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라고 모두 생선 비린내가 나지는 않지만 그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생선 냄새가 났다. 바닷가를 따라 주홍빛 방수 천막이 빼곡하게 들어선 어시장과 저 멀리 보이는 빨간 등대만이 이 작은 마을의 유일한 볼거리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벽에 벽화를 그려준다고 어수선하게 굴다 간 덕분에 마을의 모든 벽은 도화지처럼 하얗게 칠해져 있다. 이 흰 벽들이 우습게도 지리 교과서에서 작은 사진으로나 보았던 지중해같다는 생각을 했다. 흰 벽 위로 얹어져 있는 파랗고 빨간 슬레이트 지붕들은 지중해 사진보다는 몇 단계는 더 질이 낮아 보였지만 그래서 택운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 정착했다. 평생 지중해는 가볼 수 없을테니까.
마을은 나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적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이촌향도는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속돼온 시골 마을의 유구한 전통이다. 그래서 햇볕에 타서 얼굴이 검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노인들 사이로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통통한 얼굴은 제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통통하니 귀여운 얼굴과는 반대로 축 처진 우울한 얼굴. 처음 마을에 왔을 때는 어린 놈이 무슨 근심걱정이 그리도 많은지 금방이라도 바다로 뛰어들 줄 알았다고 할매들은 입을 모아 걱정했다. 하지만 죽으러 왔다고 하기엔 또 너무 어려서, 그런데 또 그 어린 아이가 이런 시골까지 혼자 왔다는 게 이상해서 마을의 모든 눈이 그 어린 아이가 사는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파란 대문집으로 모였다. 어전을 파는 할매의 딸 내외가 도시로 가고 나서 몇 년간은 아무도 살지 않던 집이었다.
“글쎄, 오늘은 아주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더라니까.”
“주말에 라면을 잔뜩 사가는 꼴이 그럴 거 같긴 했지만서두.”
“밥 짓는 법이나 알랑가 모르겠네.”
기껏 하는 얘기라고는 가끔 전화 오는 순주들의 근황과 어제 본 드라마의 내용이 다였던지라 택운은 온 마을의 관심이 그 아이에게 쏠린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불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고민했다. 연고도 없이 이런 깡촌으로 왔을 때는 도시에서 복잡한 일들은 다 잊고 시골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한숨 쉬면서 재충전하자는 생각이겠지만 시골마을의 인간관계란 도시에 비해 너무도 가깝고 촘촘해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방값을 몇 개월치를 냈는지, 일시불인지, 분할납부인지, 티비 프로는 뭘 보는지, 하루종일 뭘 하는지까지 시시콜콜한 일상이 남의 수다거리가 된다는 것을 모르겠지. 택운은 무심히 생선들을 토막 내어 대가리를 모아 파란 빠께스에 밀어 넣었다. 작은 낚시 의자에 구겨 앉았던 몸을 일으켜 세우면 180센치가 넘는 긴 몸이 동상처럼 우뚝 선다.
“에그머니! 야그 좀 하고 일어나.”
“그려, 심장 떨어질 뻔 혔네.”
할매들은 택운을 익숙해하다가도 가끔 이렇게 깜짝깜짝 놀랐다. 등이 굽은 할매들은 택운의 가슴팍에도 닿지 못했으니 그들로선 택운이 마치 전설 속 거인마냥 커 보이는 것이다.
***
택운은 할매들의 성화에 못 이겨 챙겨준 찬거리와 계란 몇 알을 소쿠리에 담아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중간중간에 빈 집이 많고 많은데 대체 어느 복덕방에서 집을 구했는지 하필이면 언덕 위의 맨 꼭데기 집이다. 택운은 보폭을 넓게 벌려 언덕을 오르며 허벅지 근육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운동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커다란 근육은 많이 빠졌지만 시장 일을 하며 오히려 잔 근육은 더 생겼는지 손끝으로 누르자 제법 딱딱하다. 택운은 파란 대문을 두드렸다. 탕탕, 텅 빈 금속이 울려 징징 잔음이 남는다. 문은 잠겨있지 않아서 손바닥으로 밀자 끼이익 듣기에 좋지는 않은 소리를 내며 쉽게 밀린다. 키보다 작은 문 안으로 고개를 숙여가며 들어가자 작은 대청에 누워있던 인영이 뒤척거리며 일어난다.
“거주지 불법 침입.”
“…”
머리기름이 헤어왁스처럼 누가 쥐어 뜯기라도 했는지 사방으로 뻗쳐있는 머리를 아주 훌륭하게 잡아주고 있다. 택운은 분명 짐을 옮기는 용역들 사이로 말갛고 하얀 얼굴을 봤는데 지금 눈 앞에 있는 소년은 며칠째 세수도 하지 않은 게 확실한 번들번들한 얼굴에 눈 주변에는 새카맣게 변한 눈물자국까지 있어, 아련했던 첫인상은 온데간데 없이 증발시켜버릴 몰골을 하고 있었다.
