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켄엔]A World without Narcotics 01~08(미완)
01.
"늦었습니다."
밖에서 대기하는 여직원이 일행분이 오셨다고 미처 말하기도 전에 드르륵, 문이 열리며 택운이 들어왔다. 학연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성큼성큼 걸어와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모습에 홍빈은 약간 짜증이 치밀었다. 학연에게만 사과를 해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약속시간에 늦는다는 게 짜증이 치밀었을 뿐이다. 홍빈은 정해진 것을 지키지 않으면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남자다.
굳어진 표정을 내색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턱에 힘을 빼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차곡차곡 곱게 접혀 정리된 냅킨을 한장 뽑았다. 가만히 입술 주변을 닦지만 묻어나오는 것은 없다.
"더 먹어. 일부러 이 실장 좋아하는 한정식집으로 왔는데."
"...예."
홍빈은 억지로 수저를 들었다. 고급 한정식집은 양에서부터 자신이 고급임을 주장하고 싶었는지 밥 한 공기가 150g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양이 적었으나 홍빈은 그나마도 채 반을 비우지 못한 상태였다. 홍빈은 동치미 한 조각을 집어서 입에 가져갔다. 아삭한 식감은 나쁘지 않았다. 삼키고 나서 입 안에 약간 남는 배맛이 달았다.
학연은 웃으며 별스럽지 않은 일들을 재밌게 포장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택운은 무심한 듯 적당한 추임새를 넣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1시간이 넘는 동안 홍빈이 먹은 것은 그 동치미 한 조각이 다였다.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응, 수고했어."
택운은 학연이 탄 쪽에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뒤로 물러났다. 홍빈에게는 작게 눈인사를 했고 홍빈도 고개를 까딱 흔들어 답했다. 홍빈은 차를 직접 모는 것을 좋아했다. 학연이 너정도 되는 애가 왜 차를 직접 모느냐고 핀잔을 주어도 그냥 그게 편하다고 했다. 세상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데 목적지로 가는 길이나 방법 정도는 제멋대로 해도 되지 않나 싶었다.
학연의 집으로 차를 모는데 학연이 불쑥 말했다.
"정 실장이랑 좀 친하게 지내. 낯 가리는 건 알아도 명색이 내 오른팔이란 녀석이 왼팔과 서먹하면 쓰냐."
"......"
"대답 안 하지? 내가 이홍빈한테 아주 잡혀산다, 잡혀 살아."
"노력할게요."
"그래, 빈아. 정 실장이 좀 무섭게 생겼어도 괜찮더라. 설마 너보다 나이 많아서 그러는 건 아니지?"
학연의 농담에 홍빈은 피식 웃으며 핸들을 돌려 지하주차장으로 매끄럽게 차를 몰았다.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그래. 빈이 너도 잘 들어가고."
홍빈은 아까 택운과 셋이 있을 때와는 다른 얼굴을 했다. 딱딱하게 굳은 무기질적인 얼굴이 아니라 약간 풀어진, 부드러운 얼굴을. 조직의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홍빈은 전회장님이 살아계실 때 데려온 아이로, 학연과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라는 것을. 홍빈에게 허물없이 대하는 학연의 태도에 조직원들은 학연과 홍빈을 형제같은 관계로 생각했지만 홍빈의 학연을 대하는 태도는 형제라기보단 아버지에 더 가까웠다. 존경하고 사랑하며 때로는 투정도 부리지만 절대 거역할 줄은 모르는. 그렇게 15년을 학연의 옆을 지켰다.
*
정택운. 소위 정 실장이라 불리는 남자를 홍빈은 경계했다. 끄트머리가 치솟은 가느다란 눈을 제하더라도 굵은 목과 떡 벌어진 어깨, 두꺼운 허벅지의 산만한 체격은 위협적이 아닐 수가 없다. 홍빈은 택운이 칼을 잡을 때 어떤 얼굴을 하는 지를 기억했다. 학연을 향해 공 들여 날카롭게 벼린 사시미를 휘두른 때에서 3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택운을 믿을 수는 없었다.
"항복하고 내 사람이 되기로 했으니 믿어야지. 별 수 있어?"
정택운이 일개 조직원에서 실장직을 맡게된 날 홍빈이 학연에게 들은 말이었다.
"우리 빈이 질투하는 거야?"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학연의 말에도 홍빈은 이를 앙다물었다. 질투는 아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하는 학연에겐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학연이 언제까지 실장이 하나인 조직의 '사장'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위험한 인물인 정택운을 실장에 올리다니. 학연은 홍빈과 택운의 불화가 공공연해지기 전에 셋이 정기적으로 식사를 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홍빈과 택운의 사이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 수록 학연과 택운만 사이가 더 돈독해지는 것 같아 홍빈은 마음이 불편했다. 저렇게 쉽게 믿다가 큰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
"그러게 쉽게 찍지 왜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고 그래?"
홍빈의 말은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남자는 그저 엉엉 울며 바닥에서 벌레처럼 몸부림쳤다. 홍빈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망치가 내미는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았다. 블랙 계열의 체크무늬 손수건은 금세 벌건 피로 물든다. 물론 홍빈의 피는 아니었다. 홍빈은 손수건을 접어 깨끗한 면으로 얼굴에 점점이 튄 핏자국들을 문지른 후 벌거벗은 채로 쓰러진 여자의 몸 위로 던졌다. 더러운 창고 바닥에서 윤간을 당한 터라 알몸은 몇 번을 접어도 깨끗한 곳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마누라가 눈 앞에서 돌려 먹혀도 도장을 안 찍더니, 지 손가락 좀 뭉갰다고 바로 찍는 꼬라지가..."
망치는 홍빈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게 혀를 차며 아래 녀석의 옷을 빼앗아 여자의 몸을 덮어주었다. 손수건을 던진 홍빈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잘 정리하고 데려다줘라. 며칠 감시하는 거 잊지 말고."
"네! 들어가십시오!"
아까보다 티 나게 얼굴이 번들해진 부하들이 홍빈을 배웅했다. 물 좀 뺐다고 저렇게 신이 날까. 아연해진 홍빈의 얼굴에 망치가 넉살 좋게 웃어보인다.
"원래 남의 마누라 따먹는 것만큼 신나는 게 없죠. 양아치들이라 그럽니다."
망치는 울퉁불퉁한 얼굴과는 다르게 순하게 웃을 줄 알았다. 살펴가십쇼- 꾸벅거리며 인사하는 망치에게 대답 없이 어깨를 툭툭 쳐주고 차에 탔다. 망치는 신이 나서 홍빈의 차가 보이지않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홍빈은 조직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 나오는 인물들보다 홍빈의 얼굴이 더욱 근사했다. 홍빈은 고등학교 졸업장도 가지고 있었고 쉽게 상스러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압감이 있었다. 더러운 일에도 서슴지않고 손을 담갔지만 그 모든 것들은 보스, 차학연을 위해서였다. 어릴 때부터 이어져온 끈끈한 우정과 충성. 오물투성이의 이 바닥은 약간의 낭만에도 쉽사리 열광했다. 물론 그 낭만조차 쉽게 오물처럼 더러워진다.
*
오늘도 셋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학연은 평소처럼 수다를 늘어놓다가 피식 웃었다.
"이 실장은 진짜 눈치가 없다니까."
"네?"
"말을 그대로 듣지 말고 그 안의 속 뜻을 생각하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오른 팔로 턱을 괴고 우습다는 듯이 웃는 학연의 말 뜻을 홍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웃는 표정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데 자신이 뭘 놓쳤나 자연스럽게 몸이 긴장한다. 스테이크를 썰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학연은 피클을 아작아작 씹어먹으며 물었다.
"이 실장은 여자 없지?"
"...네."
"하긴 그 얼굴이면 어지간한 선수들도 눈에 안 들어오겠지마는. 연애도 중요하다?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
택운이 유리잔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일부러 보라고 제대로 가리지 않은 걸 알 수 있었다. 홍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굳이 이런 말을 저 새끼 앞에서 해야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입술을 씹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적지 않은 여자를 안아봤지만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길게 만나지 않았다. 물론 온몸으로 달겨드는 여자들은 많았다. 이유는 다양했다. 홍빈은 그들이 일하는 가게를 관리하는 조직의 실장이었고, 키가 컸고 돈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잘생겼다. 하지만 홍빈이 그들에게 끌릴 이유는 없었다. 단 하나도. 그들의 어느 것 하나도 홍빈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칼자국을 가린 아름다운 얼굴, 푸르고 붉은 상처들을 두터운 화장으로 가린 창백하고 부드러운 몸. 누구에게나 있는 우스울정도로 슬픈 사연들. 물론 요새는 그냥 쉽게 돈을 벌고 싶어서 오는 년들도 많았다. 그저 길을 잘못든 년들도. 하지만 동정은 가지 않았다. 이 동네에서 사연 없는 년놈들을 찾는 게 더 빠르지.
찌푸린 홍빈의 얼굴을 보고 택운이 입을 열었다.
"...그냥 자랑하고 싶으신 거야. 애인 있다고."
"에이 정 실장,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 쓰나!"
학연은 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택운을 밉지 않게 노려봤다. 아. 홍빈은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학연이 지난 번 애인과 헤어진지 두 달쯤 됐으니 이쯤이면 생길 만한 시기였다. 이런 쪽으로는 정말 눈치가 없다. 애써 민망함을 감추려 잘라놓은 스테이크를 입에 쑤셔넣으며 홍빈은 약간 붉어진 학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홍빈은 그저 학연이 신기했다.
*
오늘 운전대는 택운이 잡았다. 택운은 익숙하게 용산 일대로 차를 몰았다. 홍빈은 룸미러로 택운의 얼굴을 살피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래서 학연과 택운이 부쩍 가까워진 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학연은 저를 상대로 연애 얘기를 하질 않으니 말이다. 몇번 하다가 얘기해봤자 영 대꾸도 못하고 재미도 없으니 그만둔 것이지만. 확실히 동갑인 것도 있으려나. 홍빈은 괜한 짜증스러움에 인상을 찌푸렸다.
