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켄] 애정계급 (上)(下)
모든 사람은 고아가 되기 전까지는 어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내리사랑을 주는 부모가 죽은 후에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따뜻한 명언이지만 내 상황에 적용하자면 아주 개소리가 따로 없다. 저 말대로라면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어른이었다. 고아나 다름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저 명언의 딱 반대 상황인 것이다. 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유아기, 유년,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내가 고아인 줄 알았다. 하긴, 어머니란 여자는 죽지는 않았을 거라 예상은 했다. 애를 버리고 도망갔으니 저 살 길 찾아 잘 살았겠지. 생물학적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있 것은 고등학교 때나 알았다.
지금도 상황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내게 부모란 그쪽이 죽든 죽지 않든 내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날 버린 어머니와 내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아버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굳이 생각해보자면 친할아버지정도가 피붙이로서 날 대하지만 그것도 정상적인 사랑이 아닌 자기애와 연민에 한없이 가까운 감정이다. 세상에서 나를 정말로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딱 한 명.
“홍빈아, 말 안 해서 미안해. 형 원식이랑 만나고 있어.”
이재환.
내 앞에서 내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재환.
[홍켄] 애정계급
나는 이재환과 형제처럼 컸다. 4살 이후로 쭈욱.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엄마의 얼굴도 아닌 이재환의 얼굴이며 내 유년시절 역시오로지 이재환뿐이다.
이재환의 아버지는 착한 난봉꾼이었다. 난봉질하는 사람에게 착하다는 수식어를 붙여도 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정말 단어 그대로의 남자였다. 이재환의 아버지는 난봉꾼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걸맞게 여자를 좋아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도박도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도 좀 했던 것 같다. 약은 안 했어도 최소한 본드 정도는 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비교적 젊은 장년의 나이에 그렇게까지 빨리 몸이 망가지진 않을 것이다.
난봉꾼인 이재환의 아버지가 착하다는 수식어를 갖게 된 까닭은 순전히 그의 특정한 한 행동에 있다. 무언가를 잘 주워오는 버릇. 남자는 보통의 난봉꾼 치고는 맘이 약하고 정에 잘 이끌려 버려진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고양이, 강아지는 예사고 아이들까지 주워왔다. 자신과 밤을 보낸 술집 작부들이 몰래 키우는 사생아나 우울한 얼굴로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원장이 애들을 때리기로 악명 높은 동네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들은 모두 이재환의 집을버스 정류장이라도 되는 듯 한 번씩 거쳐갔다. 하지만 이재환의 아버지는 주워올 뿐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 책임지지 못하는 짐들만 늘어날 뿐인데 왜 그리도 열심히 주워 왔을까. 생각해 보면 책임지지 않으니 그들이 금방 도망가리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랬던 것 같다. 어차피 도망간다는 결말을 알고 있으니 대책없는 선행을 베풀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겠지. 남자가 선행으로 주워온 것들 중에 남은 것이라곤 나밖에 없다.
고아원의 아이들이야 조용히 며칠 지내다 여기서 있어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거나 제 살 길을 찾아 조용히 집을 떠났지만 사생아들은 달랐다. 험한 꼴을 보고 살아온 그들은 돈이 될 만한 세간살이를 훔쳐 도망갔다. 어차피 그들도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을터였다. 어떻게 하면 애가 생기는지, 애를 어떻게 낳고 어떻게 떼는지를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컸으니까. 작부들은 남자를 알게 된 기간과 아이의 나이 햇수도 맞지 않으면서 아이가 남자의 자식이라고 우겼고 그런 말을 들으면 남자는 차마 그 아이를 버릴 수 없어 못이기는 척 받아주고야 말았던 것이다. 창녀의 자식들은 그나마 성한 물건들을 싹 털어가며 남자를 비웃었다. 제 것도 못 챙기는 병신. 거절을 못하는, 정에 이끌려 모든 걸 망친 남자. 제법 남부럽지 않게 살던 이재환의 가족이 꼬질한 달동네로 이사 오게 된 것도 남자가 몇차례 보증을 섰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이재환의 형들은 그들의 어머니가 상냥하지만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도둑질이나 퍽치기같은 소상한 범죄가 매일같이 일어나는 동네에서 자신들이 잘 클 수 있던 건 심지가 곧은 어머니 덕분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런 제대로 된 여자가 아버지의 그따위 난봉질을 오래 버텼을 리가 없지. 나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이재환의 어머니는 전래동화 속 날개 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아니었는지 아이 셋을 낳고도 미련 없이 남자를 떠났다. 물론 세 아이도 데려가지 않았다. 희망 없이 망가져가는 남자를 보며 더 이상 자기 인생을 더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겠다 싶었던 것일까. 그런 남자의 자식이니까 꼴도 보기 싫었던 것일까. 그녀는 마지막 남은 모정으로 이재환이 젖을 뗄 때까지 기다린 후에 집을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주색잡기에 빠져 삶과 피붙이들을 등한시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에게 버림 받은 형들은 이를 악물고 핏덩이인 재환을 키워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 속에서 큰 이재환은 나를 키워냈다.
나는 이재환의 옆집에 살았다. 내 어머니란 여자는 짐 덩어리에 불과한 나를 이재환의 아버지에게 맡기고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여자들은 참 똑똑하면서도 멍청하지. 애가 짐덩어리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낳지 말지. 왜 낳은 후에 버리는 걸까. 어쨌거나 형들은 내 친가쪽 사람들이 찾아오기 전까지 내가 옆집 여자에게서 낳은 아버지의 사생아인 줄 알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주워온 고아들과는 다른 진짜 자식. 하긴 책임감이란 몸의 티끌만큼도 안 보이는 남자가 내 손을 이재환의 손에 쥐여주고 잘 돌보란 말까지 했으니 그런 오해를 할 법도 하다. 형들은 내 어머니와 그들의 아버지가 바람이 나서 어머니가 도망간 것이라고 상상하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우릴 그냥 버렸을 리는 없어. 쟤. 바로 쟤 때문에 우릴 버리고 간 거야. 쟤만 아니었으면 엄마는 우릴 버리지 않았어. 갈 곳 없이 치솟은 분노는 모조리 내게 쏟아졌다. 4살짜리 꼬마를 죽일 듯 노려보던 차가운 시선들. 어렸던 이재환만이 나를 기꺼워했다.