“…꼴이 가관이네.”
“내 집에서 내가 이러고 있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누가 들어오랬나.”
남자애는 그 말을 하고 다시 뒤로 벌러덩 누웠다. 택운은 통이 큰 반바지 사이로 보이는 희고 말랑한 살에 잠시 시선을 두다가 대청으로 걸어가 소쿠리를 남자애 얼굴 옆에 두었다.
“너 죽은 거 아니냐고 가서 보고 오라더라.”
“할머니들이요? 오지랖 쩌네.”
“라면만 먹는다며.”
“와, 초콜릿도 사먹었는데 그건 소문 안 났나 보네요.”
꼬였네. 택운은 옆에 앉아 소쿠리 사이에서 찐 감자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 뜨끈한 덕분에 소금이 없어도 목이 막히지 않고 잘 먹혔다. 택운이 작은 입으로 감자를 빠르게 베어 먹는 모습을 남자애는 신기하다는 듯이 보다가 소쿠리를 뒤적여 자기도 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껍질 안 벗겨도 되요?”
“귀찮아서.”
택운은 잘 씻어 삶았다는 전제 하에 질긴 고구마껍질도 개의치 않고 먹는 인물이라 얇은 감자껍질 정도는 오히려 이빨에 찢어지는 느낌을 즐겼다. 남자애는 택운을 보다가 뭉툭한 손 끝으로 껍질을 벗겨내고 먹었다.
"......"
결국은 작은 감자 한 알을 먹고 나서 귀찮았는지 그냥 껍질 채로 와구와구 씹어 먹는다. 택운은 감자를 먹는건지 감자와 싸움을 하는건지 전투적으로 감자를 씹어먹는 광경을 보다가 자기 몫의 커다란 감자 두 알을 그 자리에서 해치우고 일어났다. 양 볼 가득히 감자를 물고 있던 아이가 얼떨결에 같이 일어난다.
"난 저 아래 노란 지붕집에서 살아. 심심하면 놀러 오라고."
대답도 듣지 않고 긴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여 문까지 걸었다. 문득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들뜬 것을 알았다. 아주 또래라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히 오랜만에 비슷한 연령대의 타인을 만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기대감이 깃드는 일인 모양이다. 다시 좁은 문을 넘어가 언덕 아래로 터덜터덜 내려가는데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차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없으면요?"
"뭐?"
"집에 없으면 어디로 찾아가냐구요! 핸드폰 없어요?"
택운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그럼 어시장으로 와."
등 뒤로 시선을 느껴진다. 조금 전의 이름도 모르는 남자애와 감자를 먹은 시간은 택운의 삶에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두근거리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후로 택운은 며칠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어시장 낚시 의자에 쪼그려 앉아서 때때로 언덕배기를 바라보며 그 아이가 언제 내려올까 기다렸다.
그리고 택운은 소금기에 절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문을 열었을 때, 평상에 누워서 자는 소년을 보고 끝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죽기 위해 내려온 이 곳에서 사실은 혼자 너무도 외로웠다는 걸.
***
"이건 뭐에요? 생긴 거 징그러."
"개불."
"이건요?"
"성게."
"이건?"
"멍게."
택운은 스끼다시로 들어갈 자잘한 것들을 골라놓은 빨간 다라를 구경하는 재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재환은 처음엔 시장에 나오지 않고 그냥 택운에 집과 자신의 집만을 오갔다.
처음 택운의 집에 찾아온 날, 평상에서 곤히 자는 걸 깨우지 못하고 담요만 덮어두었더니 해가 지도록 일어나질 않았다. 택운도 옆에 앉아 책을 보며 깨어나길 기다리다가 전신을 덮쳐오는 피곤함에 잠깐 잠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주변이 새카맸다. 택운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조심조심 눈을 떴다. 어두움에 눈이 익숙해지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어둠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에요?"
"나는 이재환이에요."
"배고프니까 라면 끓여줘요."
재환은 택운의 담요 속에 폭 파묻혀 엎드리고 종아리를 세워 발목을 까딱였다. 흰 발목이었다. 택운은 에취, 에취, 추위를 떨치려 계속 재채기를 하며 재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아니고 정택운이야." 재환은 그 뒤로 심심할 때마다 옆구리에 다섯개들이 라면봉지를 끼고 "택운 아저씨!" 외치며 그의 노란 지붕집을 찾았다.
"아저씨는 맨날 바빠."
