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켄/조각] 말로는 부족한 말
삑삑삑삑
삐이이이익-
“....또 틀렸다.”
두 번째로 비밀번호가 틀렸다. 세 번 틀리면 알림음이 엄청 크게 나지 않나? 그 알림음도 비밀번호를 알아야 멈추게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냥 문 앞에 주저앉았다.
“언제 오려나...”
헤어진 지도 어느덧 삼 주째. 나는 매일 빈이를 기다리고 있다.
<b>[홍켄] 말로는 부족한 말</b>
저 멀리서부터 계단을 올라오는 신발소리가 들린다. 빈이는 발이 작아서 발소리가 다른 남자들에 비해 길지 않다. 발소리만 들어도 걷는 모습까지 떠오르는 걸 보니 우리가 참 오래 만났었구나 싶어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왔는데 문 앞에 앉아있는 거 보면 놀랄 테니까 얼른 일어나야지. 양 손으로 차가운 바닥을 누르며 힘을 줘서 일어나려는데 오랫동안 쭈그리고 있던 탓인지 무릎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어어? 잠깐만, 얼른 일어나야...
“...하아.”
작은 한숨. 어느새 계단을 다 올라온 빈이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오지 말랬지.”
“빈아...”
“헤어지자고 했잖아.”
“난 헤어지기 싫어.”
“그런다고 우리가 계속 만날 수는 없어.”
“우리 얘기라도-”
쾅. 빈이는 그대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밖에 내버려두고. 안 울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는데 그런 거 다 잊어버리고 울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집까지 찾아와 문 앞에서 우는 전 애인이라니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어서 꾹 참고 빈이가 올라왔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후두둑, 비가 들이쳐 계단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번 장마는 한반도 상공에서 수시로 남하 또는 북상하는 제트기류로 인해 14일까지 전국에 비를 뿌린 뒤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17일부터 다시 내륙지방에 비를 내리는 등 매우 불규칙한 양상으로 나타날 전망으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을 열어놓은 집에서 뉴스를 틀어놨는지 장마소식이 들린다. 지금 내리는 비가 장마구나. 이제 계속 내릴 거구나. 그렇다면 피해봐야 피해지지도 않겠지. 나는 그냥 맨 몸으로 쏟아지는 장대비 속으로 걸어갔다. 걸을수록 점점 빗줄기가 강해져서 나는 꼭 비에 얻어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왔다. 걸을 때마다 질퍽거리는 신발. 속옷까지 푹 젖어버린 옷. 물에 젖어서 기껏 빈이 본다고 열심히 세팅했던 머리가 다 망가졌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새카만 아스팔트 위로 빗물이 강을 찾아 흐른다. 나는 어디로 흘러야하지.
“우산이 없으면 빌려달라고 하던가!”
그때 화난 목소리와 함께 센 힘으로 팔이 끌어당겨졌다. 놀라서 뛰어왔는지 빈이도 다 젖었다. 오피스텔에서 여기까지 꽤 멀 텐데 우산도 없이 뛰어왔나? 놀라서 눈을 깜빡이자 빈이는 내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에 길에서 나뒹구는 우산을 주웠다. 내게로 오다가 성질을 못 이기고 던져버린 듯했다.
“씻어. 추우면 물 받아서 좀 담그고 있던가.”
“빈이 너 먼저 씻어.”
“됐어, 추위도 잘 타면서 누가 누굴 걱정해. 들어가.”
밖에서 기다릴 빈이 때문에 샤워는 평소보다도 짧았다. 그냥 찬 기운만 가신 후 나오자 보일러를 틀었는지 집 안이 뜨끈뜨끈했다. 이거 마시고 있어. 손에 유자차가 든 머그잔을 쥐어주고 욕실로 들어간다. 소파에 앉아서 나는 살짝 웃었다. 입고 있는 옷은 빈이 집에 두고 간 내 옷이다. 욕실에는 내 칫솔도 아직 남아있었다. 빈아, 우리가 너무 오래 만나서 그랬을까?
“...머리도 안 말리고 뭐했어?”
빈이는 마른 수건을 하나 꺼내서 내 젖은 머리를 말려주었다. 나는 손을 뻗어 빈이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샤워코롱 냄새. 익숙한 체온.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내 젖은 머리카락 때문에 옷이 젖어도 빈이는 그런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상냥한 나의 빈이. 우리가 헤어지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너는 화 한번 내지 않았지.
-헤어지자.
-뭐? 빈아, 영화 잘 보고 나와서 무슨 소리야?
-나 이제 너 못 버텨.
-...잠깐만 너 지금 진심이야?
너의 뜬금없는 말에 놀라면서도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해하는 나를 너는 어떤 기분으로 보았을까. 빈이는 우는 나를 조심스럽게 마주 안았다.
“...이재환. 진짜 나한테 이런 말 하게 할 거야?”
-니가 언제 말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내가 못 참겠다, 힘들어서.
“마음 떠난 사람이 나야? 너잖아.”
-너 나 사랑해? 아니잖아.
“그런데 왜 자꾸 찾아와. 나 힘들게...”
-이제 나 사랑하지 않잖아.
“나는 아직 너를...”
결국 빈이도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빈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언제나 나를 안아주었던 단단한 몸이 앙상하게 말라서 떨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내 이기심으로 너를 이렇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빈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해야 하는 말이 있어.
“미안해, 빈아. 나는, 나는 내가 평생 너만 사랑할 줄 알았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만 사랑하고 싶었어.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내가 무서웠어. 그래서 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너한테 용서 받고 싶었어.
“울지마 바보야. 니 잘못이 아니야.”
빈이는 울면서도 웃으며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에 잠긴 까만 눈은 내게 많은 말을 건넸다. 미움, 용서, 원망, 그리고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사랑. 나는 넓은 품에 안겨서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울었다. 그래서 빈이는 얼마 울지 못했다. 끝까지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지...
그 뒤로 빈이는 사라졌다. 오랜 시간 만나며 아는 사람이 대부분 겹치게 된 우리라서일까. 빈이는 내게 모든 걸 남겨주고 마치 자기만 없으면 된다는 듯이 가버렸다. 학교도 휴학하고 아무에게서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일부러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수업이 약간 일찍 끝나 다른 건물로 이동하다가 벤치에 털썩 앉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틀었다. 한 쪽이 나오지 않았다. 이 이어폰 고장 났구나. 새로 사야겠다. 노래를 듣는 중에 문득 무릎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불규칙적인 장마가 다시 시작되려나보다. 그렇다면 내가 울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겠지. 한 쪽만 고장이 나도 버려지는 이어폰이지만 멀쩡한 나머지 한 쪽으로는 음악이 너무 잘 들렸다. 빈이는 같이 있을 때도, 사라진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사랑해. 너를 사랑해. 지독한 장마가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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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너만 사랑할 줄 알았다고 말하면서 우는 이기적인 재환이가 보고싶었습니당 빈아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