난봉꾼 아버지, 형 둘, 그리고 이재환. 이 네 명 중 이재환만 달랐다. 이재환의 얼굴은 철저히 어머니를 닮았다. 높은 코는 난봉꾼 아버지의 피를 타고난 것이지만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어머니를 닮았다고 큰 형은 말했다. 보통의 남자보다 흰 피부, 커다랗고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둥근 눈, 웃을 때 도톰하게 올라오는 애교살, 도톰한 입술, 뾰족하고 갸름한 턱, 그리고 다정한 성격. 형들은 아버지를 닮은 자신들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닮은 자신의 모습은 분명 내 생각보다 끔찍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형들은 이재환을 몸 속의 심장처럼 아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분신. 아버지의 난폭하고 다혈질적인 성정을 그대로 타고난 자신들과 다르게 순하고 착한, 사랑이 많은 여리디 여린 막내 동생.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들은 이재환이 울거나 웃을 때마다 어쩔 줄 몰랐다. 울 때는 뭐든 해주지 못해서 가슴을 치도록 슬펐고 웃을 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그래서 형들은 미워하는 나를 받아줄 수 밖에 없었다. “혼빈이는 재화니 동생이야! 재화니가 동생 갖고 싶어서 밤에 엄마가 주고 가써!” 이재환이 아버지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해맑게 웃었기 때문이다.
내게 이재환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동아줄이 썩은 것이든 성한 것이든 잡지않으면 나는 당장 죽을 게 분명했다. 잡은 것이 썩은 동아줄이라 내 몸이 하늘에서 떨어져 수수밭이 피로 빨갛게 물든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저 나는 내 생에 동아줄이 내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감격했다. 그리고 천우신조로 동아줄은 멀쩡했다. 멀쩡한 것을 뛰어넘어 오히려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눈물이 날 정도로.
어렴풋한 유아기의 기억 속에서 나는 치우지 않은 생활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방 안에서 언제나 엄마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그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엄마는 나를 때리기만 했다. 아팠다. 너무 아파서 제대로 된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다. 엄마는 나를 쓸모 없는 새끼라며 발로 찼고 괜히 낳았다고 뺨을 때렸다. 소리 치고 울어봤자 봐주기는커녕 때리는 손길이 더 매서워졌기 때문에 몸을 최대한으로 웅크리고 견뎠다. 나는 네 살 때도 젖살이랄 게 없이 수수깡처럼 깡 말랐다. 밥도 애정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그런 내게 옆 집은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젖살이 포동포동한 어린 이재환은 언제나 형들에게 안겨 웃고 있었고 나는 작게 열린 문틈으로 그걸 언제나 훔쳐봤다. 같은 집 구조, 같은 동네, 같은 불우한 환경 속에서 이재환만이 세상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빛나는 작은 별 같았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형들의 단단해 보이는 팔이 작은 이재환을 꽉 안고 있는 걸 보면 부러웠다. 그땐 부럽다는 감정이 뭔지도 몰랐지만 다만 저 팔이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저렇게, 손을 내밀면 나를 안아오는 팔이 있다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술로 얼굴이 새빨개진 남자가 나를 옆집으로 데려갔다. 더 이상 집에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지도 않게 되었을 때였다.
“재환아, 아빠가 얘기한 거 기억하지? 이제 홍빈이가 니 동생이야.”
“재화니 동생이야?”
이재환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가 까르륵 웃었다. 옆집은 천국이었고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던 나 같은 쓰레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 어린 이재환은 문 밖에서 덜덜 떨면서도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내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데려갔다. 앙상하고 까슬한 내 손과 다르게 이재환의 손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이제 형아가 계속 같이 있어주께. 혼비니는 재화니 동생이니까!”
사랑 없는 세계에서 오로지 이재환만이 나를 사랑해줬다. 사랑. 사랑이라는 말을 처음 배웠을 때부터 나는 언제나 이재환에게 사랑을 요구했다.
“형아, 혼비니 사랑해?”
“응, 형아는 혼비니 너무너무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가슴이 벅찼다. 울다가도 웃었다. 그냥 너무 좋았다. 태어나서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는 말. 그 말을 듣기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어린시절 내게 사랑은 세상보다 컸다. 삶보다 컸다. 보잘 것 없는 나 자신보다 컸다. 나는 이재환이 말해주는 사랑해를 듣기 위해서 세상도, 나도 버릴 수 있었다.
형들은 나를 못 마땅해했지만 기본적인 상식은 있는 사람들이라 이재환을 챙기며 최소한으로 나를 돌봐줬다. 가장 가까운 혈육인 어머니에게서도 아무것도 받은 적 없는 내겐 그 정도도 충분히 넘쳤다. 이 모든 것들이 이재환이 준 것이었다. 이재환이 준 것들로 자란 나는 이재환이 없다면 아주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태양이 없으면 시들어 죽어버리는 꽃처럼, 이재환이 없으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이상하단 걸 깨달은 건 14살, 처음 여자와 섹스할 때였다.
얼굴이 잘생겼다는 것은 여러모로 편리한 일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에 가까운 얼굴을 가졌던 나는 이재환과 형들에게 케어를 받아 사람 꼴을 하게 된 후부터 언제나 주위에 사람이 가득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마자 또래보단 학년이 높은 누나들이 반마다 찾아와 치마를 걷어 올려 흰 허벅지를 보여주며 서로 나를 갖겠다고 다퉜다. 초등학교보다 규모가 더 커진 중학교 때는 더 난리였다. 한 번은 사이가 나쁜 년들끼리 살벌하게 싸우다가 가만히 있어도 터질 것 같은 교복 단추가 다 튿어져 흰 레이스 브래지어와 딸기 무늬에 귀여운 팬티가 아이들 앞에서 가감 없이 보인 적도 있었다. 반 남자애들은 좋은 구경 고맙다고 낄낄대며 내게 인사했다.
