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조각] 홍켄/ 랍켄

바비켄 2021. 4. 28. 01:25

[약 공포?홍켄] 그림괴담



니가 죽은 후로 나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개중에는 비싸게 팔린 것도 많았다. 비싸던 싸던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그린 그림들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알 바는 아니고 어쨌거나 그 그림들은 모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 전에 팔리지 않았던 일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마냥 내 손에는 한 점도 남지 않았다.


"또네요."


하지만.


"이 그림은 팔아도 팔아도 계속 돌아와요."


왜일까. 


"이러다 괴담이라도 생기는 거 아닌가 몰라."


내 그림을 매매를 총괄하는 그녀는 웃으면서 한 그림을 내게로 가져왔다. 


"일단 지금 전시관에 자리 없으니까 갖고 계시라구 가져왔어요. 맘에 드시면 그냥 소장하셔도 되구요."


대체 왜일까 별 다를 것도 없는 그림인데. 


"예쁜데 왜 계속 돌아오지. 색이 어두워서 그런가?"


작업실 빈 벽에 그림을 세워두면서도 그녀는 의아해했다. 그럼 다음에 뵐 게요. 인사와 함께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제서야 그림을 제대로 보았다. 그릴 때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멍하니 이걸 내가 그렸나 신기해했다. 내가 저런 색을 쓰던가. 저건 뭘 그린 거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걸 그릴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걸. 


밤이 어두운 녹색의 정글이 캔버스를 꽉 채우고 있다. 아니, 밤의 정글을 캔버스 크기대로 한 조각 뚝 잘라낸 것에 더 가까운 그림이다. 거칠게 덧칠한 두터운 붓터치때문인지 그림 속 나뭇잎들이 마치 사각사각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마른 피처럼 검붉은 꽃들이 이글거린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습기, 축축한 나뭇잎들이 부딪치는 소리. 나는 팔뚝에 소름이 돋아 그림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


"그림이 작가님을 좋아하나봐요. 왠지 더 깊어진 느낌이에요."


그녀는 그가 죽은 후로 내가 잘 살아있는지 감시하러 불쑥불쑥 찾아오곤 했다. 찾아오는 시간도, 기간도 비정기적이다. 연달아 이틀을 방문하기도 하고 이주가 넘도록 안 오기도 하고. 오늘은 5일만이다. 


"혹시 새로 그리신 건 아니죠? 연작이에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젓자 그녀는 아예 그 앞에 앉아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그림들을 보고 감정하고 가격을 매겼을 그녀조차 긴가민가해하자 나는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같은 정글인 것 같긴 한데.... 뭔가 달라진 것 같아요. 초점이 다르다고 해야하나. 지난번엔 정글의 왼쪽을 비추고 있었다면 이번엔 오른쪽을 비추고 있는 느낌? 같은데 달라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무섭다."


그녀는 괜히 에어컨 리모콘을 만지다가 머쓱해하며 돌아갔다. 나는 그때처럼 그녀가 가고난 뒤로 계속 그림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본 뒤 나는 확신했다. 저건 남한테 보이지 않는 구나. 내가 보는 그림 속에는 까만 점이 하나 생겨있었다. 내가 그린 적 없는.


***


"이쯤되니까 진짜 오싹하네. 작가님 저 놀리시는 거 아니죠? 정말 그림에 손 하나도 안 댔어요?"


이제 그녀는 거의 절박한 어조로 말할 정도였다. 


"이상해요. 사진으로 찍어놓은 거 보면 달라진 건 없는데...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구요."


역시 그림을 만지는 사람이라 감각이 다른가.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에게만 보이는 까만 점이 말이다. 
까만 점으로 보이던 그것은 멀어서 그렇게 보였던 것일 뿐인지 그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제대로 된 형태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이제 금방일 것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 그 것은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에 몸을 숨겨가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워지고 있다. 밖으로, 밖으로.


"이거 계속 여기 둬도 되겠어요?"