도착한 곳은 간판도 없는 지하 불법 클럽이었다. 익숙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학연과 택운의 뒤를 따라가며 홍빈은 이 곳이 택운이 관리하는 곳 중 하나란 걸 알았다. 3층짜리 건물의 지하는 클럽. 위는 선수들의 경기장과 숙소있을 터였다. 문앞을 지키던 떡대들이 얼굴을 알아보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두꺼운 문 틈으로 시끄러운 음악이 새어 나온다. 문을 열자 클럽 안은 어두운 조명으로도 담배 연기가 구름처럼 자욱한 것이 보였다. 가운데 돌출 스테이지가 있는 것을 보니 쇼도 하는 것 같다. 안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저 멀리서 급하게 클럽 매니저가 달려나와 계단 위의 2층 룸으로 안내를 한다. 룸으로 가는 도중 절대로 모를 수 없는 코를 찌르는 잡초 냄새도 간간이 나고, 연령대도 마냥 어리기보단 알 거 다 아는 새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딱딱한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학연이 좋아하는 양주와 안주들이 나온다. 얼마나 많이 오면 이러나 싶어서 학연을 보자 학연이 눈을 피하며 헛기침을 한다.
"그런 게 아니라 여기서 일해서 그래."
"...이전 애들이랑 좀 다른 타입인가 봐요."
학연은 업소 애들을 잘 만나지 않았다. 만나더라도 갓 들어온 깨끗한 신입이라던가 선수 특유의 싼 티가 나지 않는 제일 비싼 애들만 골라 만났다. 학연의 취향이었다. 지난 번 애인은 음대생이랬나. 오피스텔 해주고 첼로 바꿔주고 한 시간에 백 만원이 좀 안 되는 레슨비도 내줘가며 만났다. 상투적인 이상형. 하얀 얼굴에 긴 생머리, 단정한 차림. 현모양처의 전형같은 여자들. 하지만 그런 애들 중에 정말 현모양처 감은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 듯이 돈을 써대는 학연을 보며 우리와 연결되는 애들 중에 진짜 그런 애들이 있기야 하겠냐고 홍빈은 속으로 혀를 찼었다. 그냥 포주 없는 비싼 년이지. 한 번 자는데 몇 백이 드는. 학연도 그걸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간도 쓸개도 다 내줄 것처럼 다정하게 굴다가 버리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몇 년 전엔가, 일반인이었던 학연의 애인이 선수가 된 걸 본 적이 있다.
"내가 애를 망쳐놨나봐. 그냥 만날 때는 잘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였는데."
학연과 사귀며 금전감각이 망가지고 사치가 심해져서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을 팔게되었다는 여자의 읍소에 홍빈은 학연의 애인이었던 과거를 생각해서 이름에 달린 마이낑을 까주었으나 몇 달 되지 않아 다시 굴러 들어온 것을 보고 손을 털었다. 마담년한테 스폰 들어오는 거 적당히 잡아서 보내라고 해서 일 년 후에 나가기는 했는데 그 스폰과 아직도 잘 지내는지는 모를 일이다. 지금은 어느 오피에서 가랑이로 돈을 벌고 있을지도.
학연은 홍빈의 물음에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선수는 아니고. 피아노 치는 애야."
피아노? 여기서? 그때 룸 밖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쇼가 시작되었다.
*
쇼의 시작은 고전적이었다. 두꺼운 깃털 드레스를 입고 늘씬한 다리를 위로 거침없이 들어올리는 캉캉. 이런 곳에서 춤을 추는 여자들은 러시아 년들이 많은데 요새는 하도 여러나라에서 많이 와서 깜년도 보였다. 팬티도 입지 않고 음모와 조개가 그대로 보이도록 다리를 활짝활짝 벌려대는 여자들은 땀이 나도록 몸을 거세게 흔들어댔다. 상의를 벗은 남자 댄서들이 나와 여자들의 목에 개목걸이를 걸고 돌출무대로 나와 치마를 들어올렸다. 무대 부근은 어느새 테이블과 의자가 세팅되어 있었다. 비싼 값을 지불한 사람들만 저기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여자 몇은 무대를 내려와서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신나게 궁둥이를 흔들다가 팁을 찔러주는 남자의 얼굴에 그대로 앉아서 조개를 비비기도 하고 가슴으로 뻗는 손길에 명함을 주기도 하며 2차를 유도했다. 외국인 댄서팀은 일정한 가게에 속하지 않고 공연을 따라 움직이고 중개비도 많이 떼여서 운동량에 비해 받는 돈이 적었다. 오프닝만 뛰어주고 가니까 시간도 애매하고. 2차 따느라 하도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아서 나중엔 댄서들이 목줄을 심하게 당겨서 무대 위로 올라가 캉캉 춤을 마무리하고 들어갔다.
그 다음부터가 진짜다. 아무리 외국 조개들을 좋아한다고 해도 한국 남자들은 친숙한 한국 조개들과 자고싶어한다. 몸매가 얄쌍하기보단 약간은 푸짐해야 춤출 때 볼 맛이 난다. 그래야 쑤실 때도 살맛이 좋고. 스팽글 장식이 천박하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여자들이 스테이지를 채우고 본격적인 스트립쇼가 시작된다. 여자들은 발목조차 보이지 않는 드레스들을 음악에 맞춰 천천히 찢어낸다. 그 안에는 더 작은 드레스가, 옷이, 속옷이 겹겹이 있다. 그 사이 테이블이 더 많이 깔리고 사람들은 앞 다투어 돈을 지불한다. 테이블은 비행기의 특등석과도 같다. 사실은 모두가 맛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굳이 차별화를 함으로써 돈을 더 받는 것이다. 여자들은 겨우 가랑이 틈만 가리는 작은 팬티를 입고 테이블을 돌며 다리를 벌렸다. 싼 테이블은 크기가 작아서 다리조차 벌리기 여의치 않아 가슴을 만지는 게 다겠지. 전 공연부터 입에 침이 잔뜩 고인 수컷들은 게걸스럽게 여자들의 다리사이를 핥는다.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가고 손가락이 가랑이로 들어가기도 한다. 손가락보다는 돈을 넣어주는 걸 더 좋아하지만.
그리고 더 이상 스테이지에 남은 여자들이 없을 때 맑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홍빈은 흥미 없는 눈으로 1층의 광경을 보다가 이질적인 피아노 소리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기야. 보여?"
학연은 웃으며 잔을 돌렸다. 빙산처럼 커다란 얼음이 잘그락 거리며 잔에 부딪쳤다. 금빛 술이 파도치듯 출렁인다. 홍빈은 천천히 학연의 턱이 가르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스테이지의 뒤편에 소품처럼 놓여있던 피아노의 뚜껑이 비스듬히 열려있고 그 앞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한 명.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영화나 만화의 법칙처럼 쇼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여자는 그 가게에서 제일 비싼 여자라는 뜻이다.
남자의 손이 가볍게 건반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번쩍! 번개처럼 소리를 터트렸다.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한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스테이지로 모였다가 자연스럽게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얼굴로 옮겨갔다. 하지만 홍빈의 시선은 남자에게 계속 머물렀다.
"어때 이 실장, 이번엔 괜찮게 고른 것 같지?"
홍빈은 학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학연이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놀라기보다 그 남자의 이름이 궁금했던 것부터가 홍빈의 잘못이었다.
02.
가사가 없는 음악에는 쥐약인 홍빈이었지만 남자가 치는 곡들은 어딘가 익숙했다. 티비 광고 속에 나오는 음악인 것 같기도 했고 언젠가 소음을 만들기 위해 대중없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들은 적 있는 팝송 같기도 했다. 하지만 완전히 같은 곡은 아니었다. 음을 늘어트리고 끈적한 박자를 탔다. 그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가느다란 팔 다리를 흔들며 옷을 벗는 여자는 평범한 술집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를 한 쪽 어깨로 쓸어 넘기며 마지막 남은 슬립을 벗자 하얀 나신이 드러난다. 저 년의 원래 가격이 얼마이던간에 오늘은 그 두배를 줘도 자기 어려울 거라고, 홍빈은 짐작했다. 여자에게 주던 시선을 거두고 홍빈은 흑건과 백건을 두드리는 남자의 뭉툭한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름은 이재환. 이 실장보다 형이야. 물론 형이라고 부르라는 건 아니고."
"...소개시켜주시게요?"
"응. 이제 곧 올라올 거야."
홍빈은 학연의 잔이 빈 걸 확인하고 양주를 따랐다. 학연은 신이 난 듯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언제나처럼.
"이 실장. 우리는 부수는 사람들이잖아. 뭔가를 망가트리고 빼앗는 직업이지. 난 내가 이 일을 한다는 걸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지만 말야,"
꿀꺽꿀꺽, 긴 목의 울대가 흔들리며 잔이 비어간다.
"그래도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나랑 다르니까."
학연은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홍빈과 택운이 급하게 같이 일어서자 됐다고 손을 휘휘 저었다.
"갑자기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면 놀랄 거 아냐. 내가 데려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학연은 열린 문으로 걸어나갔다. 자켓을 벗어놓은 탓에 셔츠 위로 마른 등이 드러났다. 어떻게 보면 왜소하게 보일 수도 있는 체격이다. 마르고 가늘다. 하지만 학연은 자신에 대한 그런 평을 비웃 듯이 마른 몸을 유연하게 움직여 자신을 깔아보는 자들을 가차없이 부수고 짓밟아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외로운 길이다. 홍빈은 학연과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홍빈의 자리는 언제나 학연의 오른쪽, 한 걸음 뒤이기에 학연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아니, 그 누구도 학연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필요하다. 애인이. 그를 보듬어줄 사람이.
학연의 악몽을 따뜻한 체온으로 잠재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학연의 손에 이끌려 룸으로 들어오는 재환을 보면서 홍빈은 재환이 바로 학연을 위한 그 사람이라고 직감했다.
*
"안녕하세요오..."
말 끝을 늘어트리면서 살짝 눈웃음을 흘리는 얼굴은 기존의 학연의 취향과는 확실히 다른 구석이 있다. 택운과 홍빈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재환과 학연을 위해 자리를 만들었다. 재환은 학연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약간 더 좋았는데도 학연의 등에 달라붙어서 낯을 가리다가 수줍어하며 학연의 곁을 지키다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나이가 적지 않은 편이라 그런지 눈치도 있었고 적당히 빠질 줄 알았다. 아주 순진한 편은 아니라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래도 학연을 이용하는 타입은 아니겠지 싶었다. 물론 그가 학연을 이용하려해도 호락호락 당해주기만할 학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서도.