“홍빈아, 누나 가슴 만지면 되게 기분 좋을 텐데. 한 번 만져볼래?”
“별로.”
“아앙~ 한 번만 만져봐~ 만져보면 빨아보고 싶기도 할 걸?”
먼지만 뒹구는 체육 창고에서 뭐가 그리 발정이 났는지 여자는 거의 발가벗고 내 위로 올라탔다. 난 그때 아직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내 최초의 여자는 어머니였고 그 여자는 날 때리고 버렸다. 나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악랄하게 때리고 밟아서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한 편으론 그 보드라운 품에 안기고 싶은 모순적인 감정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후크를 풀고 가슴을 내놓기에 호기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남자에게는 없는, 부드럽고 말랑한 기관. 중학생치고 커다란 가슴은 확실히 기분이 좋았다. 믿을 수 없게 말랑말랑한 살덩이가 내 작은 손으로 이렇게 저렇게 만질 때마다 모양이 변했다. 내 몸 어디에도 그런 부위는 없었다. 작은 두 손으로 가슴을 쥐고 주물럭거리자 모양이 둥글고 커서 음탕해 보이는 밝은 갈색의 유두가 금세 딱딱해졌다.
“후응....빨아볼래? 누나도 니 꺼 빨아줄게…”
“맘대로 해.”
“그럼 누나가 먼저 빨아줄까?”
여자는 핑크색 매니큐어가 발린 긴 손톱으로 바지춤을 풀어헤치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축축하고 따뜻한 온도의 매끄러운 점막이 가장 예민한 곳을 감싸서 빨아올리자 이유를 숨이 가빠졌다. 여자는 쩝쩝거리며 천박하게 나에게 사까시를 선사하고 몸을 일으켜 스스로 팬티를 벗어 던졌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에 제 구멍을 맞춰 내려앉고 허리를 흔들어대는 여자를 보며 나는 알 수 없이 화가 났다. 둘둘 말린 매트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켜 여자를 깔아 눌렀다.
“아흑, 아앙… 아, 홍빈…아… 하앙!”
“닥쳐, 흣, 씨발년아.”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연결된 곳에서 질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줌이라도 싸는 거야? 미친 년. 존나 질질 싸대네.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나중엔 여자가 훌쩍훌쩍 우는 것도 같았지만 입술을 몇 번 빨아주니 금방 웃으며 달라붙어왔다. 쌀 거 같은 순간, 머리 속에 지난 달 받았던 성교육이 떠올라 황급히 안에서 빼내어 밖에 사정했다. 그리고 콘돔을 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안에 쌌으면 애가 생길 수도 있었던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 눈 앞이 새빨갛게 변했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아 저도 모르게 엉겨 붙어오는 여자의 목을 두 손으로 세게 붙잡았다. 조금씩 힘을 주려다 공포심이 섞인 당황한 눈을 보자 정신이 들었다. 얼른 손을 내리고 다급하게 바지춤을 추슬렀다. 거의 넘어지듯 창고를 뛰쳐나와 생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다. 목적지는 재환의 반이었다. 재환아, 이재환! 뒷문을 열고 다짜고짜 소리치는 나를 보고 재환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는 이재환을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그냥은 무슨,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는데. 식은땀 봐. 괜찮아? 형아랑 양호실 가자.”
재환의 따뜻한 손에 붙들려 양호실로 가는 동안 깨달았다. 난 애는 평생 갖지 못할 거야. 평생 여자를 좋아할 수도 없을 거야. 나는 벌벌 떨었다. 여자는 좋다. 엄마 같으니까. 여자는 싫다. 엄마같으니까. 여자를 증오한다. 나같은 애를 만들 수 있으니까. 나는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를 죽이고 싶었다.
양호실에 가자 선생은 내가 딱히 열도 없고 이상증세도 없으니 침대에서 쉬다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굴이 충격으로 창백하게 질린 것만큼은 사실이라, 재환은 내가 걱정이 됐는지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서 계속 손을 잡아주었다. 다른 손으론 내 이마를 쓰다듬었고 티슈를 뽑아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엄마. 이재환은 내게 이상적인 엄마 그 자체였다. 날 버린 엄마 대신 나를 키웠고 낳아준 엄마한테서도 받은 적 없는 애정을 아낌없이 부어 주었다. 만약 이재환이 여자였다면, 내가 이재환에게서 태어났다면 나는 한 번도 불행한 적 없이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눈물이 줄줄 흘러 나왔다.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이재환이 남자인게 너무 좋았다. 이재환은 절대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기뻤다. 너한테 아기는 나뿐인거야. 너의 절대적인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야. 날 걱정하고 위로하는 이재환이 너무 좋아서, 이대로 넘어트려 갖고 싶었다. 아무도 못 보게, 아무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게, 오로지 나만 사랑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이재환의 옷을 벗겨 남자다운 작은 젖꼭지를 엄마 젖을 빨듯이 물고 입에서 굴리고 싶다. 이재환의 성기를 부드럽게 입으로 감싸고 애무해서 모유같은 흰 정액을 삼키고 싶다. 이재환의 구멍에 내 성기를 맞춰 밀어 넣고, 이재환의 가장 깊은, 가장 부드러운 내장으로 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사랑하게 만들고 싶다. 그것만이 나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내 염원을 쉽사리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사회에서 동성애란 더러운 호모새끼들이 서로 똥까시나 해준다고 배척 받고 경멸 당하는 존재였고 특히나 나와 이재환처럼 불우한 사정을 가진 놈들이 붙어 먹는다면 우린 그야말로 오물 그 자체가 되어버릴 테니까. 나야 태어날 때부터 오물이었으니 상관없다지만 재환이 나때문에 그런 꼴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이지 끔찍했다. 이재환은 세상 누구보다 사랑받고 가장 좋은 것만 누려야 한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쯤은 내가 해줄 수 있지만 이재환이 그걸 원할까? 나는 몸을 사렸다. 하지만 이재환을 안고 싶은 욕망은 사그라 들지를 않아서 여자 몇을 만났다. 절대 콘돔없이 하지 않았다. 밥을 굶을지언정 콘돔은 꼭 샀다.