재환은 석양이 따끈하게 데펴놓은 평상 위에 누워 투덜거렸다. 달이 바뀔 때마다 택운은 몸이 한 개인 걸 불평할 정도로 바빴다. 여기저기 물건이 새로 들어오는 횟집, 양념집, 어전집마다 물건을 옮겨주고 간판을 고쳐주고 이런저런 잡일을 도와주고 다니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갔다. 정씨 총각 내일은 우리 집인 거 알제? 그 담은 우리 집이여! 모두 택운의 날들을 맡아놓았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종일 집에만 있는 재환조차 택운을 부르는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재환은 하루종일 심심한 하루를 보내다가 해가 질 때 즈음 느즈막히 택운의 집으로 걸어갔다. 타박타박 느릿느릿 한 발짝씩 세어가며 걸어도 금방이었다. 그때부터 평상에 앉아 택운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실 눈 뜨고부터 하루종일 택운을 기다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둘은 거의 매일 밥을 같이 먹을 뿐 사실 아무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재환은 아무런 불평을 할 수 없었다. 택운은 재환에게 심심하면 놀러오라고 말했을 뿐이다. 재환이 택운을 기다린 시간에 대해서 그가 책임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재환은 그런 택운과의 관계에서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택운은 재환에게 한번도 "너 언제 집에 가?", "밥만 먹고 갈 거야?" 묻지 않았다.
가끔 택운의 방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나른해진 재환이 깜빡 잠이 들 때가 있다. 택운은 그런 재환을 굳이 깨우지 않고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설거지를 하고 씻고 이불을 편다. 뜨끈하게 보일러를 켜고 재환을 눕힌 후 불을 끈다. 사실 그때 재환은 잠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길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잠에서 깼다. 재환은 숨을 죽이고 자는 체하며 택운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쏴아쏴아, 닫힌 창문 밖으로도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택운은 재환을 내려보았다. 선이 고운 얼굴을 어루만지는 새하얀 달빛. 택운은 조용히 재환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재환은 가만히 눈을 떴다. 택운은 커다란 몸을 불편하게 구겨 눕고는 재환에게 가장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 주었다. 재환은 일어나서 조용히 집을 나갔다. 일부러 달을 외면하고 찬 바람을 맞으며 언덕 꼭데기 파란대문 집으로 걸어 올라갔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잘해주는 건 차라리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다.
"자."
"뭐에요?"
"이제 날씨가 추우니까 방에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
택운은 재환을 걱정했다. 재환은 창문을 열어놓고 다니면 슬며시 담장을 넘어 방에 들어와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길고양이 같았다. 손을 탈 때 쯤 사라져서 걱정할 때 쯔음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언제고 창문을 열어놓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공기가 차가워지고 계절이 바뀌기 시작했다. 택운은 고양이 손에 열쇠를 쥐어 주었다.
택운의 마음을 재환은 다 알 수는 없었다. 무심한 표정의 하얀 얼굴. 어촌 사람들은 바다에 반사된 햇볕에 타서 모두 얼굴이 새카만데 택운은 원채 타지 않는 체질인지 아픈 사람처럼 창백했다. 재환은 택운이 설거지를 하는 사이 슬며시 방을 나가 터덜터덜 집까지 걸어갔다. 이 곳까지 온 이상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혼자 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다가 아니라 산 속에 틀어박혔어야 하는 걸까. 산 속이었다면 나는 혼자 살아갈 수 있었을까. 사실 나는 어디서도 혼자로 살 수 없는게 아닐까? 하지만 혼자 살아가기 위해 찾아온 이 작은 마을에서 받은 온기는 모두와 함께 있던 큰 도시 속에서 받은 온기보다 따뜻하다. 손바닥 위에 놓여진 은색 열쇠를 보며 재환은 지독한 안도감과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감을 동시에 경험했다.
***
"왜요?"
"...왜냐니."
택운은 눈을 깜빡이며 재환을 바라보았다. 재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택운을 향해 다시 한 번 입술을 들이밀었다. 택운은 놀라 뒤로 몸을 뺐다. 이번에는 입술이 닿지 않았다. 재환은 아예 무릎을 세우고 택운의 목을 끌어안으며 품에 안겼다. 택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재환은 택운의 어깨에 뺨을 비비며 살랑살랑 아양을 떨었다.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건데요?"
"...외로우니까?"
"아저씨도 외로움을 타요? 몰랐어."
"응. 외로워."
"그럼 우리 자요. 외로우니까."
"싫어."
"이렇게 굴러들어온 호박을 발로 차는 남자도 다 있네. 고자인가."
"...하아."
택운은 한숨을 쉬고 자신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 재환을 바라봤다. 가볍다. 60키로는 될까. 밥을 먹으며 가벼운 잡담을 하다보니 재환이 17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키는 택운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으니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통통한 볼살을 제외하고는 많이 말랐다. 물기 없는 마른 장작처럼. 버석하게 일어난 거스러미에 아주 작은 불씨라도 튀면 화르륵, 금방 타오를 것 같다.