*
별 다를 것 없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조직은 지금 소강상태다. 모든 것을 잃고 바닥에서 시작한 학연과 홍빈은 치열하게 세를 불려왔다. 오합지졸들을 자근자근 밟아 부서지지 않은 놈들을 모아서 함께 바위를 때렸다. 그 바위가 부서지고 남은 돌들마저 흡수했다. 몸집을 불리고 또 불려서 커다란 조직을 쳐서 잡아먹으며 몸집을 키우는 것을 반복한 결과, 지금은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사대문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지만 이 걸로는 부족하다. 더 커지고 더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소화의 시간. 급하게 먹어서 체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제 밥그릇을 빼앗길까봐 발톱을 드러내려는 짐승들도 많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성장통 없는 성장을 기다려야 한다. 홍빈은 기민한 발을 놀려 자신이 맡은 구역과 사람들을 더 꼼꼼히 살폈다. 문제는 없었다. 자신쪽에는. 하지만 택운의 구역에서 거래처의 풀이 아닌 태국산 잡초들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홍빈은 그 이야길 학연에게 조심스레 전했다.
"으응, 아냐아냐. 설마 영업장에 내가 모르는 약이 돌아다니려고. 지금 어디께 더 좋은가 써보고 있는 거야. 거래처 바꿀까 고민 중이라."
"...그만요. 이 실장님 있잖아요."
"뭐 어때. 이 실장이 남인가."
그치, 이 실장? 학연은 홍빈에게 동의를 구했고 홍빈은 민망해하며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학연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보내준 주소는 처음 보는 주소였다. 도착해봐도 여전히 모르겠다. 전원주택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주택가의 마당이 있는 작은 집. 새로 리모델링을 한 것인지 오래되어보이는 옆집의 벽돌 담장과는 다른 깔끔한 노출 콘크리트 담장이 모던하다. 벨을 누르니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마당에 예쁘게 꾸며놓은 작은 정원을 가로지르는 원목 데크 위를 걸어 집 문 앞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린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이재환. 집 안에 들어가니 거실 소파에 학연이 편한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홍빈은 이 곳이 학연이 마련해준 재환의 거처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얘기하는 내내 이 상태. 학연은 홍빈과 이야기하는 동안 옆에 재환을 끼고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뺨을 쓰다듬고 허리를 끌어안아 티 안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매만졌다.
*
"맞다. 그래도 손님인데 음료수 하나 안 내왔네. 아이, 손 치워요."
재환은 학연의 손을 휙 털어버리고 부엌으로 갔다. 타박타박 회백색 바닥에 하얀 발이 내딛는 소리가 작게 울린다. 재환은 발목 위로 말아올린 연한 하늘색 면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뒤꿈치 위의 힘줄이 도드라진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홍빈은 널따란 소파에 누워있는 학연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거실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그리 넓지 않은 1층은 거실과 부엌, 그리고 공간을 분리하도록 옆벽만을 남겨둔 작업실이 전부다. 문이 없는 작업실 끝에는 하얀 피아노 한 대가 놓여져 있다. 악보대와 의자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악보들. 홍빈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지금 앉아있는 ㄱ자형 소파 뒤쪽의 옅은 아이보리색 벽에는 주황과 노랑, 연두빛 톤의 그림 몇 점이 걸려있다. 소파에는 포근한 담요를 두른 학연이 나른하게 누워있다. 그리고 다시 타박타박,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
"있는 게 이거 밖에 없네요. 자몽 주스 좋아하세요?"
둥글게 휘어지는 눈. 이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의 주인은 바로 재환이다.
홍빈은 재환이 건넨 자몽주스를 마셨다. 달콤하지만 끝 맛이 무척 쓰다. 하지만 그 쓴 맛에 자극되어 입 안에 침이 고여 얼른 다음 한 모금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
홍빈에게 재환의 집을 한 번 알려준 뒤로 학연은 계속 홍빈을 그곳으로 불렀다. 다행히도 홍빈이 정사 중의 상황이라든가 전초전의 상황에 놓이는 일은 없었지만 재환은 학연의 애인이기에 홍빈은 학연의 매우 사적인 영역에까지 발을 들인다는 느낌에 약간 민망함을 느꼈다. 홍빈에게 학연은 큰 형, 혹은 아버지와도 같았기에 아버지의 사생활을 알게 되는 면구스러움이 있었다. 특히,
"어, 잠깐만요. 학연 씨가 지금 낮잠 자고 있어서..."
온 몸에 학연의 냄새를 잔뜩 묻히고 미처 잠을 떨쳐내지 못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문을 열어주는 재환을 보면 더욱 그랬다. 흐트러진 까만 머리칼. 흐릿하게 붉은 자국이 남아있는 긴 목. 잔뜩 구겨진 헐렁한 티셔츠. 다리 실루엣이 비쳐 보이는 린넨 바지. 그리고 발목. 복사뼈가 툭 튀어나온 발목이 유독 희다.
"학연 씨. 학연 씨 일어나요. 이 실장님 왔어요."
"으음- 기다리라고 해."
까만 팔이 뱀처럼 재환의 목을 감아서 품으로 끌어당겼다. 더 자자. 나 졸려. 투정 부리는 목소리. 홍빈은 급하게 문 밖으로 나갔다. 몸을 돌려 나가는 중에 학연이 재환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아 입을 맞추고 있는 장면이 눈에 걸렸다.
*
그래서 홍빈은 학연과 재환의 만남을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한다고 학연이 그대로 따라줄 인물도 아니거니와 반대할 위치도 아니지만 학연의 쉼터로서의 역할을 재환은 훌륭하게 수행했다. 홍빈은 저도 모르게 재환의 얼굴을 떠올렸다. 적지 않게 보기는 했지만 오래 본 얼굴은 아니건만 볼 때마다 웃는 낯이라 재환을 떠올리면 그 미소부터 생각이 난다. 사실 생긴 걸로만 따지자면 곱고 예쁘다기 보다는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다. 진한 눈썹과 깊은 눈, 드라마틱할 정도로 높은 코, 날카로운 턱선. 하지만 웃으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입꼬리를 올리면 마른 뺨에 볼록하게 살이 모이고 눈 밑 애교살이 도톰하게 올라온다. 처져있던 눈꼬리가 살풋 올라가고 가려져있던 속쌍커풀이 드러난다. 주변 공기까지 온화해지는 듯한 웃음이 마음을 누그러트린다. 휴식과 안정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것같은 남자의 분위기는 단순히 그걸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어깨의 힘을 풀어지게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원식은 홍빈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그런 사람이 있어? 완전 현모양처 감이네. 남자여도 뭐, 니네 형님한테 좋으면 좋은 거지."
바로 그렇기때문에 홍빈은 학연의 하는 말을 믿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실장님 오셨네요. 학연 씨는 룸에 계세요."
바에서 바텐더 복을 입은 채로 여전한 그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웃어줬는데. 그 남자가, 이재환이 학연을 배신했다니.
"빈이 니가 재환이를 좀 감시해줘. 걔가 요새 만나는 애가 있는 것 같아."
"네, 알겠습니다."
학연이 한숨을 쉰다. 어두워진 학연의 얼굴을 보며 홍빈은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세게 깨물었다.
03.
배신이라는 건 참 재밌는 말이다. 믿음을 저버린다는 단어. 배라는 한자는 등, 뒤라는 뜻으로도 쓰이니 이 얼마나 맞는 말인지. 보이는 앞에서 뭔가를 꾸민다면 그건 배신이 아닐 것이다. 등 뒤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하는 짓이니까 그만큼 구린 거지. 괜히 숨기는 게 아닐 것이다. 홍빈은 학연의 잔에 술을 따르며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확신이 가는 건 아닌데...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얘가 지금 내 앞에서 딴 생각을 하고 있구나 싶은."
학연은 마른 안주를 한 웅큼 쥐고 입 안에 털어넣었다. 아드득아드득 씹는 소리가 조용한 룸 안을 가득 채웠다. 홍빈은 조용히 재환을 떠올렸다. 아무리 연인에게 돈을 아낌 없이 쓰는 학연이라도 재환은 좀 빠른 감이 있었다. 크기가 작다지만 2층짜리 주택을 내주지 않나, 편하게 다니라고 차 한 대도 뽑아 줬다고.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학연이 자기 애인에게 국산차를 건넸을리 없으니 벌써 큼직한 열쇠만 2개다. 지금이야 만난지 반년이 넘었다지만 집과 차를 해줬을 때는 만난지 얼마 안 됐을 때다. 그동안 홍빈 모르게 또 얼마나 해줬을지. 그래서 그런가. 너무 주기만 하니까 질리나. 홍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재환이가 나 만날 애는 아니지. 지금까지 만났던 애들이랑 달라. 그건 빈이 너도 알지?"
"...네."
학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남은 술을 비웠다. 홍빈은 잔을 채우고 얼른 자기 잔을 부딪쳤다. 속에서 열이 올라서 마시지 않고는 학연의 말을 더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
"애가 지 부모가 진 빚 덕에 그 좋다는 피아노도 때려치고 지금까지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데도 비뚤어지지 않고 착하잖아. 그렇다고 몸 굴린 것도 아니고. 잘 자랐어. 잘 자란 애야. 응- 나한테는 과분하지."
학연은 주절주절 끝없이 재환의 칭찬을 했다. 홍빈은 학연이 그럴수록 재환이 더 싫어졌다. 목구멍 뒤로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렀다. 그래봤자 그 새끼는 지 마이낑 까주고 집이랑 차까지 준 애인 뒤통수 치는 씨발년이라구요. 괜히 술만 벌컥벌컥 마셨다. 홍빈은 술을 잘 마시지는 않지만 주량은 이쪽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밑 빠진 독이다. 홍빈은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우고 그대로 물처럼 마셔댔다. 하지만 취한 사람은 학연이었다. 학연은 한숨을 쉬면서 홍빈에게 기댔다.
"휴... 착각이면 좋고. 아니면,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그러니까 나 중국 다녀올 때까지 좀 부탁할게."
뭐가 웃긴 것인지 학연이 흐흐 웃음을 흘렸다. 학연은 술이 강한 편이 아니라서 의식적으로 조절하곤 했지만 홍빈 앞에서만큼은 다르다. 믿으니까. 마음을 놓아도 되는 사람이니까. 홍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있으면 이거까지 알아놔. 그냥 눈길만 준 건지. 아니면 몸도 주고 마음도 준 건지."