"니가 이홍빈이니?"
"그런데요."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3학년 말쯤에 누군가가 날 찾아왔다. 재환이 고등학생이 되어버리고서는 내게 학교생활이란 의미가 없었다. 시발, 이재환 보는 낙도 없이 어떻게 학교를 다녀. 나는 이재환의 등교시간에 맞춰 같이 집을 나섰고 재환의 하교시간에 맞춰 학교 앞으로 데리러 갔다. 간혹 친구들과 놀겠다고 문자를 보내올 때면 나는 너무 짜증이 나서 하루종일 인상을 쓰고 다녔다. 이재환은 밝고 착하고 애교 많고, 여하튼 집안 환경 빼고는 모조리 가졌기 때문에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 날도 재환이 친구들이랑 논다고 연락을 해서 신경질을 내며 무단 조퇴를 한 날이었다. 집에서 딩굴거리며 이재환의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들이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아버지쪽의 접촉이었다.
정확히는 친할아버지의 접촉이었다. 자식을 일찍 봐서 아직까지 정정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후계자로서 탐탁치 않아 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포함한 자식들의 인생을 훑어내고 손자손녀들의 현재를 확인하며 후계자의 싹을 찾아내던 중, 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상식이라곤 없는 내가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기업의 회장이라니. 나는 당장 수행원을 따라 할아버지에게로 갔다.
"흠... 잘 생겼구만."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나는 내가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알았다. 나는 철저한 친가쪽 피를 타고난 놈인가보다. 어머니란 여자의 피는 어디로 갔는지 나는 눈 앞의 할아버지와 완벽하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수 십년 늙는다면 저런 얼굴이 될까. 할아버지의 눈이 나를 보며 이채롭게 빛나는 것을 보며 나는 기쁘게 웃었다.
나는 그 날 재환에게 아버지를 찾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쪽으로 갈 거라고 얘기했다. 형들은 공장에서 일하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내가 가면 재환은 혼자가 될 터였다.
"빈아, 정말 축하해. 근데 너 그 집 가서 미움 받는 거 아닐지 그게 걱정돼."
이재환은 끝까지 내 걱정 뿐이었다. 내가 집을 나가는 날, 수행원이 건내는 돈을 재환은 절대 받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려 받게 했다.
"누가 돈 주고 형이랑 빠이빠이하겠대? 내가 지금까지 처먹은 게 얼만데, 이 정도는 그냥 받아!"
재환은 내가 이대로 가서 영영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 나는 너를 제대로 잡을려고 지금 떠나는 거야. 아무도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지 못할 위치에 섰을 때, 너를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을 거야. 너는 넘치게 받아야되는 사람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하게 해줄거야. 갖고 싶은 건 뭐든 갖게 해줄거야. 나는 헤어지기 전에 이재환을 품에 꼭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나 저 집에서 독립하면 우리 둘이 살자. 그때까지 좀만 참아줘."
"...약속한 거다?"
"그럼. 내가 빈 말하는 거 봤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이재환을 두고 떠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수행원은 나를 못 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입도 걸고 행동거지도 껄렁껄렁하고. 제대로 된 새끼인가 싶었겠지.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내도록 구른 새끼가 뭔들 못 버티겠는가. 실제로도 난 대궐처럼 넓고 삭막한 아버지의 집에서 아주 태평하게 잘 살았다. 아버지의 아내는 나를 아주 죽이고 싶은 듯했다. 처음 대면했을 때 내 얼굴을 보자마자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어버린 모양이 아주 웃겼다.
"이홍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웃을 때 패이는 보조개의 위치까지 나는 할아버지와 똑같았다. 이 집안의 절대적인 지배자인 할아버지와. 심지어 내 아버지조차 나를 어려워했다.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서 당연히 후계자가 될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닮은 내가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다. 아들이라기보단 라이벌로 느낀 게 분명하다. 나는 그들에게 살갑게 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학교를 나가지 않고 집 안에 처박혀 공부만 했다. 밀린 교과과정은 물론 예절, 식사매너, 시사상식, 예술문화, 국내 기업 간의 세력다툼 등등을 단기 속성으로 머리 속에 처넣었다. 온통 이재환 하나로 가득한 머리 속은 스폰지처럼 새로운 지식을 쭉쭉 빨아들였고 할아버지는 아주 만족했다.
촤악--!
"니까짓 게, 할아버지를 등에 업으니까 뭐라도 된 줄 아니? 웃기지도 않아서."
"씨발! 얼음에 눈 맞았어!"
촤악--!
난 그대로 내 앞에 있던 얼음 물을 나와 피를 나눈 형제에게 뿌렸다. 나에게 물을 뿌린 사람은 내 새어머니였다. 새어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이게 미쳤어? 지금 누구한테...!"
"어머니, 난 어머니는 절대 안 건드릴 거에요. 어차피 나보다 빨리 죽을 사람이잖아. 대신 어머니가 나한테 한 짓은 모조리 당신 아들이 받을 거야. 난 받은 걸 절대 잊지 않아요. 워낙 없이 자란 새끼라."
새어머니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크리스탈 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져 깨트렸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대리석 바닥 위로 산산조각 난 크리스탈 조각들이 퍼졌다.
"이거 치워. 형님께 수건도 갖다 드리고."
자박자박, 그대로 조각들을 밟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집이라 다치지도 않았다. 그냥 위협일 뿐이지.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새어머니가 어떻게 나같은 놈을 다루는 법을 알겠는가. 수행원에게 이 얘기를 전해 들은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나를 칭찬했다.
"아주 마음에 들어. 사내자식이 받은 건 되돌려줄 줄도 알아야지."
새어머니는 외가를 등에 업고 회사를 휘두르려 하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해주며 내가 그를 쏙 빼닮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할아버지에게 나는 그의 분신. 클론. 젊은 날의 영광을 떠올리게 해주고, 새로운 역사를 쓰게 할 장기말. 그래도 상관 없다. 날 자신과 겹쳐 보는 만큼 모두 내 것이 될 테니까.