"왜 나랑 자고 싶은데."
"나도 아저씨랑 똑같아요. 외로우니까. 그리고..."
"그리고?"
"아저씨가 나한테 더 잘 해주면 좋겠으니까."
스무살도 안 된 꼬맹이가 자자고 몸으로 덤비는데 진심인 것 같아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택운은 고민하다가 자신의 무릎에서 밀어내려던 재환을 그냥 가볍게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어린애라 체온이 높은가. 끌어안은 채로 가만히 눈을 감자 가족도 아닌 재환의 목덜미에서 익숙한 자신의 집냄새와 반찬냄새가 났다. 그리고 살냄새가 났다. 성장기 남자애 특유의 땀냄새와 희미한 로션향이 섞여 재환만의 냄새가 났다.
자신도 애정을 갈구하는 제대로 된 방법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이 작은 남자애가 벌써부터 섹스로 애정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재환은 손을 꼼지락 대다가 택운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자고 싶은데. 아저씨라면 정말 자도 괜찮은데.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자면 좋을 것 같은데. 재환은 자신을 안는 택운을 상상했다. 택운이라면 손찌검을 하거나 욕을 하진 않겠지. 택운이 무뚝뚝하지만 사실은 표현 방법을 모를 뿐 다정한 남자라는 걸 안다. 상냥하게 안아주겠지.
"나랑 자요."
"그래."
"이렇게 말구요."
"일단 자고나서."
택운은 자자고 칭얼대는 재환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칭얼대던 재환은 등을 몇 번 토닥여주자 금새 잠이 들었다. 재환은 잠이 많았다. 이 동네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택운과 저녁을 먹고 자는 일이 다였다. 넌 무슨 꿈을 꾸니. 꿈 속에선 모두가 잘해주니. 택운은 재환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재환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될까봐.
***
"할머니 나 배고파."
"그려, 할미가 덮밥 해줄테니까 거 앉아있어."
"나 상추 싫은데!"
"그려, 깻잎으로 바꿔주까?"
"응, 깻잎은 좋아."
시간은 잘도 흘렀다. 재환이 온 지 6개월이 넘었다. 재환은 이제 어시장 할매집들을 돌며 이쁨을 받았다. 밥값은 낸다지만 딸려나오는 후식과 스끼다시는 파는 것보다 푸짐하고 더 좋아서 돈을 내는 건 구색 맞추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할매들은 쌔카맣게 타고 자글자글한 손으로 재환을 쓰다듬으며 예뻐했고 재환은 그 손길 속에서 아이처럼 웃었다. 꼭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티비 프로그램에 나오는 온 동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강아지 새끼같아서 택운은 그런 재환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애정에 목말라 밤마다 자신의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것도.
"...안 돼."
"히잉."
"애교 부려도 안 되는 건 안돼."
"야박해."
재환은 신경질을 내며 이불을 찼다. 택운은 너무할 정도로 칼같았다. 포옹 외엔 기습적으로 하는 입맞춤이 다였다. 그것도 하고 나면 침도 묻지 않았는데 입술을 닦아서 재환은 얼마나 빈정이 상했는지 모른다. 재환은 발을 구르며 떼를 썼다. 이불이 풀썩거리며 먼지가 날렸다. 이미 익숙한 일이라 택운은 재환을 혼내지도 않았다.
"완전 아저씨 손해거든요? 내 입술이 예쁘다고 얼마나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누구한테?"
그 물음에 재환은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택운은 더 묻지 않았다. 이것도 실수였다. 무릎 아래 오목한 곳을 가볍게 때리기만 해도 무릎이 튀어오르는 조건 반사적인 것이었다. 이런 어린애에게 입술이 예쁘다고 칭찬을 했다니 대체 누가. 택운은 눈치를 보는 재환을 끌어당겨 이불을 정리해주었다.
"안 궁금하니까 자."
근데 이상하게 이 말에는 섭섭해지는 것이었다. 궁금하지 않다는 말. 잊을만하면 자자고 졸라도 미친 애새끼 취급하지 않고, 가볍게 따먹지 않고 살뜰히 보살펴주면서도 정말 제 신변에 아무 것도 궁금한 것이 없다는게 못내 속이 상해서. 재환은 택운의 가슴을 아프게 때리고 등을 돌렸다. 그래도 두 사람 몫의 숨소리가 들리면 타인에게 안기지 않은 밤도 무섭지 않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이불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새카만 밤 속에서도 아주 외롭지는 않았다.