"마음이요?"
"그래,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
남한이라는 좁은 땅덩어리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필리핀이든 바다를 끼고 나가서 형식상으로나마 내 편을 만들어두는 것이 업계 평판에 안정적이기도 해서 학연은 중국쪽으로 발을 넓히고 있었다.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는 중국 내에서도 신생조직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었다. 미리 골라놓은 곳이 몇 있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학연은 약 3주간의 출장을 다녀올 예정이다. 떼놈들은 끝까지 못 믿을 족속이라고 해도 손을 잡지 않으면 손해 나는 건 우리니니까 얼굴이라도 봐야지. 학연은 출장에 택운을 데려갔다. 택운의 모친이 조선족이라 중국어를 꽤나 잘 한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사실 3주나 자리를 비우는데 택운을 한국에 남겨두는 것이 더 위험하게 느껴져서 홍빈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형님을 데려가시면 더 좋으실 텐데."
망치가 투덜거렸지만 홍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로 옆에 두는 것만으로 관계의 깊이를 알 수는 없는 거지. 믿으니까 3주 동안 조직의 수장자리를 홍빈에게 맡기고 떠난 것이다.
"잘 다녀오세요."
"그래. 오다가 뭐라도 사다줄까?"
"됐어요, 별로 필요한 것도 없고."
홍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학연은 검은 슬랙스에 하얀 린넨 셔츠를 입은 모습으로 평소보다 편한 차림이다. 또래보다 어려보이는 외모 때문에 상대에게 얕보이기도 한다며 가끔 푸념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학연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외모를 좋아해서 옷도 신경 써서 입는 편이다. 지금도 공항 안인데도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고. 학연은 홍빈의 어깨를 쓰다듬듯이 툭툭 치며 말했다.
"뭐든 욕심도 내봐야지. 나는 니가 그게 걱정이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뭐라도 내가 다 해줄 텐데 말이야."
*
밤 비행기라서 학연과 택운을 배웅하고 나니 시간이 벌써 10시가 넘었다. 홍빈은 고민하다가 차를 이태원으로 돌렸다. 재환이 있는 클럽에 들를 셈이었다.
"이 실장님! 혼자 놀러 오신 거에요?"
웨이터 복을 입은 재환이 반갑게 홍빈을 맞았다. 클럽은 월요일엔 영업을 하지 않고 화요일부터 열지만 그것도 목요일쯤 돼야 사람이 많아지지 화요일과 수요일은 가볍게 술을 마시러 오는 사람들뿐이다. 공연도 토요일 하루뿐이라 재환은 피아노를 칠 때 외엔 웨이터 일을 한다고 학연이 말한 적이 있다.
"룸으로 들어가실래요? 아니면 그냥 테이블에 앉으실래요?"
재환은 홍빈을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
"테이블에 앉을게요."
그래야 널 감시하기 쉬우니까.
*
홍빈은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알아서 학연과 올 때마다 마시는 양주를 내오는 재환에게 잠깐 앉으라고 말했다.
"사장님 출장 간 건 아시죠?"
"네. 정 실장님이랑 같이..."
"요새 중국 쪽을 뚫으려고 노력 중이라. 되도록 빨리 오려고 하겠지만 좀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하셔서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저한테 연락하시라고."
아아- 재환은 홍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생각 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내민다.
"번호요. 저 실장님 번호 모르거든요."
그리고 베시시 웃었다. 휘어지는 눈꼬리에 의심이 더해진다. 홍빈은 재환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주고 자신의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재환은 작게 키득거렸다. 왜요? 홍빈이 눈으로 묻자 재환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재밌어 죽겠다는 듯 말했다.
"꼭 제가 이 실장님 헌팅하는 것 같아서요. 뭐 번호도 땄으니까 맞는 말인가."
홍빈이 약간 인상을 찌푸리자 재환은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며 자기 폰을 받아들고 자리를 떴다. 홍빈은 재환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이답지 않게 곰살맞게 구는 재환은 같은 웨이터들 사이에서도 예쁨을 받는 듯했다. 남자 애인을 둔 주제에 다른 남자들이 머리칼을 만지거나 어깨를 끌어안는데도 약간 꺼리듯 몸을 피하면서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문득 하얗고 긴 목을 덮는 큰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 큰 손은 재환의 목을 쓰다듬다가 뾰족한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마른 뺨을 슬쩍 건드리고 멀어졌다. 홍빈은 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그 손의 주인을 유심히 보았다.
04.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들이 흘렀다. 홍빈은 재환의 주위를 살폈다. 감시라는 잡스러운 일은 아래 애들이 많이 생기게 된 이후로 처음 하는 것이었다. 낮 동안에 재환은 집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가끔 나와서 마트에 들려서 장을 보거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창가에 앉아 뭔가를 끄적이곤 했다. 밤일을 하는 사람답게 모든 활동은 적어도 오후 12시가 지난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따가운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넘어 얼굴을 때려도 재환은 결코 피하는 법이 없었다. 카페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가 되어 마음껏 햇볕을 쬐었다. 홍빈은 진하게 선팅이 된 차 안에서 그런 재환을 지켜보았다. 작은 탁자 위에 엎드려 있다가 둥그렇게 말고 있던 허리부터 손가락 끝까지 천천히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은 커다란 애완용 고양이 같았다.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에도 햇살이 노랗게 묻어 있었다.
어느 날은 집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약하게 흘러나왔다. 창문을 열어둔 것인지 소리는 약하지만 멜로디는 꽤 선명하게 들렸다.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여자가 없어서 그런지 피아노 소리는 그때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통통 튀고 경쾌했다. 뚱땅뚱땅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무거운 음을 누르는 동시에 높은 음을 짧게짧게 끊어서 쳤다. 홍빈은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춤곡같기도 하고 게임 음악같은 느낌도 나서 눈을 감고 집중해서 들었다. 피아노는 비슷한 음을 끊임없이 변주하며 노래를 들려주었다.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노래가 이어진다. 홍빈은 자연스럽게 재환의 하얀 피아노를 떠올렸다. 빛 바랜 악보들이 흐트러져있던 작은 피아노 방. 홍빈으로선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갖고싶다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그는 피아노를 치고 있을까. 재환은 집에 있을 때 편하지만 곱게 단장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보이는 것을 의식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물 빠진 인디언 핑크의 부드러운 재질의 티를 입고 마소재의 바지를 발목이 보이도록 올려 입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재환은 진하지만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다. 진한 에스프레소에 다디단 연유를 부어 마시는 이국적인 커피같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 물처럼 흐르는 홍빈의 생각을 깨우듯 피아노 소리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흥얼거리는 영어 가사.
If you ever go down Trinidad
They make you feel so very glad
Calypso sing and make up rhyme
Guarantee you one real good fine time
Drinkin' rum and Coca-Cola
Go down Point Koomahnah
Both mother and daughter
Workin' for the Yankee dollar
홍빈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가 창문 사이로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노래와 피아노 소리 모두 뚝 끊겼다. 홍빈은 조용해진 집을 바라보며 이유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
"바람을 피는 것 같지는 않은데."
홍빈은 갈색의 티슈를 잘게 찢으며 말했다. 원식은 그런 홍빈에게 웃으며 말했다.
"니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무슨 소리야 그게."
"넌 그 사람 마음에 들어 하니까."
원식은 보기만해도 치약냄새가 맡아질 것 같은 쨍한 민트색의 프라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너 그 사람 만난 후로 나 만나면 그 사람 얘기만 해. 좋은 얘기든 나쁜 애기든 엄청 많이 한다고."
중학교 때부터 알아왔던 원식은 홍빈의 유일한 친구나 다름이 없다. 학연과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지만 친구라기보단 느슨한 주종관계에 더 가깝다. 하지만 원식은 홍빈을 아주 잘 파악했다. 한 달에 한 두번? 많아야 일주일에 한 번쯤 만나는 사이니 그렇게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닌데도 원식은 홍빈조차 깨닫지 못한 그의 무의식을 꿰뚫곤 했다. 음악을 해서 감정에 예민한가. 하지만 훤히 들여다 본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우니까.
"...그건 형님이 걱정되니까-"
"걱정치곤 과해. 니가 언제 형님 연애에 그렇게 신경 썼다고."
울컥해서 홍빈이 손에 쥐고 있던 티슈를 구겨버리자 원식은 악의는 없다는 듯이 양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그니까 내 말은 너도 배신 당한 쪽이라는 거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계속 형님이랑 만나길 바랐다든가하는 마음이 배신 당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안 좋잖아? 그러니까 그게 아닐 거라는 쪽으로 믿고 싶은 걸 수도 있다고."
원식은 치즈 프리첼을 덥썩 한 입 물었다. 빵이 찢어지며 치즈 냄새가 확 풍겼다.
"안심하지 말고 봐. 아직 일주일도 안 됐잖아?"
*
투둑투둑- 차를 때리는 빗소리에 홍빈은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홍빈은 담배를 자주 피우는 편은 아니지만 한번 피울때 줄담배를 피웠다. 재환이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것만 확인하고 피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지금쯤이면 나올 때가 됐는데...
"응, 먼저 갈게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뒷문으로 나오는 재환이 보였다. 재환은 익숙한 동작으로 차문을 열고 학연이 사준 차 안으로 몸을 접어 들어갔다. 그때 가게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왔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는지 큰 손으로 눈썹뼈에 손을 때 얼굴을 때리는 비를 막고서는 재환의 차로 몸을 기울여 똑똑 창문에 노크를 했다. 재환이 창문을 내리고 남자는 창문 안으로 얼굴을 집어 넣고 재환과 말을 나눴다. 여기서는 들리지 않는다. 홍빈은 작게 인상을 쓰며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노력했다. 가게 뒷문 쪽 골목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재환의 웃는 얼굴만큼은 선명하게 잘 보였다. 휘어지는 눈가에 맺힌 어둠 덕분이었다. 재환은 웃으며 남자의 팔을 약하게 때렸고 남자는 재환의 차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재환을 배웅했다. 재환이 가는 것을 지켜본 후 비에 젖은 머리칼을 털며 가게로 들어가는 남자. 아, 저 새끼는 그 때의 그 놈이다. 재환을 예뻐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난하게 재환을 만지던. 재환의 목과 귀와 머리카락을 만졌던 남자. 홍빈은 재환과 거리를 두고 차를 몰았다. 오늘은 재환의 집 앞에서 꽤 오래 있어야 될지도 모르겠다.