고등학생이 되었다.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부잣집 자식들만 다니는 규모가 작은 자립형 사립학교였고, 입학 시험이라는 명목으로 집안을 걸러냈다. 보통 있는 집들은 동네를 이뤄서 모여 살고 집안끼리 교류하기 때문에 다들 아는 얼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런 학교에 가장 핫한 뉴페이스로 내가 등장했다.
"쟤 누구야? 뭐하는 집 애래?"
"진짜 잘생겼다..."
나는 성격이 나빴지만 내 얼굴을 쓸 줄 알았다. 잔뜩 까칠하게 굴다가도 마지막에 씨익 웃어주기만 하면 '홍빈이는 좀 짓궂지만 착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학교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친구도 생겼고. 역시 사내새끼들 끼리는 운동으로 친해지는 거지. 나는 축구보다 농구를 더 좋아하지만 반끼리 다같이 하기에 축구만한 게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우리 반에서 축구를 가장 잘 하는 김원식과 알게 되었다.
"이홍빈, 빵 먹어라."
"아오 넌 왜 날 못 처먹여서 안달인데."
김원식은 착했다. 사납게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따뜻한 집에서 잘 자라온 놈인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학교는 부자들이 다니는 곳이니 만큼 부모가 문제가 있는 집과 아닌 집이 극명하게 보였다. 나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뭔가 문제 있는 새끼란 걸 알아차린 놈들도 많을 거다. 하지만 김원식처럼 잘 자란,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사랑 받으며 자란 애는 잘 모른다. 성격이 특이하다 정도로만 생각하겠지. 그래서 원식이 부러웠다. 원식의 집은 대단하진 않았지만 사장님 소리를 듣는 부자집이었고, 원식은 그걸 뻐기지 않는 바른 성격이었다. 나는 이재환을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나같은 새끼가 이재환의 삶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내가 좀 더 나은 놈이라면 이재환은 더 행복할텐데. 이렇게 뒤에서 더러운 생각만 하는 놈이 아니라 김원식같은 좋은 놈이 이재환을 사랑한다면 이재환은 더 행복해질텐데.
-------------------------------------------------------
블로그에 예전에 한 번 올린 적 있는 미완성 조각이에요!
짹에서 ㅊ님이랑 형제애에 관해 수다떨다보니 예전에 써둔 게 생각나서 다시 이어보는 중! 확실히 예전에 쓴 게 분량이 기네요... 반성(._. )
----------------------------------------------------------
학교 안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였다. 날이 추워서 꽃이 생각보다 늦게 폈다. 학교 정문 쪽에 가장 큰 벚나무가 있어 애들은 지나가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하교할 때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맞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 앞에 이재환이 서있을 때는 꿈인 줄로만 알았다. 깨고 싶지 않은 행복한 꿈.
재환은 고개를 들고 팔랑팔랑 춤추듯 떨어져 내리는 벚꽃잎을 꿈꾸듯이 바라봤다. 내려쬐는 옅은 노란색의 햇볕이 재환의 목 언저리와 등에 떨어져 부서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하얗게 빛났다. 벚나무를 올려보는 섬세한 목줄기. 위태로워 보이는 마른 몸. 재환이 천천히 몸을 돌려 내게로 향했다.
"빈아!"
나를 보며 활짝 웃는 얼굴. 나는 그대로 달려서 이재환을 한 품에 끌어 안았다. 계속 연락은 하고 있었다. 재벌가에 어울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 병신, 쓰레기 소리를 들어가며 수업 일정을 소화하는 중에도 이재환의 목소리를 들으면 피로가 녹았다. 혼자 있어서 쓸쓸하진 않아? 형들은 집에 안 온대? 맛있는 거 사먹었어? 한 시간이 넘게 통화를 하고 밤에는 재환이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며 잠들었다. 통화를 하지 못하는 날은 녹음해논 목소리를 들었다. 매일매일을 그랬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너무 좋아. 너도 내가 보고싶어서 이렇게 찾아와줬다는 게 너무 좋아. 눈물이 나올 만큼.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랬어. 빈아, 친구야? 형아한테 소개해줘."
"안녕하세요, 김원식이에요."
"이재환이야. 빈이....랑 친한 형이야."
그래, 이제 우리는 형제로 묶일 수 없는 관계지. 나는 아쉽게 끌어안은 팔을 풀고 이재환의 손을 잡았다. 김원식은 그때 좀 얼떨떨해보였다. 나는 타인과 몸이 닿는 것을 질색했고 스킨십을 좋아하는 김원식은 그걸 섭섭해하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먼저 달려가서 끌어안고 잡은 손을 내내 놓지 않을 정도로 친한 형이 누군지 궁금하겠지. 그래, 그때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 멍해 보이던 얼굴이 사실은 이재환에게 한눈에 반해서 그런 거였단 걸 알았다면 절대로 가만 두지 않았을텐데.
내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이재환에게 같이 살자고 말했다. 드디어 둘이 살 수 있어. 활짝 웃으며 같이 살자고 하는 내게 이재환은 사실은...이라는 말로 운을 떼며 고백했다.
“홍빈아, 말 안 해서 미안해. 형 원식이랑 만나고 있어.”
순간 누가 쇠몽둥이로 내 뒤통수를 후려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뭐? 이재환이 누굴 만나?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재환은 한껏 내 눈치를 보며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숨을 가라앉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그래서, 나랑 같이 안 산다고?"
"아니, 아니야! 그냥 보통은 게이랑 살고 싶어 하진 않을테니까... 너한테 얘기해야 된다고 생각했어."
"난 그런 거 상관없어. 알잖아, 형은 내 가족인데."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서 웃었다. 게이여도 너를 경멸하지 않고 계속 가족으로 지내자는 말에 재환은 눈물을 글썽이며 마주 웃었다. 예쁘다. 사랑스럽다. 그만큼 김원식을 죽이고 싶다. 너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랑 친구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 고등학교 시절을 모조리 뒤엎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랬다면 나는 처음부터 김원식을 잔인하게 괴롭혔을 것이다. 내가 부러워하는 모든 점이 사라지도록 지독하게. 하지만 시작부터 뿌리를 뽑을 수 없었으니 이미 늦은 일이다. 김원식 혼자 이재환을 좋아하는 거면 모를까 서로 좋아하게 됐으니 나는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 풋사랑이 알아서 시들도록 기다릴 수밖에.