걱정스럽게 묻는 그녀. 차라리 뭘 그렸냐고 묻는 게 낫지 않겠어? 나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나의 등 뒤에서 미친 사람처럼 온 몸에 물감을 묻히고 캔버스를 채우는 나를 안타깝게 보았다. 내가 나를 안타깝게 봐?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건 내가 아니라는 것 뿐. 꿈을 꾸면서 이 시선이 나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꿈 속의 나는 나의 등 뒤로 다가가 마른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림을 그리는 나의 눈은 텅 비어있다. 아니 아주 새카만 광기로 가득 찬 것 같기도 했다. 내 주위는 온통 어두운 것들로 가득했다. 그 어두운 것들이 내 손을 잡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새카맣고 새카만 것들이 나를 감싸고, 그리고 물감과 붓에 섞여서 그림으로 들어간다. 숲으로, 정글로, 그림 속으로. 

아, 그렇구나. 
이건 너구나. 
너의 시선이구나.

나는 눈을 떴다. 내 위에는 시커먼 게 올라 타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것이 내 사지를 짓눌렀고 그것의 온몸에서 난 새카맣고 긴 털들이 내 얼굴을 간질렀다. 그것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같은 곤충의 발소리가 난다. 한 두 마리가 아닌 수십마리. 아니, 몇 백마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의 꼬리는 내 그림에 닿아 있었다. 아니, 그림에서 나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소름조차 끼치지 않았다. 꿈 속에서 보았던 그 검은 것의 정체가 이것이라면. 그리고 이것이 진짜라면... 
나는 그저 내 위에 올라탄 붉은 안광의 그것과 눈을 맞춘 채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오자 나는 붓을 들어서 너와 나를 그렸다. 

보고 있어?
보고 있어?
사랑해.
사랑해.

그림 속에 너에게 입맞추며 나는 밤을 기다린다. 너와 내가 아직 같은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면 이제는 더 이상 밤도 아침도 무섭지 않았다.




[랍켄] 코스프레 귀청소방<
인턴기자 원식이x귀청소방 실장 재화니




"실장님, 이 사람 이상해요!"


여자의 날카로운 외침에 절로 한숨이 나와 과부하가 난 듯한 이마를 짚었다. 여자는 까만 메이드복을 휘날리며 방문을 나갔고 나는 좁은 빈 방에 덩그러니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허탕이다. 또 들켰다. 쓸만한 건 못 건졌지만 그래도 인터뷰를 따긴 땄으니까 괜찮지 않을까...는 택도 없는 소리. 우리 인턴팀에서 유사 성행위 업소 취재를 맡기로 한 이상 일정량의 인터뷰 분량을 뽑아야 되는데, 인터뷰 담당인 내가 계속 실패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우리 인턴팀은 실습 꼴지를 할 게 분명하다. 이미 몇 번이나 떨어지고 이번에야말로 가까스로 신문사 인턴에 뽑혔는데 이렇게 끝날 수는 없는데 말이다. 어떡하지. 나는 멍하니 야릇한 빨간 꽃무늬의 벽만 바라보다가 아차, 싶어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실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쫓아내기 전에 제 발로 가야지 싶어 문을 나가려는데,


"어? 여기서 또 보네. 우리 인연인가봐."
"...그러네요."


실장은 작업멘트를 날리듯 말하며 내게 웃었다. 나는 절망했다.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다니. 눈 앞의 귀청소방 실장은 어제 간 키스방에서 나를 쫓아냈던 바로 그 놈이다. 혼자서 업소를 두 개나 관리하다니. 이건 반칙이잖아! 실장은 내게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잠시 사무실에서 얘기 좀 할까요?" 라는 아주아주 무서운 말을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말이 아니라 실력행사를 하려는 거 아냐? 주먹으로 나에게 인생의 교훈을 주려는 거 아냐? 얼굴 자체는 험악하기는 커녕 오히려 뚜렷하게 잘생긴 편이지만 그래서 더 무섭다. 차라리 우락부락한 남자면 그냥 덩치로 좀 위협하다가 보내줄 것 같은데 잘생긴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거다. 사무실에 다른 남자들이 더 있으려나? 나는 짱구를 열심히 굴리며 얌전히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먼저 들어가요."