*
다행히 오래도록 내리는 비 덕분에 시간이 꽤 빨리 흘렀다. 긴 차체를 때리는 빗소리를 가만히 들으면 빗방울의 크기가 다 다르다는 것이 느껴져서 심심하지 않았다. 새벽 2시 37분. 약간 허기져서 홍빈은 차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볍게 뛰었다. "어서오세요-" 졸음 가득한 알바생의 목소리를 넘겨듣고 홍빈은 빵 몇 개와 우유를 고른 후 왠지 허전한 마음에 핫바를 추가로 샀다. 전자렌지에 핫바를 돌리는데 택시 한 대가 창 밖으로 지나갔다. 홍빈은 뜨거운 핫바를 꺼내 씹으며 차가 지나갔던 속도를 생각해 숫자를 셌다. 택시는 1분도 되지 않아 편의점 앞을 다시 지나갔다. 이 거리라면 재환의 집으로 갔을 수도 있다.
차 안에 편의점 봉지를 던져놓고 홍빈은 재환의 집 앞으로 갔다. 새벽 3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 주택가는 아주 조용했다. 홍빈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빠르게 달려서 벽을 밟고 두 손으로 담장 끝을 잡아 몸을 넘겼다. 담장이 그리 높지 않아 다행이었다. 마당의 작은 관목들 위로 떨어졌지만 비에 젖어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홍빈은 발소리를 죽이고 집 옆면의 채광을 위해 만들어놓은 벽면창으로 갔다. 재환은 이 창을 열어두는 일이 많았다. 역시나. 홍빈은 창문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져있는 1층. 침실과 욕실은 모두 2층에 있다. 홍빈은 젖은 구두발로 발자국을 남기며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가는 것은 처음이다. 거실 대신 소파가 있는 작은 복도와 칸칸이 방으로 이루어진 2층.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은 2개였다. 홍빈은 오른쪽에 있는 방문을 확 열었다. 침대 헤드에 반쯤 몸을 기대고 있는 재환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어? 실장님? 여기 어떻게-"
그럼 나머지 문이다.
홍빈은 빠른 걸음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던 나머지 문으로 갔다. 철컥철컥- 안에서 잠갔는지 열리지 않자 홍빈은 주저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발로 문을 찼다. 쾅-! 쾅-! 문은 두 번의 발길질에 그대로 손잡이가 부서지며 힘없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부터 후끈한 열기가 확 올라온다. 욕실이다. 막 씻었는지 말간 얼굴을 한 남자가 깜짝 놀라 홍빈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재환의 옷을 입고 있었다. 홍빈도 본 적이 있는 연한 분홍색의 체크 무늬 잠옷. 홍빈은 그대로 남자의 멱살을 잡아올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아악!"
"실장님!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실장님!"
재환이 다급하게 달려나와 홍빈의 팔을 붙잡았지만 이미 남자는 몸을 일으켜서 적대적인 눈빛을 하고 홍빈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홍빈은 재환을 뿌리치고 남자에게로 주먹을 내지르며 이 남자가 생각보다 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05.
"한상혁! 하지마!"
"저리 가있어요. 내가 형 애인이어도 이 사람이 이럴 권리는 없는 거지."
한상혁이라는 남자는 그만하라며 말리는 재환을 뿌리치고 자세를 낮췄다. 어디서 격투기를 좀 배운 모양인지 무게중심을 잡는 폼이 잡스럽지 않고 깨끗하다. 하지만 홍빈은 뚜벅뚜벅 흙탕물이 묻은 구둣발로 깨끗한 바닥에 자국을 남기며 거침없이 상혁에게 다가갔다. 흔히들 싸움은 맷집이다, 겁이 없어야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싸움도 다른 모든 몸으로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경험이 중요하다. 정말 소질이 없는 새끼가 아니라면, 혹은 정말 주먹이 천재적으로 세지 않다면 많이 때려본 놈일수록 강하다. 요새야 안 그렇지만 원래 홍빈은 매일 남을 때리는 사람이다.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까지 때린다. 폭력으로 상대방의 의지를 꺾는 사람. 자세도 잡지 않고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홍빈에게 위기감을 느낀 상혁이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달겨들었다. 기껏 좋게 잡은 자세를 흐트린다.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애다.
홍빈은 상혁이 괴성을 지르며 내지르는 주먹을 그대로 오른손으로 잡아 흘리며 상혁의 뒤로 가서 어깨를 감아 꺾었다.
"아악!"
"힘 주면 더 다친다. 힘 빼."
상혁이 억지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자 홍빈은 무릎으로 상혁의 허벅지를 수 차례 가격했다.
"으.. 씨발...!"
"고집이 세네."
뿌드득- 홍빈은 그대로 상혁의 팔을 꺾어 어깨를 탈골시켰다. 깨끗하게 할 수도 있지만 고집스럽게 덤벼드는 게 가소로워서 일부러 더 아프도록 비틀어 꺾었다. 상혁은 그대로 소리를 지르며 어깨를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홍빈은 상혁의 멱살을 잡아 억지로 끌어 일으켰다.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은 이미 홍빈에게 맞아 입술이 터지고 볼이 부어있다. 내일이면 광대뼈쪽에 퍼렇게 멍이 들 것이 분명했다. 그때 따뜻한 손이 홍빈의 팔을 잡아 말렸다.
"실장님 제발요, 제가 잘못했어요..."
재환이었다. 재환은 울며 홍빈의 팔에 매달렸다. 그래, 이미 끝난 상황인 걸. 굳이 더 가혹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홍빈은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털어 상혁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제서야 진흙으로 더러워진 바닥이 눈에 보였다.
*
재환은 상혁이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한다고, 훌쩍훌쩍 우는 와중에도 홍빈에게 똑바로 요구했다. "내가 바람을 피웠대도 다친 사람은 병원에 가는 게 맞는 거죠." 대화가 통하지를 않았다. 결국 홍빈은 상혁이 집을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재환의 동행은 허락하지 않았다. 재환은 홍빈의 감시 하에 현관문까지 상혁을 부축해서 보냈다. 택시 타고 가라며 지갑에서 돈까지 꺼내주는 것을 보며 홍빈은 약간 비웃었다. 깽값을 물어주려면 저거로는 택도 없지.
"변명해봐요."
홍빈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명령하듯 재환에게 턱짓을 했다. 재환은 벌 받는 아이처럼 홍빈 앞에 가만히 서서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긴 팔 소매 끝으로 닦았다. 재환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미 오해하기 쉬운 장면을 보여드렸다는 건 저도 이해하고 있어요. 게이인 새끼가 다른 남자를 집에 끌여들였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해요. 하지만-"
말을 하다 감정이 격해지는지 숨을 한 번 삼킨다. 아직 흐르지 않은 눈물을 소매 끝으로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상혁이랑은 정말 친한 형 동생 사이에요. 상혁이는 여자친구도 있어요."
"그럼 왜 불렀는데요."
홍빈이 약간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재환은 흠칫 몸을 떨며 뒤로 반 발자국 물러났다. 홍빈은 재환이 아직도 상혁을 때린 일로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새삼 놀라웠다. 하긴 30분도 지나지 않은 일인데 당연한가.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홍빈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것이 누군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깜빡했다. 심하고 경미하고를 떠나서 폭력 그 자체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재환은 밤갈색의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술을 꾹 깨물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바보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제가 비오는 날에 혼자 못 자요. 그래서 불렀어요, 상혁이."
홍빈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봤다. 여전히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
재환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홍빈이 재환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상혁과의 일은 의심스러운 일이기에 지켜봐야 했다. 학연이 돌아와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을 때 확실한 답을 할 수 있도록. 결국 무엇을 선택하든 변하는 것은 없다. 홍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구구절절한 사정까지는 알고 싶지 않고, 이제 집으로 부르지 마세요. 일할 때도 멀리하시고."
그리고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뒤를 돌아 재환에게 말했다.
"다음 번엔 그 새끼 어깨가 아니라 다른 데가 나갈 테니까 제 말 들으세요."
어쩌면 당신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고. 홍빈은 마지막 말은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재환은 이미 참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장마가 오기엔 아직 이른 날짜인데 비는 바짝 마르고 가물었던 땅을 위로하듯 며칠 밤을 촉촉하게 찾아왔다. 사람들은 젖은 바닥을 밟으며 길을 나섰고 해가 높이 떠오르는 오후 2시즈음에는 바닥이 바짝 말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찾아간 늦은 밤부터 비가 내렸다. 보통은 기분 좋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을 몰고 오는 도둑비에 그쳤지만 하루는 천둥이 치고 번개가 하늘을 찢었다. 밤마다 비가 온 지도 어느덧 닷새째. 재환은 닷새동안 출근도,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재환의 일상을 감시하는 홍빈으로서는 퍽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클럽에 연락해보니 상혁은 병가를 내고 그 다음 날부터 정상적으로 출근을 했는데 재환은 그 뒤로 두문불출이다. 결국 홍빈은 다시 재환의 집에 찾아갔다. 이번에는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대신 벨을 눌러 현관문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쓰기엔 애매한 잔비지만 점점 빗줄기가 세지는 것이 오늘 밤은 꽤 거센 장대비가 내릴 것 같다.
"실장님이 어쩐 일이세요?"
"...진짠가보네."
비가 올 때면 혼자 잠을 못 잔다는 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바보같게 느껴졌는지 머뭇거리며 하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재환의 눈 밑이 퀭했다. 홍빈은 며칠 동안 지켜봤다는 말 대신 클럽에 전화했다는 말을 했다.
"출근 안하셨다길래 와본 거에요."
"그렇구나... 근데 실장님 혹시 지금 바쁘세요?"
"아뇨."
"그럼 몇 시간만 있다가 가세요."
겁도 없이 덥썩- 홍빈의 손목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홍빈은 재환이 이끈 대로 소파에 앉아서 재환이 뭘 하려는지 지켜보았다. 재환은 따뜻한 차와 간식거리를 내오고 홍빈의 손에 리모콘을 들려준 후 소파 아래에 깔린 러그 위로 벌러덩 누웠다. 홍빈은 당황하며 재환을 불렀다.