"어쩌다 사귀게 된 건데?"
"원식이가 나한테 첫눈에 반했대. 진짜 웃기지 않냐? 내가 너처럼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근데 형은 원래 게이였어?"
"응, 그런 거 같아. 아빠한테 사랑 못 받은 애가 게이가 된다는데 아마 그런 거 아닐까? 근데 난 딱히 엄마 사랑을 받고 자란 것도 아닌데 이상하지?"
이사 간 오피스텔에서 우리는 큰 침대에 같이 누워 밀린 수다를 떨었다. 깊은 밤이고 서로 천장을 바라보고 얘기를 해서 얼굴이 안 보이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얼굴은 야차처럼 일그러져 이재환을 놀라게 했을 게 분명하다.
"사실, 엄마 생각나서 여자는 좀 그래.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날 버릴 것 같거든."
그 말에 나는 재환의 손을 꽉 잡았다. 너도 그랬구나. 너도. 형들의 사랑 받고 잘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너한테도 그 상처는 남았구나.
"나도 그래. 그래서 난 결혼 안 하려고."
"에이, 그건 유전자 낭비다. 그리고 너는 막, 정략 결혼같은 거 하게 되는 거 아니야?"
"내가 하기 싫으면 안 하 는거지."
"그래, 빈이는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지. 멋져, 내 동생."
동그랗게 올라가는 광대. 예쁘게 말리는 입꼬리. 도톰한 입술. 동화 속 이야기처럼, 텅 빈 방을 채울 수 있는 건 꽃향기라는 그 이야기처럼 형체 없는 저 웃음이 내 마음을 채운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저 웃음 하나에. 세상의 그 어떤 비싼 물건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나의 텅 빈 마음이 저 웃음 하나면 가득 차서 넘친다.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난다. 재환아.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가수가 꿈인 재환은 전문대 실용음악과를 다니며 학비와 생활비를 대기 위해 여기저기 보컬 알바를 뛰었다. 내가 쓰라고 카드를 줘도 쓰지 않았다. 형이 굶고 다니면 김원식이 화낼 걸? 그렇다고 걔 카드 받을래? 동생 꺼 받아. 아니면 나도 화 낸다? 얼르고 윽박을 질러 가까스로 식비는 내 카드를 긁었다. 언제 같이 밥을 먹을 때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서 우승하고 싶다고 부끄럽다는 듯이 말을 했다. 나는 할아버지 쪽에 엔터테인먼트쪽 줄이 있는 지부터 찾아봤다. 하지만 재환은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보란 듯이 1차, 2차 전화와 방문 예선에서 합격했다. 이재환이 원하는 건 내가 다 해주고 싶은데 이재환은 내 생각보다 강한 인간이라 가끔은 날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이재환의 모든 재능을 빼앗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혼자가 되어야만 날 원할 거냐고 묻고 싶었다.
"빈아, 나 합격이야!"
그리고 방송 전의 3차 예선까지 보란 듯이 합격. 합격자들에게 주는 티셔츠를 보물처럼 품에 끌어안고 오디션장에서 나오는 이재환을 가장 먼저 안아준 것은 바로 나. 내 옆에서 함께 결과를 기다리던 김원식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내가 김원식이라면 절대 나같은 동생이 옆에 있는 걸 두고 보지 못했을 텐데 김원식은 아무 것도 모른채로 나와 이재환을 함께 끌어안았다. 이래서 김원식이 싫다. 밉고 미운데 너무 부럽다. 나랑 너무 달라서. 이재환이 김원식 옆에 있으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이재환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재환씨? 이덕운씨 자제분 되시죠?"
이재환은 오디션을 포기했다. 이덕운. 이재환의 아버지. 집을 나간 채로 행방이 묘연했던 그는 치매에 걸려 치매단체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끈질기고 쓸데 없는 열정이 가득한 사회복지사는 가족인 이재환을 찾아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재환의 아버지에게 썼던 돈을 모조리 갚아내라고 아주 길고 긴 영수증을 건넸다.
"니가 그걸 왜 갚아!"
"아빠잖아, 빈아. 아빠잖아..."
이재환은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큰 형과 작은 형까지 모여 아버지의 거취를 의논했다. 금전적인 부담은 큰 형과 작은 형이 지고 이재환은 아버지의 수발을 들기로 했다.
"나도 낼 게요."
"빈아."
"나는 이 집 자식 아닌가? 말로만 형제에요?"
자존심을 지키기에는 한 푼이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나는 영수증의 반을 내고 이재환이 아버지와 살 집의 전세금을 부담했다. 어떻게 같이 살게 된 건데... 이가 갈렸다. 아버지는 나와 이재환을 연결해준 고리니까 이번만큼은 봐줘야지 생각했다. 몇 년 있으면 이재환도 지쳐 나가떨어지고 내게 도움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얄팍한 수에는 김원식에 대한 계산도 있었다. 사실 나는 김원식과 이재환 사이를 더 오래도 기다릴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이재환의 아버지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나를 이재환에게로 데려가 준다.
치매 노인을 처음 돌보는 재환은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간병인들도 질색하는 게 남성 치매노인인데 이재환의 아버지는 알콜성 치매로 꽤나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렸으니 더욱 골치가 아팠다. 내가 간병인을 붙여줬지만 간병인이 왔다 가는 시간은 고작 8시간. 나머지 16시간은 모조리 이재환의 몫이었다. 밥을 먹이는 것부터 씻기는 것까지, 젊었을 적에 깡패들을 패고 난봉질을 하며 펄펄 날아다녔던 아버지의 힘은 이재환과 막상막하, 아니 그 이상이었고 차마 아버지를 힘으로 제압하기 어려워하는 아들과는 달리 이성의 제약이 없는 그는 이재환을 마구 다뤘다. 이재환은 하루하루 더 말라갔다.