***
초겨울 장마가 시작되었다. 가을이 떠나며 시작되는 짧은 장마. 한 바탕 비가 쏟아지고 그칠 때마다 온도가 뚝뚝 떨어진다. 가을은 남겨진 사람들이 잡을 수 없는 긴 꼬리를 남기며 그렇게 한 걸음씩 멀어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찬 비는 밤에 내린다는 것일까. 해가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새벽이 되면 우르르르르 우박처럼 서럽게 쏟아진다. 택운은 창문에 튄 둥근 빗방울을 바라 보았다.
삐비빅-- 삐비빅--
"아..."
핸드폰 알람을 끄고 택운은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플라스틱 약병들을 꺼냈다. 통을 흔드니 안에 약이 얼마 없다. 반도 남지 않은 약병들 뒤로 아직 포장을 뜯지도 않은 제각기 다른 색의 라벨이 붙은 약병들이 주르륵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도 모자랐다. 일주일에 한 주먹도 넘게 먹어야 했으니까. 약도 거의 다 떨어졌고, 곧 검사를 받으러 갈 즘이네. 와르륵, 흰 손바닥에 반이 넘게 색이 다른 약을 쏟아내고 택운은 컵에 물을 따랐다. 물을 머금고 주먹채로 입에 약을 털어넣는다. 택운은 원래 약을 먼저 입에 넣고 물을 마시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약의 양이 너무 많아서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약을 먹는 방법을 바꿨다. 이제 혓바닥에 약의 쓴 맛이 남지 않아 좋았다. 꿀꺽, 목구멍으로 알약들이 넘어가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택운은 서랍을 정리했다. 엠트리시타빈은과 에파비렌즈는 두 통이나 남았는데 테노포비르는 한 통밖에 없네. 빈 통들도 버려야겠다.
"아악!"
바깥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재환이다. 택운은 허겁지겁 약통을 서랍에 밀어넣고 서랍 문을 닫았다.무슨 일이지? 현관문쪽으로 급하게 뛰었다. 현관문을 벌컥 여는데 손 끝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재환아!"
번쩍, 눈 앞이 새하얗게 물든다. 몇 초 뒤에 콰르릉, 천둥이 쳤다. 아악! 동상처럼 서있던 재환이 높은 비명을 지르면서 택운의 품에 안겨왔다.
"너 왜 이렇게 젖었어? 우산 안 썼어?"
비에 푹 젖은 재환은 벌벌 떨었다. 택운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재환을 집으로 들였다. 이런. 미처 정리하지 못한 약병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택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약병을 정리해서 서랍에 넣고 선반에 개어 놓은 수건을 집었다.
"이걸로 몸 닦고..."
택운은 깜짝 놀라 재환에게 건네던 수건을 도로 뺏어서 바닥에 던졌다. 재환은 반사적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수건을 쫓으며 뼛속까지 에는 추위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비를 맞은 건 자신인데 택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대체 왜?
"아저씨, 왜 그래요? 어! 손 다쳤잖아요. 피 난다."
"건드리지마!"
택운이 재환의 팔을 거세게 뿌리쳤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휴지통에 버리고 구급상자를 꺼내 다친 손을 지혈했다. 재환은 택운의 그 불안하면서도 일사불란한 행동을 지켜보다가 미처 치우지 못한 약통을 발견하고 택운이 볼 수 없게 그 위로 젖은 옷을 벗어 놓았다.
"천둥소리가 무서워요..."
속옷마저 벗은 알몸으로 택운의 등을 끌어안으며 재환은 택운에게 섹스를 요구했다. 재환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준다면 아저씨의 비밀은 지켜줄게요. 하지만 택운은 평소와는 달리 재환에게 팔베개조차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재환이 씻고 나오자 이미 이불을 펴고 누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감기에 걸리지 말라고 보일러를 세게 튼 절절 끓는 바닥에 주저앉아 재환은 택운의 등을 노려보다가 자신의 젖은 옷더미 사이의 황금열쇠를 떠올렸다. 황금열쇠로 비밀의 문을 열었을 때 나오는 것이 그 무엇이라고 해도 이대로 무인도에 갖혀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재환은 크게 앓았다. 아무리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보일러가 절절 끓는 방에서 잤어도 이미 세찬 겨울 장마 속에서 차갑게 식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몸은 아주 작은 외부의 공격에도 무너지기 쉬운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지어낸 커다란 댐도 손가락만한 구멍을 시작으로 와르르 허물어지건만 재환은 너무 크게 아팠다. 더군다나 그 댐의 바닥은 썩은 것들로 가득 차서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빠지지 못해 위험수위까지 수면이 높아진 상태였다. 그리고 토목공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눈에 보일 정도로 커다랗게 나있는 끔찍하게 깊은 균열들. 택운은 그런 재환을 두고 도망쳤다.
"미안해."
