 이 학교 왔어요."
와르륵, 널 좋아하면 안 된다고 매일매일 되뇌던 내 다짐이 무너지는 소리를 넌 들었을까.
그리고 그 날은 화장실에서 본 적 없는 많은 양의 꽃을 우르르 토해냈다. 한동안 기침을 하지 않아서 이제 내 마음이 접혔구나, 나도 모르게 소리없이 열렸던 마음이니 접히는 것도 소리가 없는 거겠지 안심하고 있었건만. 하지만 그날 토해낸 꽃은 푸른색만이 아니었다. 분홍색, 주황색, 노란색. 그 모든 색들이 갓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아주 연하고 예뻤다. 짙푸른 꽃들 사이로 보이는 몇 송이의 밝은 꽃들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 안에 남겨진 희망이란 두 글자 같았다. 하지만 그 꽃들은 토사물과 다를 바 없이 변기물 위에 동동 떠있다. 레버를 내려 물과 함께 둥그렇게 회전하다가 하수구로 사라지는 꽃들을 보며 그제야 나는 이 사랑이 내 생각보다 오래 갈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재환과 함께 한 고등학교 시절동안 내 투명한 꽃을 프리즘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무지개보다 다양한 색의 꽃을 뱉어냈다. 몸과 정신이 점점 커가며 사랑에 욕망이 따르기 시작했다. 재환의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꿈꾸며 몽정할 때 나는 꿈에서조차 죽고 싶었다. 욕망처럼 빨갛고 질투로 노랗고 슬픔으로 파랗게 물들은 꽃들. 꽃은 내 자신보다 솔직한 사랑의 영수증이었다.
"정말 싫다..."
업무 중에 기침이 나와서 손수건을 넓게 펴서 콜록콜록 꽃을 쏟아냈다. 손수건을 최대한 납작하게 접어서 서류철로 눌러놓았다가 잠시 화장실을 갈 때 화장실 쓰레기통에 쏟아 버렸다. 사람들은 오해한다. 기침을 할 때마다 아주 당황스럽게도 꽃이 함께 나오는 거라고.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꽃을 뱉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꽃을 뱉어내기 위해 기침을 한다는 걸. 몸 안을 가득 채운 외사랑이라는 꽃이 더 이상 쌓이지 못할 때면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걸 뱉어야만 내가 살 수 있을거라고. 그렇다면 꽃을 토해낼 때마다 사랑도 줄어들면 좋으련만. 사랑이 깊어질수록 토해내는 꽃의 양도 많아져서, 나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이 꽃을 원망할 뿐이다.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면 손바닥 가득히 꽃이 쏟아져나온다. 손바닥에 생긴 작은 꽃밭에 얼굴을 묻고 나는 그저 죽고만 싶었다.
-형, 저 여자친구랑 헤어졌어요...
이 문자 하나가 뭐라고. 쓰레기통에 쏟아버린 꽃들은 아주 진한 분홍색, 검은색, 흰색이었다. 작은 화장실 칸에 앉아 무릎 사이로 얼굴을 처박았다. 이대로 하루종일 울고만 싶다. 이제 네 한 마디에 하늘 꼭데기까지 올라갔다가 저 아래 지옥 끝까지 처박히는 일은 그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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