"홍빈아, 진짜 미치겠다..."
술을 마시며 힘들어하는 원식을 나는 안타까움이란 가면을 쓰고 위로했다. 원식이 아무리 착하고 마음이 넓어도 기본적으로 그는 고생이란 걸 모르고 자란 도련님이다. 재환이 어떻게 자랐는지, 앞에 남아있는 고생이 얼만큼인지 원식은 가늠도 하지 못하겠지. 재환은 내가 간병인을 붙인 8시간 중 5시간을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에 썼다. 나머지 3시간동안 과연 김원식을 만날 수 있었을까? 치매노인이 난장판을 만들어논 집을 치우고 밥을 하기 위해 장을 보기도 빠듯한 그 시간동안? 원식은 사람 좋은 얼굴로 재환을 응원했지만 착실히 지쳐가고 있었다.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말이 뭔지 몰랐는데... 이런 고민을 너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내가 이런 얘길 어디다가 해."
"그래, 알아."
"나 형이랑 거의 한 달동안 못 봤어. 머리론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론 그게 잘 안 돼. 그냥 요양원에 보내면 되는 거잖아. 자길 버리고 갔던 아버지인데... 왜 굳이 직접 돌보려고 하는 거야?"
원식은 술잔을 연거푸 비워내며 울었다. 평소보다 더 아래로 처진 눈꼬리가 서럽게 보였다. 서러울만도 하지. 제대로 사랑해보지도 못하고 이재환을 빼앗겨버렸으니 그 원통함이 얼마나 클까. 그렇지만 너는 내가 얼마나 원통했을지, 지금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없겠지.
나는 원식을 부축해 원식의 차에 태우고 대리기사를 불러 보냈다. 원식아, 김원식. 그러니까 너는 안 되는 거야. 너는 이재환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이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내 차 안에 타서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대리기사가 좋은 일이 있는가 보다고 말을 붙였다가 기가 질려서 입을 다물 정도로 몇 분이나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며칠 뒤에 김원식으로부터 이재환과 헤어졌다는 연락을 받았고 나는 그때부터 멈춰놓았던 시계태엽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빈아, 니가 나대신 형을 잘 챙겨줘.
원식의 문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니가 나대신이었을 뿐이야, 병신아.
그리고 나는 일부러 재환을 방치했다. 김원식의 일로 깨달았다. 이재환은 내게 좀 매달릴 필요가 있다. 지금 니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아야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이재환과의 전화를 빨리 끊었고 일부러 술자리의 시끄러운 소음을 들려주었다. 나를 부르는 여자애들의 간드러지는 목소리. 이재환은 끝없이 아래로 아래로 침잠했겠지. 애인에게 차이고 입 다무는 것조차 잊어버려 침냄새가 잔뜩 나는 아버지를 돌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랜만에 이재환이 좋아하는 초코 케익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당근과 채찍이라기엔 이주도 채 되지도 않았지만 내가 이재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오래 안 본 건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이니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사실 매일 보고싶다. 사실 매일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참을 수 밖에. 너를 완전히 갖기 위해 나는 참고 또 참는 수 밖에 없다.
"형!"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나서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재환과 아버지가 사는 집은 방 두개에 작은 거실이 있는 아담한 집이다. 일부러 거실 베란다를 통해 햇살이 잘 들어오는 집을 골랐다. 간병을 하며 우울해하지 않도록. 재환은 기뻐하며 베란다에 꽃화분을 갖다 놓겠다고 신나했었다. 그런데 그 거실이 온통 냄새 나는 똥으로 가득했다. 널려있는 이미 사용한 성인용 기저귀들과 그 기저귀들로 사방을 문댔는지 벽과 온갖 물건들에 지금 방금 싼 듯한 물이 줄줄 흐르는 더러운 똥으로 똥칠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꼭 나아질 거야!"
이재환이 희망을 가득 담아 말하며 거실 벽에 걸어놨던 아주 어릴 때 찍은 행복한 가족사진에도.
"형! 형 어딨어!"
아버지 방의 문을 열자 아버지는 그런 일 따윈 하지 않았다는 듯이 아주 곤히 자고 있었다. 아들 인생을 빨아 먹고 사는 노인내. 그 아이같고 천진한 얼굴이 침을 뱉고 주먹을 갈기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방에 락스냄새가 진동하는 걸 보니 이미 이 곳은 재환이 청소를 한 뒤인 것 같았다. 재환의 방을 열자 이 곳에도 재환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지. 못 참고 쉬러 나갔나. 생각하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재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손에는 더러운 갈색 걸레를 쥔 채로.
"형! 형 일어나 봐."
재환을 일으키는데 온 몸이 불덩이다. 내가 바쁜 척을 하고 찾아오지 않은 동안 몸이 무리를 해서 아팠던 걸까. 내 계획에 이재환이 아픈 건 없었기 때문에 당황한 나는 당장 이재환을 들쳐업고 달렸다. 응급실 의사들은 집을 청소하느라 똥냄새가 밴 이재환을 꺼려했고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원장을 불러낼 기세로 의사들을 닦달했다. 그리고 큰 형과 작은 형을 불러냈다.
"더 이상은 안 돼. 아버지 요양원에 보내자."
"......"
"집에 가봐.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해놨는지 알아?"
"일단 재환이가 일어나면..."
"아버지가 온 벽에 똥을 발라놨다고! 이재환이 왜 지금 냄새가 나는데! 내가 돈 낼테니까 요양원에 맡기자고!"
나는 씩씩거리며 패악을 부렸다. 이재환을 갖고 싶다. 사실 이재환을 갖는 가장 빠른 방법은 형들을 부르지 않고 이재환이 깨어나면 다시 그 더러운 집에 처박아 치매 걸린 아버지만을 돌보며 살도록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몇 명 없는 친구들은 모두 사라지겠지. 사랑하는 형들도 점점 원망하게 되겠지. 나만을 의지하도록 적절한 때에 조금 모자라듯 미끼를 던지면 이재환은 점점 더 나를 필요로 하고 원하게 될 것이다.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걸, 나는 안다.