그 말은 택운의 대답이었다. 재환을 유독 달갑지 않아하는 집주인 할매에게 재환을 맡기고 떠나면서 택운은 뒤를 돌아 방 문 사이로 땀을 잔뜩 흘리며 끙끙 앓는 재환을 봤다. 계속 택운의 머리속을 휘젓는 재환의 말.
"그럼 우리 자요. 외로우니까."
***
재환은 3일을 꼬박 앓다가 눈을 떴다. 재환을 돌보던 집주인 할매는 어느새 재환을 자기 자식처럼 품에 안고 흰 미음을 먹였다.
"아가, 한 숟갈만 삼켜봐. 응?"
"시러어... 목 아프단 마리야..."
성대가 사포에 간 것처럼 상했다. 재환은 제 목소리가 낯설었다. 열기와 땀에 푹 잠겨서 칭얼거린다. 할매는 난데없이 나타난 재환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3일동안 울리지도 않고 그대로 방전되어버린 재환의 쓸데없이 비싸보이는 핸드폰이 그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 재환을 동정했다. 이미 자신보다 훌쩍 커다란, 마른 젓가락같은 남자애는 열에 들떠 훌쩍이며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못했다. 열이 좀 내렸던 새벽에 재환은 일어나서 자기 옆에서 이불을 펴고 자는 할매를 조심히 깨워 물었다.
"택운 아저씨는요...?"
"잠깐 어디 갔어. 금방 올겨."
그 말조차 믿지 않는지 재환은 등을 돌리고 잘게 떨며 울었다. 꼬박꼬박 월세를 잘 내는 밀가루 반죽같은 사내가 어떻게 이 어린 애를 구워 삶았길래 이러는지. 주름이 지고 까맣게 타버린 거친 손으로 마른 등을 어루만져주자 퉁퉁 부은 얼굴로 품에 안겨왔다. 세월의 흐름 속에 바닥에 붙도록 축 처진 젖가슴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남자애는 어미 젖을 먹지 못하고 자란 고아같은 아이라고.
***
택운은 집을 떠난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에 다시 집에 왔다. 터미널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환승센터까지, 그 환승센터에서부터 동네로 들어가기 위해 1시간에 한 대가 겨우 오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흔들리는 버스 안에 앉아 있었다. 겨울 바다는 우울증에 좋지 않을 거라고 택운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파란색과 회색 사이 어딘가에 걸쳐진 우울한 흐린 하늘 아래로 채도가 낮은 남색 바다가 철썩인다.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택운은 재환을 생각했다. 가만히 부서지는 흙이고 싶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모래알이고 싶다. 하지만 재환은 파도처럼 택운을 덮쳐 택운은 다른 모래알처럼 바다 속을 데굴데굴 구르며 더 깊은 곳으로 빠지고 있었다.
아직도 집에 있을까. 집을 떠날 때보다 조금 더 묵직해진 가방을 메고 하얀 집들이 가득한 언덕을 오른다. 택운이 집을 얻었을 때 페인트 가게에 남은 페인트는 민들레빛 노란색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빛이 바란 노란 지붕이 택운을 반긴다. 택운은 차가운 철문을 밀었다.
"없네."
재환이 처음 왔을 때는 막 여름이 시작하던 따스한 계절이었다. 새하얀 겨울의 문턱을 지난 지금 재환이 평상에 누워있기를 기대한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택운은 평소보다 좁은 보폭으로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숨을 삼킨다. 현관문 안에 잿빛 돌 위에는 재환의 신발이 아무렇게나 벗어진 채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손에서 땀이 난다. 택운은 허벅지에 손을 슥슥 문질러 땀을 닦아내고 둥근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하."
재환이 따뜻한 방에서 몸을 말고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얼굴로 훅 끼쳐오는 온기. 따스한 집의 냄새. 어디서 얻어 온 것인지 재환의 옆에는 귤 바구니와 삶은 고구마 소쿠리가 있었다. 택운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무릎 걸음으로 기어서 재환을 끌어 안았다.
너무 비참했다.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삶이겠지. 아니, 의미따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소리를 질렀다. 나에겐 그저 살아있는 삶 자체가 중요하다고, 발악했다. 최초로 내려진 사랑이 내게 독이었는데, 그런 내게 사랑은 사치라고 스스로에게 성토했다. 하지만 너무 비참했다. 사랑을 갈구하는 너를 좁은 방에 버려두고 버스를 타고 떠날 때,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삶을 연명해주는 약을 받아올 때. 정말 이게 내가 살고 싶었던 내일이었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 울고만 싶었다.
"고마워."
내 무릎 사이가 아니라 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게 해줘서.
흔들리는 택운의 등을 재환의 팔이 안았다.
"미워요."
"미안해."
"진짜 미워요."
"미안해. 이젠 안 그럴게."
"진짜... 너무 미워...."