"이봐요-"
"몇 시간만요. 낮에 자면 금방 깨서 요 며칠동안 10시간도 못 잤어요... 부탁드려요."
재환은 쪼그만 담요를 뒤집어쓰고 불쌍한 얼굴로 홍빈을 보았다. 지난 번엔 그렇게나 무서워하더니 잠에 취한 것인지 아주 막무가내다. 홍빈이 한숨을 쉬며 "그럼 몇 시간만요."하고 답해주자 환하게 웃으며 눈을 감는다.
"티비 보고 계세요! 영화 결제하셔도 되요!"
잠 못 잤다는 사람을 두고 잘도 티비를 보겠다- 혀를 차면서도 홍빈은 재환이 신경 쓰지 않도록 티비를 켜서 소리를 음소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수준에 두었다. 재환은 말을 끝내자마자 잠에 든 듯했다. 비염이 있는 건지 약간 큰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의미없이 떠들어대는 티비 소음 위로 재환의 고른 숨소리가 끊이지 않는 메아리처럼 퍼져나가고 홍빈은 3시간마다 재환을 깨울까 고민하며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06.
비는 부슬부슬 끊임없이 내렸다. 밤사이 빗줄기가 더 굵어지고 아침쯤에 그칠 줄로만 알았는데 동이 트도록 비는 아주 얇게만 내렸다.
잠을 자지 않는 일은 익숙하다. 딱히 잠이 오지 않도록 무엇을 마시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밤을 지새울 수 있다. 홍빈은 가만히 앉아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주제들을 잠깐씩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잠을 자는 재환만 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귓가에 닿아오는 재환의 숨소리가 마음을 간지럽힌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도록,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같이 있는 시간은 홍빈에게 무척이나 드문 것이었다. 홍빈은 원식의 말을 떠올렸다.
‘넌 그 사람 마음에 들어 하니까.’
‘너 그 사람 만난 후로 나 만나면 그 사람 얘기만 해. 좋은 얘기든 나쁜 애기든 엄청 많이 한다고.’
홍빈은 자신의 발치에서 담요를 덮고 불쌍하게 자는 재환을 내려다보았다. 잠을 못자서 눈 밑이 푹 꺼졌다. 피부도 거칠어 보이고. 재환은 비가 와서 잠을 못 잤다고 했지만 홍빈은 재환이 주인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애완견 같다고 느꼈다.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하는. 비가 올 때 혼자 자지 못한다는 말은 비가 올 때마다 학연이 같이 있어주었다는 뜻이겠지.
벽을 대신하는 큰 창문으로 아침햇살이 쏟아진다. 가느다란 비에 햇빛이 부서진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재환의 얼굴에 진하게 그림자가 졌다. 말도 안 되게 높은 코, 툭 튀어나온 눈썹 뼈, 두툼한 입술, 뾰족한 턱 끝. 재환의 얼굴을 훑는 노랗고 하얀 햇빛에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희게 빛났다. 홍빈은 재환이 얼굴을 찌푸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조용히 일어나서 커텐을 쳤다. 마치 어둠 속으로 숨기는 기분이었다. 홍빈은 문득 스스로의 생각에 의문을 가졌다. 숨겨? 숨긴다는 말은 두 가지의 대상이 필요하다. 과연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숨기고 싶은 것인가.
*
수면욕, 식욕, 성욕. 인간의 삼대 욕구 중에서 그 중 아무것도 강하지 않은 홍빈이지만 억지로 수면욕을 눌러놓은 상황에선 상대적으로 식욕이 강해졌다. 홍빈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반찬통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지만 반찬통에 하얗게 성에가 낀 것이 밥을 자주 먹은 것 같지는 않다.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나. 숨이 죽은 나물들이 딱딱하게 얼어있다. 홍빈은 냉장고 내부 온도를 약간 낮추고 먹은 흔적이 있는 음료수와 초코바 같은 군것질거리를 확인하고 혀를 찼다. 이러니까 말랐는데도 엉덩이와 허벅지에 살집이...큼! 홍빈은 얼른 냉장고를 닫고 괜히 머리를 털었다. 홍빈의 귀 끝이 붉었다.
냉동고를 열자 치킨 너겟, 동그랑땡과 같은 냉동식품들만 한 가득. 홍빈은 그런대로 이거라도 먹자 싶어서 접시에 적당히 덜어서 후라이팬에 구웠다. 후라이팬도 대체 언제 쓴 것인지 기름때가 묻어서 박박 닦아야 했다.
뜨거운 기름으로 달궈진 팬에 너겟을 올리자 치이익- 물기가 날아가며 맛있는 소리가 난다. 홍빈은 뒤를 돌아 재환이 깨지는 않는지 확인하며 약불로 돌렸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이런.”
밥솥을 열어보니 누룽지마냥 딱딱하게 마른 밥뿐이다. 이걸 예상 못했네. 홍빈은 혹시 햇반이라도 없을까 싱크대 위의 선반을 뒤졌다.
“뭐 찾으세요?”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홍빈은 멈칫했다. 분명 방금 자고 있는 걸 확인했는데. 홍빈이 뒤를 돌자 졸려서 눈을 비비고 있는 재환이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홍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햇반이요.”
“배고프면 저 깨우시지.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재환은 싱크대 아래 선반을 열어 햇반을 여러 개 꺼내 홍빈에게 건넸다.
“주인 허락 없이 맘대로 열어보는 거 아니에요.”
평소와 똑같이 웃었다.
“거기 뭐가 있을 줄 알고.”
그래서 홍빈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선반을 열었을 때 별 게 없어서이기도 했다.
*
그렇게 어쩌다 보니 함께 햇반을 돌려 아침을 먹고 홍빈은 재환의 집을 나왔다. 집에서 눈을 좀 붙이고 오후쯤 나와서 밀린 일을 보고 받고 홍빈의 손에서 처리할 만한 일들을 하고나니 밤은 어느새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낮 동안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홍빈은 차문 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재환의 얼굴을 그렸다.
한때 홍빈도 불면증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운 적이 있다. 17, 18살 때 즈음. 그땐 이유 없는 불면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춘기와 성장통의 예민함이 신경줄을 태우며 괴롭힌 것이 아닌가 싶다.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질 않아서, 인터넷에 나오는 대로 따뜻한 물도 마셔보고 낮에 힘껏 움직여서 몸을 녹초로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한번 멀어진 숙면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홍빈의 손에 끄트머리도 잡혀주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키는 쑥쑥 커서 팔다리 마디마디가 쑤셨다. 가까스로 쪽잠이 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욱신거리는 뼈마디에 고통스럽게 깨어나기 일쑤였다. 침대 위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홍빈은 걱정스러운 학연의 눈빛과 아픈 팔다리를 조심스럽게 주물러주는 학연의 손길에 많은 위로를 받곤 했었다.
그러니까,
“여보세요.”
이건 그냥 동질감에서 나오는 동정일 뿐이다.
“아뇨. 비가 오길래 오늘은 어떤가 하고 전화해본 거에요.”
통화를 마친 홍빈은 차를 돌렸다. 재환의 집으로.
*
“침대에서 자던지 왜 거실에서 자요.”
홍빈은 또 러그 위에 몸을 누이는 재환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재환은 어제와는 달리 침대에서 이불까지 가져와서 야무지게 폈다.
“침대면 2층으로 올라가야 되는데 그럼 티비도 없고 이 실장님 심심하잖아요.”
그리고 고개를 들며 헤실헤실 웃는다.
“주변에 사람 기척 안 나면 깨버리니까... 그냥 여기서 자는 게 나아요.”
그 말에 홍빈은 그러냐고 하고 말았다. 자기가 괜찮다는데.
재환은 어제 홍빈 덕에 잠을 좀 잤다고 그나마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재환은 홍빈에게 주스와 간식거리를 꺼내준 후 옆에 앉아서 홍빈에게 상혁이 실력이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빠진 어깨를 잘 접골했다, 이제 내일부터는 출근해야겠다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재잘재잘하더니 씻으러 가야겠다고 2층 욕실로 쏙 들어갔다.
홍빈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일을 하다가 와서 새카만 정장 그대로였다. 하도 정장만 입어서 그다지 불편할 건 없지만 벨트 정도는 푸를까. 일어나서 벨트를 빼서 소파 옆 탁자에 두고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 한결 숨 쉬기가 편한 기분이다.
원래 집에서도 티비를 잘 보는 편은 아니지만 재환이 잘 때까지는 켜둘까 싶어서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재환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계단을 내려왔다.
“아, 편한 옷 좀 드릴까요?”
홍빈은 상혁을 떠올렸다. 상혁은 재환의 잠옷을 입고 있었기에 홍빈에게 확신을 주었다. 학연은 재환의 집에서 편한 차림으로 홍빈을 맞아주곤 했었고. 남의 집에서 편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집 주인과의 일정한 정도 이상의 친밀함의 증거다. 홍빈은 고개를 저었다. 재환도 홍빈의 뜻을 짐작하는지 더 권하지 않았다.
“아 시원하다.”
재환은 에어컨의 날개를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 젖은 머리를 마구 털었다.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결벽에 가깝게 깔끔한 타입인 홍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감기 걸려요.”
“맨날 이러는데도 안 걸리던데요?”
재환은 뒤를 돌아 이번엔 뒤통수를 말리며 해맑게 웃었다. 그때 눈앞이 하얗게 빛으로 깜빡였다. 번개다. 인식한 순간, 번개의 뒤를 따라 꽈르릉! 하늘이 찢는 천둥소리가 났다. 재환은 화들짝 놀라며 홍빈의 곁으로 뛰어왔다.
“괜찮아요?”
파랗게 질린 얼굴에 홍빈이 묻자 재환은 뻔한 거짓말을 했다.
“네, 괜찮아요.”
*
귀마개하면 되는데-라고 말했지만 재환은 귀마개를 끼고도 다시 꽈르릉- 울린 천둥소리에 몸을 파드득 떨었다. 혼자 있을 때 천둥이 치면 어떻게 했느냐는 홍빈의 물음에 재환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피아노 방이 방음이 잘 돼서...”
“그럼 갑시다.”
“거기 좁은데요?”