"빈아... 형 괜찮아. 조금만 더 내 손으로 돌봐드리고 싶어..."
"형 제발... 내가 못 보겠어서 그래. 제발 요양원에 보내자. 거긴 의사 선생님도 있고 전문가들이니까 형이 돌보는 것보다 나아. 응?"
"형 손 더러워. 잡지 마."
"싫어, 잡을 거야."
더러워진 손도 이재환의 손. 나는 이재환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빌었다. 그럼 일주일에 며칠만 맡기는 식으로 하자. 지금처럼 매일 돌보면 형 진짜 큰 일 나. 재환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들은 이재환의 결정에 안도하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정 힘들면 요양원에 보내자고 말하고 다시 일을 하러 떠났다. 형들이 나가고 나서야 이재환은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빈아, 나 힘들어..."
"미안해. 내가 너무 바빴어."
아이처럼 우는 재환을 끌어안아 토닥이는데 재환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원식이... 식이가 헤어지자고 했어... 나 어떡해?"
아아.
나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쓰러진 널 보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너는 그런 내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버림 받았다고 우는 구나. 온 몸의 뼈에서 바람이 빠져나간 듯 나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이번만큼은 거짓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빈아? 자신을 위로해주지 않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재환을 보며 나는 화를 냈다.
"형이 슬픈 건 이해하는데... 그걸 꼭 지금 말해야 돼? 내가 형 쓰러진 거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는 신경도 안 써?"
"빈아... 미안해, 형이 지금 일어나니까 정신이 없어서..."
"정신이 없긴. 큰 형이랑 작은 형 앞에선 아버지 요양원 보내지 말자고 잘만 하던데? 형 되게 머리 회전 빠르다."
"미안해. 너 마음 상하게 하려고 그런게 아니었어."
이재환은 당황해서 흘리던 눈물조차 멈추고 내 화를 풀려고 했다. 놀랄만도 하지. 나는 이재환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 언제나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운 유리인형을 대하는 마음으로 이재환을 대했다. 너무 소중하고 소중해서 잘 만지지도 못한 내 이재환. 이재환은 쩔쩔매며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움직일 때마다 손등에 매달린 링거줄이 흔들렸다.
"형이 잘못했어. 울지마 빈아."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는지 재환이 휴지를 뽑아 내 얼굴을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금세 눈물이 흘러 턱으로 고여 뚝뚝뚝 떨어졌다. 나는 내 얼굴을 조심히 눌러 닦는 이재환의 손길을 느끼다가 억지로 눈물을 멈췄다. 그러지 않으면 온종일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대강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말했다.
"...죽 사올테니까 좀 자고 있어.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괜찮은데. 나가지 말고 있어."
"금방 올테니까 눈 붙이고 있어. 냄새 나는 거 찝찝하면 저기 샤워실에서 좀 씻던지."
지갑과 핸드폰을 들고 병실을 나왔다. 나는 내게 붙여진 수행원에게 전화를 해서 아버지와 집을 수습하도록 한 후에 내 핸드폰 속 주소록을 훑었다. 김원식. 내 친구이기 전에, 내가 사랑하는 이재환이... 사랑하는 남자. 나는 눈을 감으며 그 이름을 눌렀다.
차를 타고 이재환이 다니던 고등학교로 갔다. 학교 안의 나무들은 모두 겨울을 나기 위해 이파리들을 내던지고 알몸으로 서있다. 이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3월이면 눈처럼 하얀 꽃봉우리들을 터트리고 그 안에 숨기고 있던 가장 아름답고 부드러운 분홍색 봄을 자랑하곤 했다. 중학교가 마치면 이재환을 데리러 이 곳에 자주 왔었다. 교문 안쪽의 커다란 벚나무 앞. 그마저도 친아버지를 만나고 나서는 할 수 없었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이재환을 기다리고 이재환은 그런 나를 위해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오는 그때로.
"빈아! 많이 기다렸어?"
"아냐. 집에 갔다가 방금 왔어."
교실에서부터 뛰어오느라 학학 숨을 몰아쉬는 이재환의 두 뺨도 벚꽃을 닮아 분홍빛이었다. 예뻤다. 사랑스러웠다. 내 손으로 만지면 하얗고 예쁜 그 모습이 더러워질까봐 재환의 머리에 붙은 작은 꽃잎조차 떼내지 못했다.
차에서 내려서 교정을 걸었다. 그러다 재환을 기다리곤 했던 그 커다란 벚나무 아래 앉아 기다린다. 이재환이 내게 와주기를. 다시 한 번 내게 뛰어와서 많이 기다렸냐고 물어봐 주기를. 하지만 현실은 내 소망과는 다르다. 지금쯤 내 연락을 받은 김원식이 이재환의 곁으로 달려가 그 마르고 앙상한 몸을 부둥켜 안고 울고 있겠지. 김원식 품에 안겨 이재환은 원망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겠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사라진다. 사라져 버리면 좋을텐데.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이재환을 가질 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럴 수가 없다. 이재환이 울면 내 세상이 우니까. 이재환이 아프면 나는 숨도 쉴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이재환에게 그가 가장 원하는 김원식을 가져다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평생을 이재환 곁을 맴돌며 이재환이 나를 선택해주기를, 나를 가장 사랑해주기를 바라겠지. 지금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일도 몇 번을 반복하고 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랑 없는 세계에서 오로지 이재환만이 나를 사랑해줬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내게 사랑은 세상보다 컸다. 삶보다 컸다. 보잘 것 없는 나 자신보다 컸다. 나는 이재환이 말해주는 사랑해를 듣기 위해서 세상도, 나도 버릴 수 있었다. 이재환은 내 전부, 내 우주, 내 신, 나의 절대자.
"사랑해. 사랑해 재환아."
그러니까 너도 날 사랑해줘.
------------------------------------------------------
홍켄랍이라고 써야하나 고민했지만 홍켄입니다! 완벽한 홍켄!
ㅠㅠ화내시면 안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