흐어엉, 터져버린 재환의 울음에 택운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재환은 떨리는 팔로 가까스로 주먹을 쥐고 택운의 어깨를 내려쳤다. 미워! 미워요! 아저씨가 제일 미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택운은 서러움에 엉엉 우는 재환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입 맞췄다. 택운의 눈물이 재환의 눈가에 떨어진다. 재환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두 사람의 눈물은 아주 깨끗했다. 어떤 균도 바이러스도 없이.
***
두 사람은 퉁퉁 부은 얼굴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었다. 재환이 택운의 가슴팍을 파고들 때마다 택운은 금방이라도 밀어낼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가 의식적으로 힘을 풀고 재환을 깊게 안았다. 재환은 히, 소리 내서 웃으면서 택운의 가슴에 뜨거운 이마를 비볐다.
"아저씨, 나랑 자요."
택운은 재환의 등을 쓰다듬으며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재환은 택운의 옷을 걷어 맨 허리를 만졌다.
"괜찮아요. 다 알아."
그 말에 택운은 반사적으로 몸이 굳는 것이다. 내가 언제 꼬리를 흘렸지 습관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비디오 되감기를 하듯 떠올리면서.
"나는 섹스하다가 죽어도 상관 없어요."
"아저씨가 에이즈라도 상관 없어요."
"내가 에이즈에 걸려도 좋아요."
재환은 태연히 열쇠를 쥐고 택운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그 열쇠의 끝엔 칼날이 붙어 있는데도 개의치 않는다.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잠깐, 재환아."
"나 다 알아요. 방에 있던 약병 이름으로 검색했어요. 아저씨 에이즈인거."
"에이즈 아니야!"
에이즈 에이즈 에이즈. 택운은 품 안의 재환을 밀쳐내며 버럭 화를 냈다. 재환은 놀래서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고도 다시 택운에게 안기려고 애를 썼다. 자신의 어깨를 미는 택운의 손을 잡아 벌리고 그 품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알았어요, 에이즈 아니에요. 무슨 병이든 난 아저씨면 다 괜찮아요."
택운은 울고 싶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줄 알고 괜찮다고 말하는 거니. 일그러진 택운의 얼굴을 보며 재환은 마음이 급해졌는지 손바닥으로 택운의 사타구니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나 잘해요. 칭찬도 많이 받았어요."
재환은 몸을 일으켜 택운의 위로 올라탔다. 처음에 왔을 때만해도 어린 티가 많이 나던 얼굴은 반 년 사이에 꽤나 남자답게 변했다. 며칠을 앓으며 젖살이 빠져 뚜렷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재환은 자신의 통통한 입술을 핥고 두 다리를 벌려 택운의 하체에 올라타 그 사이로 남자를 받고 싶어했다. 재환은 허리를 흔들어 택운의 하체에 엉덩이를 비볐다. 보통 이정도면 딱딱해지는데. 재환은 자신이 너무 에이즈라고 직접적으로 말해서 택운이 마음이 상했다고 생각했다.
남자 어른들은 이걸 좋아해. 화가 났을 때는 이렇게 해야돼. 재환은 택운의 위에서 내려와서 바지를 벗겼다. 헐렁한 트렁크 안으로 손을 넣으려고 하자 택운이 몸을 일으켜 재환을 밀어냈다.
"잘못했어요, 잘 할게요!"
"니가 뭘 잘못했는데?"
"눈치 없이 떠들어서..."
재환이 고개를 들어 택운을 올려다 보았다. 택운은 다시 울고 있었다. 택운은 재환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재환을 안았다.
"나는 섹스 못해. 한 번도 안해봤어."
그 말에 순간 재환은 수혈이나 피를 통한 감염을 생각했다. 아니면 강간을 당했을까. 나처럼.
"나는 HIV야. 에이즈가 아니라."
택운은 울고 있었지만 묘하게 웃는 얼굴처럼 보였다.
"분명히 내 엄마란 여자는 나를 버리고 가버렸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자기 새끼라고 불쌍했던 모양이지?"
아니, 분명 웃고 있다.
"나는 모유를 통해서 감염됐어."
***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택운은 여전히 이 집 저 집을 도우며 바쁘게 일을 했고 일당을 받았다. "약값이 많이 비싸?" 재환이 언젠가 물었지만 택운은 고개를 저었다. 정부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는 덕에 약값은 다른 불치병에 비해 비싸지 않았다. 그저 택운은 자신의 인생에 값을 매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가 축구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것보단 더 비싼 삶을 살았을까. 아니면 진작 자살했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자살할까. 택운이 재환을 만나기 전까지 매일 했던 고민이었다.
"귤 사왔어."
"오예, 이번엔 작은 걸로 사왔죠?"