“한 사람 누울 자리 정도는 있겠죠.”
홍빈은 재환 대신 이불을 들고 피아노방으로 갔다. 재환은 우물쭈물대다가 홍빈의 뒤를 따랐다. 문을 열자 뚜껑이 닫힌 하얀 피아노가 고요한 존재감으로 방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홍빈은 집 밖에서 재환을 감시할 때 들었던 피아노 소리를 떠올렸다. 치는 사람이 없다면 피아노는 그저 정물靜物일 뿐인데도 재환의 손을 탄 피아노는 맑고 아름다워 보인다. 재환은 바닥에 흩어진 악보들을 모아 책장에 넣었다. 홍빈은 발로 바닥을 쓸어보았다.
“먼지가 좀 있네. 청소하고 자야겠네요.”
“...그냥 천둥 그칠 때까지만 여기 있다가 나가요.”
청소가 하기 싫으냐고 물으려던 홍빈은 재환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재환의 표정은 복잡했다. 마르지 않은 채로 엎질러진 유화 팔레트처럼 여러 감정이 뒤섞여 끈적거린다. 홍빈이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재환은 희미하게 웃으며 피아노 의자를 빼서 앉았다.
“실장님도 앉으세요.”
옆자리를 툭툭 친다. 홍빈은 문 밖에 이불을 내려두고 방문을 닫았다. 뚝. 문을 닫음과 동시에 작게 들리던 빗소리까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재환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앉으세요.”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란 건, 상대방의 아무 것도 아닌 한 마디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07.
피아노 방은 두 사람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둘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하는 사이도 아니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엄청나게 불편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편하지도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사실 둘은 표면적인 관계에 비해서 친한 편이었다. 물론 보스의 애인과 보스의 오른팔이라는 관계의 양 극단은 증오해서 죽이거나, 너무 사랑해서 몸을 섞는 두 가지 뿐이지만 대부분 오른팔과 정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재환이 잠을 자지 못할까봐 홍빈이 이렇게 집에 찾아오는 것은, 확실히 비정상적이다.
"비가 그칠 것 같지가 않은데. 걸레 어디 있어요? 바닥 닦아줄 테니까 여기서 자요."
피아노 방의 문을 열고 바깥을 확인한 홍빈이 말하자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는 온 세상을 물에 빠트릴 것처럼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제가 할게요."
"괜찮으니까 이불이나 들고 있어요. 끌리면 먼지 묻어요."
홍빈은 스팀 걸레로 바닥을 꼼꼼하게 밀었다. 바닥에 쌓인 먼지도 그렇고, 뚜껑이 닫혀있는 피아노도 그렇고. 요새 피아노를 통 치지 않는 것 같다. 홍빈은 재환을 감시하면서 피아노 소리를 듣곤 했기에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재환의 피아노가 일반인들이 취미로 하는 수준과 다르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물어보고 싶으신 거 아니에요?"
재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를요."
홍빈은 모른 척했다.
"피아노 왜 안 치냐구요."
"...물어봐야 했나요?"
"궁금해 하시는 것 같길래."
재환은 손가락으로 피아노 뚜껑을 살살 쓸었다. 하얀 피아노의 빛이 재환의 손에 옮아가는 것처럼 재환의 손끝이 희게 질렸다. 재환은 시선을 떨구며 입술을 열었다. 언제부터 깨물고 있었는지 도톰한 입술이 피가 몰려 붉다.
"처음엔, 피아노를 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재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듣고 싶었다. 재환은 언제나 홍빈에게 대립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
"학연 씨는 좋은 사람이죠. 하지만 학연 씨가 처음 제게 호감을 표현했을 때 저는 무서웠어요. 다른 애들이 학연 씨가 누구인지 알려줘서 이미 알고 있었고... 한 번도 제 앞에서 무서운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보스라니까. 정 실장님도 무서운데 실장님 윗 사람이라는 말에 놀랐죠. 제 앞에서는 젠틀하고 다정했으니까 더욱 더. 하지만...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재환은 홍빈의 손에서 스팀 걸레를 뺏어서 전원을 끄고 바닥에 이부자리를 폈다. 네 발로 엎드려서 이불을 구김 없이 펼친다. 잠옷으로 입은 티가 재환이 움직일 때마다 올라가서 마른 등허리가 드러난다. 재환은 그 위로 털썩 누워서 웃으며 홍빈을 올려다 보았다.
"그렇잖아요. 빚을 다 갚아준다는데 무섭다는 이유 하나로 거절하겠어요? 게다가 거절했다가는 금방 다른 애들이 달라붙어서 자긴 어떠냐고 들이댔을 거에요. 나같은 건 금방 잊어버렸을 거라구요."
아니. 재환의 그 말에 홍빈은 속으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금방 잊을 수 있을리가 없다. 재환은 재잘재잘 계속 말을 했다. 홍빈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재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뒤로 좋았죠. 학연 씨는 상냥했고... 걱정했던 것처럼 잠자리가 거칠거나 변태적이지도 않았고... 완벽했어요. 근데 그럼 뭐가 문제일까요. 이렇게 완벽한데 뭐가 문제일까."
재환은 누워있던 자세를 바꿨다. 엎드려서 두 손바닥을 겹쳐 손등에 얼굴을 대고 중얼거린다. 뭐가 문제일까.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거죠. 좋은 집에, 좋은 차에, 좋은 애인에, 좋은 피아노에.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데도... 하지만 그래서일지도 몰라요. 빚에 팔린 거나 다름 없는 주제에 아무 것도 부족한 게 없으니까 피아노가 나를 경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손등에 얼굴을 묻으며 재환은 키득키득 웃었다. 마른 어깨가 웃을 때마다 들썩인다.
"유치하죠? 이 나이에 이런 유치한 자기 혐오라니... 그래도 어쩌겠어요.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데. 그래서 피아노방에 한 동안 안 들어왔어요. 그래서 먼지도 쌓였구, 그래서 이 실장님이 청소도 하고! 이 실장님이 직접 청소했다는 걸 알면 우리 애들이 까무라칠지도 몰라요."
재환은 엎드린 것이 불편했는지 홍빈 쪽을 보며 옆으로 누웠다. 불빛때문에 재환의 왼쪽 얼굴에 그늘이 졌다.
"...고마워요. 말이 애인이지 실장님 입장에서 보면 그냥 남창이나 다름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알아요. 그래서 더 고맙다고 하는 거고."
재환은 이불을 끌어올려 목까지 푹 덮었다. 새하얗고 포근한 이불 속에서 재환은 곱게 눈을 접으며 홍빈을 바라보았다. 눈가에 잠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자요. 옆에 있을게요."
홍빈은 불을 껐다.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피아노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
깜빡 졸았을까. 느릿하게 눈을 뜨고 일어나서 뻐근한 허리를 돌렸다. 작은 방 안을 채우는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홍빈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홍빈은 조심조심 재환이 누워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재환은 어린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이불 속에 파묻혀 자고 있었다. 홍빈은 무릎을 접어 쭈그리고 앉아서 재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어둠에 익은 눈은 재환의 윤곽을 제법 잘 보여주었다.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인데 눈을 떠서 웃을 때면 예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밝게 웃지만 어디엔가 그늘이 진 미소. 지금 허무함을 느끼고 자기 혐오 속에 빠진 재환의 모습을 학연은 아마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그때 재환이 천천히 눈을 떴다.
"......"
홍빈은 뭐라 변명을 할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 어떤 이유도 앞에 앉아서 남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환은 예상 외의 말을 했다.
"동정이라도 좋아요."
그리고 재환은 팔로 몸을 일으켜서 홍빈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지금 무슨..."
"내가 먼저 유혹한 거에요."
재환은 아주 몸을 일으켜 두 팔로 홍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홍빈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다가 다급하게 자신의 입술을 핥아오는 재환의 몸짓에 열이 올라 재환을 안은 채로 이불 위로 쓰러졌다.
*
재환은 오래 참은 사람처럼 홍빈의 입술을 핥고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탄 홍빈을 두 다리로 끌어안았다. 홍빈이 얼굴을 모로 꺾으며 더 깊이 혀를 섞어오자 재환의 성기가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홍빈은 하체에 닿는 재환의 열기에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이유로 재환이 먼저 자신을 유혹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홍빈으로선 그런 재환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 어쩌면 처음부터였다. 처음 재환을 봤을 때부터 그에게서 묘한 색을 느꼈다. 그 뒤로 학연의 품에 안긴 모습을 보면 애써 외면해왔지만 분명 홍빈은 재환에게 끌리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재환이 와달라고 부탁도 하지 않은 비가 내리는 오늘 밤 재환의 집에 찾아온 것이었다. 혼자 외롭게 잠 못 이루며 괴로워 할까봐. 그 괴로움을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으응... 홍ㅂ, 홍빈 씨..."
재환은 영악하게도 실장님이라는 호칭 대신 홍빈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몸을 떨었다. 홍빈은 재환의 상의를 벗겨 창백하기까지 한 상체에 입술을 묻었다. 자국이 남을까 빨지는 못하고 샅샅이 핥았다. 여자와는 달리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몸이 홍빈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아... 깨물어도 되요..."
색이 짙은 유두를 핥자 재환이 홍빈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앓는 소리를 낸다. 벌써부터 허리를 들썩이며 엉덩이를 홍빈의 하체에 비벼대는 것은 학연이 들여놓은 버릇이겠지. 머리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흥분이 되었다. 홍빈은 재환의 말대로 유두를 깨물면서 헐렁한 파자마를 벗겨냈다. 손에 닿는 맨 살갗이 뜨겁다.
*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 재환도 홍빈도 기갈이 난 사람처럼 서로에게 달겨들어 서로의 살갗을 핥고 서로의 몸을 탐했다. 홍빈은 재환의 깊은 곳으로 박아 넣으면서도 재환의 몸을 당겨 안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혀를 얽으며 더 갖고 싶어 안달을 냈다. 재환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다리를 벌려 홍빈을 먹고 싶어 허리를 뒤챘고 홍빈이 들어오자 내보내기 싫다는 듯 안으로 안으로 조였다. 한 사람이 숨을 내쉬면 다른 사람이 그 숨을 들이 마셨다. 두 사람은 닫힌 세계 속에서 서로의 숨을 마시며 그저 섞이고 싶어서 계속 계속 하체를 맞댔다.