남자는 나를 먼저 사무실로 들여보내고 자기가 문을 닫았다. 뒤를 내주지 않는 치밀함까지 갖추다니. 정말 무섭다. 나는 찍소리도 못 내고 덜덜 떨며 남자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 소파에 앉았다. 남자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나를 보며 웃었다.


"내놔."
"무, 뭘요?"
"뭐긴, 녹음기지. 카메라도 있어?"
"이봐요, 남의 가방을..!"
"녹음기만 있네. 다행이다."


남자는 내 가방을 뺏어서 거꾸로 뒤집어서 와르르 물건을 쏟아냈다. 펜모양의 녹음기를 찾아낸 후에도 한참을 물건들을 뒤적거린다. 


"요새 기술이 하도 발전해서... 애들이 몰카같은 거 찍힐까봐 진짜 무서워하거든."


그러니까 이건 압수. 남자는 일어나서 자기 책상 서랍에 녹음기를 넣었다. 아, 씨발... 어떡하지.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남자가 책상에 엉덩이를 기대고 나를 보고 있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주 빤히.


"기자? 설마 집에서 우리 애 목소리 들으면서 한 번 더 빼려는 건 아닐테고."
"...사람을 뭘로 보고! 기자 맞아요!"
"그치. 어제도 키스하려고 돈 낸 사람이 키스도 안하고 계속 이상한 질문만 했다더라고."


남자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옆에 앉자 푹신한 쿠션이 그 무게만큼 가라앉는다. 나는 남자를 경계하며 살짝 옆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두 번이나 돈 냈는데 아깝겠다. 한 번도 못 뺐잖아요."
"...굳이 남의 손 안 빌려도 되요, 저는."


갑자기 사근사근한 말투로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내 허벅지를 만져오는 남자의 손길에 기겁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남자는 작게 웃으며 내게 더 몸을 붙였다. 그리고 내 뒷주머니에 넣고 있던 핸드폰을 꺼낸다.


"이봐요!"
"폰으로는 녹음 안했어? 목록 봐봐."
"...안 했어요!"
"허술하네. 나라면 이중으로 녹음하겠다."


내 결백을 증명하듯 깨끗한 음성목록을 보여주자 또 눈을 접어 웃으며 내 실수를 꼬집는다.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남자는 내 실수가 그렇게 웃긴가. 별로 웃을만한 일도 아닌데 왜 계속 웃는지 모르겠다. 퇴폐업소 실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계속 웃으면 더 속 모르겠고 더 음흉해보이고 그러거든요... 남자는 내 폰을 뺏어서 소파 앞 테이블에 놓더니 새빨간 녹음버튼을 눌렀다. 00:01- 녹음이 시작되었다.


"녹음을 왜 해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다 대답해줄게."
"네?"
"나만큼 아는 거 많은 사람 찾기 힘들 걸요? 내가 관리하는 게 키스방이랑 귀청소방 말고 다른 것도 있거든."


남자는 또 속 모를 웃음을 지으며 내 허벅지를 더듬었다.


"대신- 내가 뭘 하든 가만히 있어요. 그게 내 조건이야. 대답 듣기 싫으면 바로 나 밀어내면 되고."


남자는 능숙한 손길로 내 벨트를 푸르고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드로즈 위로 만져오는 손에 나도 모르게 헉- 숨을 삼키자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내 귓볼을 핥았다. 가장 예민한 부위를 더듬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흣... 보통, 일하는 여자애들은... 읏, 몇 살쯤, 인가요?"
"음- 알바랑 직원이랑 연령대가 좀 달라요."


남자는 내 드로즈를 내리고 얼굴을 묻었다. 나는 축축하고 뜨거운 곳에 삼켜지며 그대로 인터뷰를 잊었다.