재환은 택운이 내미는 검은 봉지를 받아들고 다시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택운이 바닷바람과 물고기 비린내가 잔뜩 묻은 겉옷을 옷걸이에 거는데 재환이 손을 내밀었다.
"묻었잖아."
재환의 뭉툭한 손 위에서 투명한 비늘이 반짝인다. 무슨 맛일까? 중얼거리며 재환은 그대로 손가락을 삼켰다. 붉은 입술 사이로 사라지는 빛이 마치 자신인 것처럼 느껴진다.
"시시해. 아무 맛도 안 나!"
재환은 택운을 향해 웃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병없이 버틴 시간이 이제 곧 30년이 된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알 수는 없겠지. 째깍째깍 자꾸 흘러만 가는 시계 바늘을 멈추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택운은 눈을 감았다. 이제 꼼짝없이 죽을 때까지 이재환 하나만 바라보게 될 것 같다.
***
"오늘이에요?"
"아니."
택운은 재환의 기대를 다시 내일로 미루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재환은 툴툴거리며 택운의 옆에 누웠다. 몸을 겹친다. 이대로 누가 칼로 찌른다면 함께 관통당해 죽을 수 있게. 창문 너머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바로 맞닿은 몸에서 울리는 심장소리가 겹쳐져 아득하다. 택운은 눈을 감았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와 두근두근, 심장이 세차게 피를 내뿜는 소리. 모두 다 살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 치고 있다. 택운은 재환을 꽉 안았다. 이 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영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 죽고 싶다. 너와 함께. 안 된다면, 나 혼자라도.
재환은 택운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고 중얼거렸다. 택운이 하루씩 잠자리를 미룰 때마다 했던 고민의 조각들을 조심히 토해낸다.
"아저씨가 나한테 안 옮겨주고 혼자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왜?"
"아저씨는 외로움을 너무 잘 타니까."
눈물을 머금고 헤헤 웃는 재환의 얼굴을 보며 택운은 재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그를 꽉 안았다. 아직은 용기가 없다. 만약 내가 널 안아서 네가 나와 같아지면 나는 널 지금처럼 아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살 용기도 없다. 재환은 아주 정확한 눈을 갖고 있다. 외로워. 지금도 외로워서 너를 나처럼 만들고 싶어. 가만히 재환이 해준 말을 떠올린다.
"우리 외삼촌은 지능이 좀 모자란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어린 나보다는 훨씬 똑똑했고 힘도 세서... 난 삼촌을 많이 좋아했어요. 삼촌도 나를 많이 좋아했구요. 엉덩이가 아파도 난 삼촌이 착하다고 해줘서 좋았는데..."
너는 너와 자줄 어른 남자가 필요하고 나는 날 지탱해줄 사랑이 필요하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우리. 우리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생각해요?"
재환이 택운의 등을 토닥였다. 같이 밤을 보낸 날들은 손으로 꼽을 수도 없다. 함께한 날의 달빛은 두 사람의 몸에 차곡차곡 쌓여 나이테같은 무늬를 남기고 있다.
"자자."
"응, 내일은 꼭 자요."
"그거 말고."
"헤헤, 난 그거 말하는 건데!"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웃음은 느낄 수 있다. 택운은 재환의 보드라운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오래 살수록 남는 건 비참한 나날뿐이란 걸 알면서도 너를 보면 하루라도 더 버티고 싶어진다. 그러니 언젠가 나를 죽여야지. 아직 네가 날 사랑할 때. 사랑해서 따라오지 않고는 못 견디겠을 때. 내가 나를 죽여 너의 사랑을 지키고 네가 너를 죽여 우리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는 저 바다로 떠내려가 깊은 해저에 숨어 물보다 차가운 불에서 타오르면서도 함께 있게 될 거야.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는 저 바다 아래에서.
쏴아아, 그때 재환은 알았다. 저 쉼없이 치는 파도소리가 달라졌다는 걸.
재환은 택운의 팔을 푸르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훈기로 가득했던 방에 날카로운 겨울 바람이 들이치자 택운도 일어나 재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재환의 머리칼을 헤집는다. 재환은 몸을 돌려 택운을 보며 웃었다.
"아저씨, 봄이 오려나봐요."
이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재환은 봄을 기다렸다. 택운은 품 안으로 뛰어드는 재환의 몸을 받아내며 고민했다. 이 파도소리 어디에 봄이 걸려있는지. 저 창문 너머 어디에 봄이 피어 있는지. 택운의 고민도 모른채 재환은 그저 이곳에서 처음 맞는 봄을 기대하며 택운의 입술에 키스했다.
파도소리 아래에서 두 사람은 다른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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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이 많은 글이지만 이게 최선인 거 같아요...;ㅅ;
다시 한번 폭우님 예쁜 홈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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