"하아... 홍빈 씨... 좋아요, 더 해주세요..."
홍빈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재환은 홍빈이 팔을 풀게 하자 겁을 집어먹고 홍빈을 올려 보았다. 홍빈은 재환의 손을 펴서 자신의 손을 맞대어 손가락끼리 꽉 얽었다. 빈틈 없이 깍지를 꼈다. 홍빈은 재환에게 키스하며 혀로 재환의 이름을 그렸다.
"내가 먼저 유혹한 거에요."
재환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홍빈은 알고 있었다.
08.
실수가 아니다. 홍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맞았다. 재환이 언제부터 자신을 마음에 뒀는지는 모르겠으나 홍빈은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흐읏...!"
안에 싸달라는 재환의 말에 홍빈은 그 말대로 했다.
"아으읏, 아! 홍빈 씨이..."
자신의 성기를 쥐고 흔드는 재환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 통통하게 부은 입술을 깨물고 혀를 넣어서 입 안을 핥으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힉, 힉, 급하게 숨을 들이쉬는 콧소리에 다시 발기할 것만 같았다.
재환의 성기가 꿈틀거리며 흰 점액질을 쏟아냈다. 홍빈의 배에 튀어서 아래로 뚝뚝 끈적하게 흘렀다. 홍빈은 숨을 몰아쉬는 재환을 내려보며 그의 뺨을 쓰다듬다가 다시금 입을 맞췄다. 뜨거운 숨이 섞이고, 침이 섞이고, 시선이 섞이고, 몸이 섞였다. 마음이 섞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재환은 홍빈의 넓은 어깨를 베고 가만히 홍빈을 올려다보았다. 강직하고 아름다운 턱이 황홀했다. 손을 뻗어 가만히 턱선을 만지자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홍빈이 고개를 돌려 재환을 보며 허리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줘 그를 당겼다. 마른 몸이지만 모조리 근육으로 이루어졌는지 남자 중에서도 가볍지는 않은 자신을 한 손으로도 쉽게 끄는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힘이 남았으면 한 번 더 할까요?"
홍빈은 몇 번 몸을 섞은 후에도 존대를 유지했다. 재환은 그런 그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냥 만져본 거에요."
"하기 싫다는 소리는 안 하네."
물론 이렇게 혼자말 하듯 툭툭 말할 때는 반말을 했지만 기본적으로 홍빈은 재환을 배려해주는 편이었다. 그때 상혁을 집에서 발견하고 그에게 무참이 폭력을 행사했을 때에도 홍빈은 재환을 존중해주었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상혁이 말을 해주었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네요."
"누구? 이 실장님?"
"네. 그 사람한테 어깨 탈골된 마당에 할 말은 아니지만, 형은 한 대도 안 건드려서... 그게 차 사장님 명령인지 이 실장이란 사람 뜻인지는 몰라요. 차 사장님 뜻이라도 그 상황에서 그렇게 냉정하기가 쉬운가."
그러고 보면 울며 매달렸을 때에도, 잠을 못자서 상혁을 불렀단 말에도 크게 화를 내거나 비웃지 않았다. 어쩌면 속으로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속으로는 그랬다고 하더라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건 없던 일이다. 모든 사건은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마치 지금의 섹스처럼.
홍빈은 재환의 위로 천천히 올라타 상체를 숙여 재환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냄새를 맡는 것인지 숨을 깊게 들이쉬는 홍빈의 행동에 재환은 뭔가 참을 수 없어졌다. 팔을 뻗어 홍빈의 넓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문신이 새겨진 살갗은 매끈하지 않았다. 손끝으로 천천히 그 무늬를 따라 더듬어가자 홍빈의 숨소리가 조금 커졌다.
홍빈은 고개를 들어 재환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재환은 홍빈의 시선을 받으면 세상에서 제일 초라해지는 것만 같았다. 홍채와 동공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까만 홍빈의 눈은 무엇이든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더러운 몸도, 그에 못지 않게 더러운 마음도.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홍빈의 시선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을 때,
"이재환."
홍빈이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름에 별 의미를 부여해본 적은 없다. 언제나 불리는 것이 이름이다. 하지만 홍빈은 재환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부를 일이 없기도 했다. 자의식과잉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홍빈은 의식적으로 재환을 부를 일을 만들지 않았다. 말할 때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마주 본 상태에서만 말했고 멀리 있을 땐 다가와서 말했다. 재환은 홍빈을 향해 커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런 홍빈의 일련의 행동들을 열심히 분석하려 애쓰곤 했다. 남자한텐 형수라고 부르긴 싫고 이름을 부르기엔 건방져 보여서 그런 걸까. 실제로 택운도 재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왜 홍빈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것만이 마음에 남는지 모를 일이었다.
"재환아..."
홍빈은 단정한 손 끝으로 재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재환은 홍빈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홍빈을 세게 품었다.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준 순간. 재환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홍빈은 수없는 정사에 지쳐 기절하듯 잠이 든 재환을 안고 기분 좋은 나른함에 잠겼다. 학연이 왜 끊이지 않고 애인을 만드는지 알 것 같았다. 언제나 힘이 잔뜩 들어가있던 어깨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홍빈은 가슴가에 닿는 재환의 숨결에 간지러움을 느꼈지만 이 간지러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미 새벽이었다. 곧 해가 뜨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던 두 사람을 모조리 비출 것이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이렇게 아쉬울 수 있다니. 이 숨소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홍빈은 그것이 아쉬웠다. 이제 학연이 돌아온다. 며칠 전에도 학연과 연락을 했었다. 별 일 없느냐고. 홍빈은 의심 가는 애송이가 있었는데 별 일 아니었노라고 전했다. 그저 재환이 요새 잠을 못 자서 가벼운 우울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고 말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학연이 말한 재환에게 생긴 다른 남자란, 아마도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재환."
홍빈은 재환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며 이불을 끌어당겨 드러난 맨 어깨를 가렸다. 어둠 속에서 어스름히 빛나는 흰 얼굴이 사랑스럽다. 휴식과 안정. 두 단어를 형상화한 남자같다고 생각했던 그 언젠가의 자신처럼 재환을 품에 안고 있으니 세상을 향해 단단하게 두르고 있던 갑옷이 한 풀 벗겨진 것만 같았다. 이 곳이 조금 살 만하게 느껴졌다. 재환을 품고 난 다음에야 자신이 세상을 그리 어렵게 살아가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편안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물이 마른 황야를 나침반 하나에 의지하여 걷다가 안락한 쉼터에 다다른 사람이 이럴까. 이 쉼터를 벗어나 다시 그 거친 바람이 부는 황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학연이 올 때까지만이다. 딱 그 때까지만.
학연은 홍빈의 나침반이다. 그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으응... 안 자고 뭐해요.."
잠에서 얼핏 깬 재환이 손을 뻗어 홍빈의 눈을 가려주었다. 따뜻한 손바닥이 눈을 덮자 막혀있던 댐이 터지듯 잠이 쏟아졌다.
그래. 지금은 이 온기에만 집중하자. 그저 재환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자.
*
다음날 저녁에 가까운 오후에서야 깨어난 둘은 일어나자마자 입술을 부딪쳤다. 자는 동안 땀이 말라 물기 없는 두 몸뚱이가 서로를 만지고 안을 때마다 열기가 번졌다. 홍빈의 손은 재환의 엉덩이 사이를 갈라 부어있는 입구를 매만졌다. "더는 못해요-!" 다급하게 말리는 재환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재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홍빈 씨 웃는 거 처음 봐요."
홍빈도 이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정말 몇 년만의 일이었다.
"응. 오늘 못 가니까 망치 니가 수금해라."
요새는 재환을 감시하는 일 때문에라도 수금을 못 했지만 일이 아니라 놀면서 가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망치에게 전화를 해두었다. 재환은 통화를 하는 홍빈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욕조 한 구석에 앉아서 거품으로 장난을 쳤다. 두 손 가득 거품을 모아서 홍빈 쪽으로 후- 부는 장난이었다. 욕조가 꽤 넓어서 홍빈에게까지 거품이 닿지는 않았지만 사방으로 작은 거품들이 흩날렸다. 뜨거운 물을 콸콸 틀어놓은 터라 욕조에서 물이 흘러넘쳤다. 철썩이는 물소리를 망치가 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못 간다고 톡해놨는데. 홍빈 씨는 카톡 안해요?"
전화를 끊자마자 재환은 홍빈의 종아리를 발바닥으로 문지르면서 재잘재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도 못한다면서 왜 이리 사람을 부추기는지. 홍빈은 재환의 발을 잡아당겨 발가락을 입에 물었다. 아, 잠깐-! 재환의 말리는 소리에도 뜨끈한 물에 불어서 부들부들해진 발가락을 입에 넣고 핥았다. 발가락에서도 단 맛이 나는 것 같았다.
*
삽입 없는 행위도 섹스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걸 홍빈은 처음 알았다. 물론 선수가 되기 전에 보도나 도우미를 뛰면서 2차는 안 하는 애들이 있는 건 알았다. 그래도 매춘은 매춘. 똑같다고 생각했다. 손은 2, 입은 3, 넣는 건 5. 찜질방 이발소에서 대기하는 싸구려들의 기준이었지만 어차피 넣는 것은 결국 금액 차이다.
학연의 아버지, 차 회장의 손에서 큰 홍빈의 주변에는 언제나 일반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득했다. 홍빈의 동정을 뗀 여자도 선수였고 학교에서 달라붙는 보통의 여자애들은 일부러 멀리했다. 어차피 닿지 않을 연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일반인과 엮여서 그들의 인생을 꼬을 필요도 없다고.
그래서 홍빈에게 좋아서 섹스하는 것은 재환이 처음이었다. 더 넣을 수가 없어서 몸을 만지고 빨고 손으로 흔들어주기만 하는데 섹스처럼 좋았다. 아니, 섹스였다. 재환과 나눈 첫 섹스는 단순한 교미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삽입하지 않아도 재환과 하는 건 섹스였다. 입을 맞춰서 숨결을 나누면서 홍빈은 사정했다. 재환은 홍빈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홍빈의 등을 끌어안고 헐떡대다 사정했다. 서로의 정액도 섞였다. 이제 더 이상 섞일 만한 게 없었다. 피와 눈물 외에는.
*
학연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